요셉은 꿈을 꾸고, 아침이면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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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꿈을 꾸고, 아침이면 일어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12.24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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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The Dream of St Joseph by Rembrandt
The Dream of St Joseph by Rembrandt

대림1주일을 하루 앞둔 11월 30일, 교회전례력으로 한해의 마지막이자 새해를 맞이하는 초입에 집 근처 파주 예수마음배움터에 갔다. ‘성화와 함께하는 대림기도-주님을 기다리는 자리’라는 주제로 짤막한 피정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심수녀회 하영유 수녀님의 성화 묵상을 따라가면서, 내내 마음에 남아 있는 그림은 렘브란트의 <꿈꾸는 요셉>(St. Joseph’s Dream, 1646)이었다.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요셉 성인을 다룬 성화들에서도, 아기 예수를 돌보는 마리아 옆에서 졸고 있거나 뒤에서 잠에 빠진 요셉을 흔히 볼 수 있다. 요셉을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낸 화가들도 많다.

요셉은 사실상 복음서에서 존재감이 없지만, 그래서 늘 마리아의 그림자로 남아 있지만, 정작 예수 아기의 생사를 가름하고 삶을 보증하는 결정은 요셉의 잠결에 이루어졌다. 마태오복음에서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난 것은 모두 네 번이나 된다.

마리아의 임신을 알고 파혼을 고민할 때 주님의 천사가 꿈결에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다.(1,20) 헤로데의 학살이 임박했을 때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천사가 알려준 것도 요셉의 꿈결이었다.(2,13) 그렇게 예수는 죽음을 벗어났다. 헤로데가 죽자, 다시 천사가 꿈에 나타나 이스라엘로 돌아가라 일러주고(2,19), 헤로데의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다스리는 유다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요셉에게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으로 가라고 천사가 알려준 것도 꿈결이었다.(2.22) 그렇게 예수는 삶의 터전에서 갈릴래아에서 얻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셉이 꿈결에 들은 이야기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메시지는 주님의 천사의 입에서 나왔지만 결국 하느님의 귀띔이었고, 요셉은 자신이 들은대로 행하였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곰곰이 새길 줄 알았던 사람은 마리아만이 아니었다. 요셉 역시 곰곰이 정황을 살피고 천사와 손발을 맞춰가며 지혜롭게 행동하였고, 그래서 ‘예수강생’은 현실이 될 수 있었다. 국가권력이 학살을 서슴지 않는 시대에, 위험천만한 아기가 안전하게 나자렛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아기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참된 빛이었다. 그 아기가 예루살렘에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은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고 로마제국과 맞장을 뜨게 된다. 그래서 제국의 ‘힘’에 눌려 죽임을 당하지만, 온 세상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예수였다.

 

세상의 가장 끝자리에서, 샤를 드 푸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요셉 성인은 늘 배경처럼 남아 있다. 가정의 수호자이며 곤궁한 자를 돌보는 성인이다. 어쩌면 그런 요셉에게 매력을 느낀 사람이 ‘예수의 자매들/형제들의 우애회’를 창립한 샤를 드 푸코인지 모른다. 푸코는 늘 ‘은닉된 삶’을 동경해 왔다. 나자렛에서 드러나지 않은 채 살아왔던 예수와 마리아, 요셉의 자잘한 일상 안에서 거룩한 빛을 찾고자 했다. 배우고 노동하고 사랑하는 튼튼한 일상 없이 세상을 지탱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보통 수도생활을 하거나 성직으로 나아갈 때 ‘남다른 삶’을 희망하기 쉽다. 좀 더 거룩해 보이고, 좀 더 용맹하고, 좀 더 극적인 애덕을 실천하고, 또한 그렇게 마음속으론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샤를 드 푸코는 자신의 영적 스승이었던 위블랭 신부가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하도록 그대는 가장 끝자리를 차지하라”고 말한 대로 “나 자신은 언제나 끝자리를 찾으며 내 생활은 가장 말째가 되어 가장 비천한 자로 살아가리라” 하고 다짐하였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의 구유 위에 내려오신 것처럼, 하느님은 가장 누추한 자리에 있는 작은이들 가운데 계신다고 믿었다.

푸코가 회심하기 전, 방탕한 생활을 끝내고 지질학회에서 대단한 인정을 받았을 때, 그에게 찾아온 것은 모로코에서 만난 무슬림들의 깊은 신심이었다. 푸코는 이런 영적 갈증을 풀기 위해 파리 생오귀스탱 성당을 찾아가 위블랭 신부를 만났다. 위블랭 신부는 어떤 설익은 토론도 허락하지 않았다. 무작정 ‘무릎을 꿇고 고백성사를 보라’는 것이었고, 푸코가 참회하고 몸을 일으켰을 때 던진 한 마디는 이거였다. “아직 아침 식사 안 하셨지요?” 그리곤 즉시 그에게 성체를 입에 넣어 주었다. 이처럼 거룩함은 일상으로 이어진다.

푸코가 회심하고서 찾아간 곳은 트라피스트 수도원이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푸코는 날마다 빗자루를 들고 긴 복도를 청소했다. 이곳엔 부유하게 살던 때처럼 시중드는 하인도 없었다. 자신이 이곳 수도자들의 하인이었다. 애써 일하고 엄격한 규칙대로 살면서 푸코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한 조각의 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동을 필요로 하는지 절실히 깨닫고 체험했다”고 말한다. 그 다음에 찾아간 곳이 나자렛이다. 여기서도 푸코는 성 글라라 수녀원 일꾼으로 고용되어 허드렛일을 했다. 올리브 산과 베타니아가 바라보이는 그곳에서 푸코는 돌을 베개 삼아 나무 의자에서 몸을 꼬부리고 잤다. 누군가 불편한지 물으면 이렇게 답했다.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불편함을 겪으셨다지요.”

 

사진출처=sammydvintage.com
사진출처=sammydvintage.com

성 요셉은 신학을 알고서 못질을 했을까?

일상을 하느님 현존 안에서 살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허나 일상에서 발견하지 못한 하느님을 강단에서 발견할 수는 없다. 남 보기에 멋들어진 설교도 저작도 성사도 일상에서 길어 올린 봉헌이 없다면 ‘제멋에 겨워 추는 춤’이다. 때로 이런 춤도 나쁘다 할 수 없지만, 기왕이면 곡조에 맞춰 춤을 추어야 만인이 행복하다. 샤를 드 푸코는 프랑스에서 신학공부를 할 기회가 있었지만 늘 마음은 일상을 향하고 있었다. “성 요셉은 신학을 알고서 못질을 했을까?” 푸코는 기쁜 마음으로 대패질 하던 요셉 성인을 떠올렸다. 나중에 사하라에 가서도 신학서적은 풀지도 않고 침대 밑에 넣어두었다 한다. 신학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뭐 하나라도 복음대로 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푸코는 사막에서 행복했다. 그곳은 또 다른 나자렛이었고, 성인들의 땅이었다. “사막은 나에게 가장 깊은 기쁨을 줍니다. 여기에는 매혹적인 감미로움이 있고, 고독 가운데 살면서 내 자신이 치유받고 행복해집니다. 또한 영원함을 마주보면서 진리에 싸여 있는 나를 발견케 합니다.”라고 편지에 썼다. 그곳에서 푸코는 흰색 베두인 옷을 걸치고, 가슴에는 붉은 심장 위에 십자가를 달아 붙였다. 이곳이 진짜 수도원이었다.

그럼 푸코는 사막에서 무엇을 했을까? 자욱하게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이 꿈결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났을 것이다. 요셉 성인처럼 천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다. ‘공동의 집’인 이 행성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예수를 떼어내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명성과 재산과 권력을 지닌 이들에게 주변으로 밀려나 배제와 차별, 억압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기쁜소식’은 무엇일지 고민했을 것이다. 그들의 거처로 돌아가 거룩한 바보로 살아가는 방법을 탐구했을 것이다.

교종은 교종의 일을 하고, 요셉은 요셉의 일을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아마존에서 생태계의 복원을 위해 호소하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평화는 두려움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며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원전은 완전히 안전이 보증될 때까지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교종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까지 포함된 모든 이가 “생명의 문화, 화해의 문화, 형제애의 문화가 승리”하도록 매일 함께 기도하자고 청했다.

요셉은 일상에서 예수님을 돌보았다. 추우면 군불을 때고 더우면 창문을 열었다. 마리아는 끼니 때가 되면 밥을 짓고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마르타는 거리에 나가 촛불을 들었고, 자캐오는 장부를 다시 썼다. 시몬은 누군가의 짐을 들어주었고, 또 다른 마리아는 공부를 했고, 베드로는 다시 그물을 들었다. 예수님이 집을 짓느라 망치를 잡았을 때 안드레아가 못을 쥐고 곁에서 그분을 도왔다. 요셉처럼 밤마다 꿈을 꾸면서, 아침이면 일어나 행동하는 사람에게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9년 12월-2020년 1월호(통권 제22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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