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교회를 살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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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교회를 살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 토머스 머튼
  • 승인 2019.12.23 22: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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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시험 당하는 이상들-4: 성장한 그리스도인

너무 왜곡된 나머지 현실적으로 거짓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에 대한 견해들을 억지로 받아들이려다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잃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이런 종류의 의견들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접촉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 갖고 있는 생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정신에 관한 불완전한 개념에 매달릴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신앙을 더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잃게 만든다. 그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억지도, 자기 견책도, 이류 그리스도인들에게 맞추기 위한 잘못된 노력이 아니라 진정한 주제를 명백하게 가려내는 것이며 진실한 견해를 복구하는 것이다.

 

사진출처=arquitecturatvblog.wordpress.com
사진출처=arquitecturatvblog.wordpress.com

신앙에 대한 유치한 개념에서 벗어나라

우리의 이상은 확실히 가장 철저한 시험을 거쳐야 한다. 우리는 이 시험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거룩함과 그리스도교적 성숙함(우리의 유치함이 빚어낸 허상을 벗어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바꾸고 새롭게 해야 할 뿐 아니라, 일생 동안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과도 부대껴야 할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교적 사회 속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폐단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적 사회”는 개념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유하고 안전한 현대 유럽과 미국 사회는 확실히 순수한 그리스도교적 사회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전통의 흔적에 매달려, 자신들이 아직 그리스도교적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의심할 여지없이 19세기와 20세기의 실용주의와 세속주의 정신은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정신의 깊은 곳까지 침투하였다. 한편, 프랑스 혁명과 그것의 영향력에 격렬하게 대항하던 19세기의 교회가 얻은 것은 경직된 사고와 새로운 발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은 가톨릭 신자들의 삶에서 많은 갈등과 명백한 모순을 낳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교회는 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모든 측면에서 폐단과 양심의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언젠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단점들과 -다른 사람에게서든 자신에게서든간에- 맞부닥치게 되는 것은 정상적이며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 교회의 활동을 언제 어디서나 이상적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부정직하고 불충실한 자세이다. 역사가 그 반대의 사실을 증명한다.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하느님과 그분 진리의 이름을 내건 채, 은밀한 방법으로 편견, 타성, 정신적인 마비 상태에 머물러 있다. 거룩함 대신 심각한 도덕적 무질서와 불의가 기세를 떨치는 경우도 물론 있다.

교회가 스스로 오류를 가르치거나, 불의를 조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용하여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많은 오류, 부정직, 불의의 요소를 양산한다. 또한 교회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단순히 무시해 버리고, 영성의 영역과 사회 안에서 마땅히 수호해야 할 정의와 진리를 져버린다.

교회개혁, 정직하고 겸손하게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문제들을 진리와 하느님 교회의 영광을 지키기 위한 진지하고 겸손한 근심을 갖고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이러한 오류를 수정하는 일에 협조하는 법을 배워야 하되, 경솔하고 반항적인 열성에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교만함은 절대 은총의 징표가 될 수 없다.

성 베드로 다미안은 11세기 교회 안의 매우 심한 악습에 격분한 수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는 무엇보다 하느님 앞에서 거룩해야 하며, 약점을 지닌 자신의 형제들 앞에서 교만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 성인은 전체 그리스도인들에게 독단적이고 일반적으로 가해지는 엄중한 벌칙에 반대했으며 종교개혁이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적 정신은 사랑, 겸손, 봉사의 정신이지 절대성과 힘을 방어하기 위한 폭력의 정신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단체, 심지어 교회 내에도 악습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정직함, 겸손, 사랑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것을 숨기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한 개인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광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그것을 자신들의 내적인 삶을 위한 좋은 목적, 자신의 신앙과 순종의 정신, 교회에 대한 초자연적인 사랑을 순수하게 단련시킬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여 그렇게 이용할 수 있다.

교회개혁은 우리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바라볼 능력조차 없다: 그들은 그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자신들의 가슴을 비트는 번민을 피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번민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모를 수도 있으나, 번민은 계속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보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심각한 수치가 된다. 그들은 그 상황에 대항하고, 교회를 저주하며, 심지어 거기서 빠져 나오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적 소명의 참된 의미에 가까이 가고 있으며, 성숙한 그리스도 신자로서 요구되는 희생을 치루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 희생이란 곧 자신과 다른 이들, 그리고 그들의 가장 소중한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불완전함과 결핍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불완전함에 관한 진실과 마주하여 교회가 단지 그들에게 모든 것을 해주기 위해, 평화적이고 안전한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그들을 피동적으로 성화 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반대로, 이제 그들은 모든 힘을 다해 그들의 공동체에 자신을 내주어야 하며 그 안의 모든 고통에 적극적이고 관대하게 동참해야 한다. 이제 그들은 자신에게 더 이상 가치 없어 보이는 이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 이 점을 기억하십시오. 각각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야지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충분히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것을 넉넉하게 가질 수 있고 온갖 좋은 일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린토 후서 9,6-8).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특히 상황이 절망스럽고 불만족스러우며 자신의 희생이 대부분 쓸모 없는 일이 되어 버릴 때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럴 때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분은 우리의 희생을 보시고 계시며, 그것이 사람의 눈엔 비록 아무 쓸모 없고 절망스러울지라도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이 은총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진실되고 명백한 선에 눈을 뜬 것이며, 우리의 그리스도적 소명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될 것이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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