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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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 기다리며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12.1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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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샀습니다. 붉은 표지에 <내 마음이 지옥일 때>라고 제목이 붙었더군요. 아득한 세상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띄우는 시편 모음입니다. 정혜신 박사와 한 짝인 이명수 심리기획자가 엮은 책입니다. 이명수 님은 이런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시리아나 아우슈비츠처럼 객관적 지옥도 있지만 수많은 주관적 지옥들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게 뭐든 드라이아이스처럼 시간이 지나면 휘발될 고통도 현재의 내게는 피부를 태우는 듯한 화상이 될 수 있다는 거지요. 맞는 말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관계를 맺고 사는 한 크고 작은 지옥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누가 내 뒤통수를 쳤을 때. 나만 따돌림 당했다고 느낄 때. 누군가가 죽이고 싶도록 미워질 때. 오장육부라도 꺼내 보이고 싶을 만큼 억울할 때. 그런 순간들은 어김없이 지옥이다.”

[내 마음이 지옥일 때] 이명수 지음, 고원태 그림, 해냄출판사, 2017
[내 마음이 지옥일 때] 이명수 지음, 고원태 그림, 해냄출판사, 2017

이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있다고 해요.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여기 있게 됐는지 알려주는 ‘지도’ 한 장만 있으면 된다고 해요. 그러면 안개가 걷히고 혼돈이 줄어들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도 시야만 확보되면 헤쳐 나갈 힘이 생긴다고 해요.

그 지도를 이명수 님은 시(詩)에서 찾습니다. 가진 자와 강자의 손을 들어주는 게 ‘역사’라면 시는 약자의 손을 들어준다고 믿습니다. 시가 소외된 사람에게 뜨끈한 밥 한 공기 되진 못해도 그들을 기억하는 눈물 한 방울은 도리 수 있다고 믿는 거지요. 그래서 물 끓는 냄비에 수제비를 떠 넣듯이 시를 골랐다고 하더군요.

제일 첫 마디가 “징징거려도 괜찮아”입니다. 힘들어. 슬퍼. 속상해. 그걸 입밖으로 내는 거지요. 징징거리는 소리가 많다고 그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지지도, 칙칙해지지도 않는다고 해요. 심한 몸살을 앓을 때 신음소리라도 내지 못하면 더 아프니까 징징거려도 괜찮다고 다독이는 거죠.

내 마음이 지옥일 만큼 상처 입었을 때 고름이 생기고, 이 고름은 오래되었다고 살이 되지 않기에, 빼내야 하죠. 그래야 정상적인 세포가 복원된다고 거죠. 징징거림은 남들 보기엔 엄살이지만, 내게는 압력이 꽉 찬 압력밥솥의 압력추를 젖히는 일이라고 해요. 그래야 밥도 제대로 되고 폭발하지 않는 법이라는 조언입니다. 그 참에 골라낸 첫 시가 마종기 선생님의 <괜히 견디지 마세요>입니다.

"헤매고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깊이 숨은 것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부분)

이럴 때 누군가 오직 ‘너’라는 이유만으로 “내 말이 그 말이야” 맞장구 쳐주고 함께 펑펑 울어주는 편파적인 사람이 꼭 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고 김명수 님은 이야기 합니다. 엄마이며 친구고 연인같은, 스승이며 동지인 그런 사람 말입니다. “환한 웃음이, 깊은 포용이, 맑은 눈물이, 우물같은 깊은 끄덕임 한 번이 심지어 당신의 존재 자체가 지옥 같은 상황에 빠져있는 누군가에겐 로또가 된다.”고 해요. 그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옥은 저만큼 물러선다는 것이지요. 항상 첫 시가 좋네요. 박서영의 <마음 놓고 업힐 수 있는 사람>을 읽어봅니다.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름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사람이 짐승을 업고 긴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이
젖어 더욱 무거워진 몸을 업어주고 있다
울음이 불룩한 무덤에 스며드는 것 같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이런 것 다 알고서도, 내가 지금 겪는 고통을 헤아리기란, 그 고통이 무늬가 될 때까지 참아내기란 여전히 힘든 노릇이지요. 문제는 꼭 그 한 사람이 노력한다고 내게 찾아와 주는 게 아니라는 점이지요. 내가 그 누군가에게 꼭 그 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도 상대방이 바라던 그 사람이 아니면 그것도 안 되겠지요. 그러니, 그 한 사람은 은총처럼 만나야 하겠지요. 절망의 세월을 거슬러 어디선가 지금 그 사람이 내게 오고 있을지 모릅니다. 발원하고 발원해도 오지 않던 사람이 문득 새삼 내 방문을 두드릴지 누가 압니까?

대림절입니다. 그 한 사람을 기다리는 순간입니다. 대림절이 겨울로 가는 길목에 있는 까닭이 있겠지요. 그분이 성큼 내게 다가오기 전에, 그분은 먼저 포대기에 싸인 채 아기로 오셔서 성모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포대기를 준비해야 합니다. 내 깊은 마음속에서 따뜻한 물 한 바가지 길어 올려야 합니다. 누군가 징징댄다고 타박하지 말고, “그래, 그래 괜찮아.” 말해 주어야 합니다. 좀 손해 보고 좀 야속하더라도 “살다보면 그럴 수 있지.” 안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문득 그분이 말하겠지요. “네가 바로 나다.”라고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그 한 사람이 바로 ‘나’였음을 깨닫게 하겠지요. 주 예수여, 오소서. 내 마음 속에 오소서. 그래서 마침내 제가 당신 되게 하소서.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19년 12월-2020년 1월호(통권 제22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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