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영혼이 까맣게 탈진할수록 커지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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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 영혼이 까맣게 탈진할수록 커지는 사랑
  • 한상봉
  • 승인 2016.06.2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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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한상봉 칼럼] 

그늘진 사랑이 있다. 성당에서는 늘 ‘사랑’을 이야기 하고, 그 사랑 이야기를 담은 <아가>는 히브리 성경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거룩한 사랑이겠다. 인간의 사랑을 하느님의 사랑과 맞닿은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아마 시인들이 즐겨 얻어 쓰는 ‘사랑’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은 순정한 사랑이겠다.

이 사랑이 대중가요에서 몸을 얻고 거리로 쏟아져 내린다. 필사적인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사랑’이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겠다.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고 명성을 얻으려는 것도 사실상 알고 보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게 가족일 수도 있고, 동료이거나 교회 장상일 수도 있겠다. 연인을 위한 것이라면 물불 가릴 여유가 없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내가 사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이 사랑이 하느님 그분의 사랑과 잇닿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생각한다.

1993년에 <황금빛 모서리>라는 시집 한 권을 내고 종적을 감추었던 시인이 있다. 김중식, 사랑을 팔고 사는 인천 숭의동의 후미진 엘로우하우스에서 유년기를 살았던 친구다. 그는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이라고 썼다.

아마도 ‘생활’과 ‘이탈’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였을 친구다. 문득 그 이가 떠올라 인터넷을 뒤져보니, ‘배고파서’ 그동안 이런저런 직장을 옮겨 다니다가 신문사 기자로, 최근에는 이란대사관 문화홍보관이 된 모양인데, 사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그는 “산만큼 쓰고, 쓴 만큼 산다”고 했다. 가혹한 삶의 무게를 견디며 순정한 영혼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한 요청인가, 싶다.

김중식은 ‘모과’(木瓜)라는 시에서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몸이 말라비틀어지고/영혼이 까맣게 탈진할수록/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닥에서 더욱 간절한 사랑이다. 꽃 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의지는 사랑”이라고 했다. “가난에 찌든 모과”의 사랑을 놓아버릴 수 없는 시인은 연민의 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을 지옥이라 했다. 그러나 사랑이란 아픔조차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더 작아지고, 그분은 더 커져야 한다고 고백하는 게 사랑이다. 가난 가운데 더 빛나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도 끈질긴 사랑이다. 그러니, 우리들의 사랑은 ‘그럼에도 사랑하는 것’이다.

“가난에 찌든 모과”의 끈질긴 사랑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는지 모른다. 하느님의 자비 밖에서는 구원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겠다. 그분이 나를 차지하시니, 나는 없고 그분만 내 안에 남아서, 나의 손발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나누기 때문이겠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이 말했듯이, 그분은 이제 나의 손과 발을 빌려 다른 이들을 축복하시고 사랑을 나누실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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