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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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12.1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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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옆에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평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고정희 시인의 <천둥벌거숭이의 노래>입니다. 1991년 마른세 살에 지리산에서 죽었다는 이 시인을 두고 어떤 이는 시몬 베유를 닮았다고 합니다. 철학교사였지만 노동자가 된 그녀는 우리를 부박한 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오직 ‘은총’뿐이라고 했죠. 그리스도교에서 노예들의 신음소리를 들었고, 그네들의 손을 잡아주려고 하느님이 지상에 강생하셨다고 믿었던 여인입니다. 그녀는 서른네 살에 이승을 떠났죠. 예수님처럼, 가련한 인생을 가슴 깊은 곳에서 아파하던 이들은 모두 이처럼 일찍 세상을 여의어야 하는지, 저도 모를 일입니다.

 

고정희가 만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그녀는 유고시집에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고 했는데, 그녀의 일평생을 버티게 해준 그분은 누구였을지 궁금합니다. 그 따뜻한 감촉으로 차디찬 겨울을 데워주었던 그 한 사람 말입니다. 내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치자꽃 향기 푸르게 범람하던 그분 말입니다. 소프라노 조수미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라는 수필집에서 예술은 “사람을 이해하고 가슴에 품는 것”이라 했더군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서 예술은 시작한다”고 했더군요. 그 마음이 참 아름답다 생각합니다.

다시 그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하늘같은 사람이 아니라, 동무처럼 동지처럼 다정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 그래서 임마누엘,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면서 그 이를 생각합니다. 복음서에서 얼핏 보았던 그 모습, 그 음성을 기억합니다.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불러주던 분이 내게로 와서, 어깨 잡아 주고 “다시 시작하자” 조근조금 말씀하실 것 같은 순간입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픔이고 슬픔이고 안타까움이지만, 그분 때문에 다시 살자고 용기를 내고 싶습니다. 내 고통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눈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굳게 따뜻한 손 내밀기로 다짐합니다. 강남역 철탑 위에 올라간 노동자들과 김천 톨게이트 노동자, 성주 사드배치 반대하는 어르신들, 세상이 휘두르는 폭력에 희생당하는 모든 사람들, 난민과 이주민, 성소수자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에게도 평화가 눈발처럼 자북자북 내리길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이 글은 수원교구 주보 2019년 12월 8일자에 실렸던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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