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가톨릭일꾼운동이 가능할까?-일꾼운동의 역사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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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가톨릭일꾼운동이 가능할까?-일꾼운동의 역사를 보며
  • 서민호 미카엘
  • 승인 2019.12.16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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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에 관하여-3

「가톨릭일꾼」은 희망과 사회 변화를 절실히 원하던 시기에 발맞추어 출발했다. 미국은 3년째 대공황에 시달리고 있었고 50대 미국인들은 거의 모두 -대략 천 이백 만명에 이르는- 실직되었다. 이 숫자는 현재 서울에서 거주하는 인구에 거의 육박하는 수치이다.

도로시 데이는 당시를 이렇게 묘사한다. “공장에서 연기가 나오지 않는다. 집과 농토마저 저당으로 빼앗기자 사람들은 점점 더 도시로 몰려들어 이미 포화 상태인 구호소로 찾아간다. 뉴욕에서는 누추하고 맥빠진 사람들의 배급 행렬이 시내 곳곳에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다. 변두리와 강가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공터에는… 날림으로 지은 판자집들이 떼거리로 몰려들어 집없는 사람들이 그 앞에 뒤엉켜 붐빈다.”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들, 그리고 “워싱턴의 굶주림에 대한 항의 행렬”과 같은 일들에 대해서 여러 잡지에 기사를 쓰는 자유 기고가였다. 가톨릭으로 개종한지 3년밖에 되지 않았던 그녀는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사명”을 여전히 찾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고통과 곤경에서 허덕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피터와 도로시의 만남-신문 발행부터

1933년 12월의 운명적인 그날, 드디어 피터 모린은 도로시를 만났다. 만난 그 순간부터 그녀에게 가톨릭 역사의 개요을 가르쳤고 행동을 위한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했다. 피터는 이것을 시와 같은 짧은 글로 얘기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쉬운 짧은글”로 알려지게 되었다.

모린은 “혁명의 이론 없이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고 한 레닌의 말을 곧잘 인용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특정한 이론이나 프로그램 없이는 민중들의 삶과 사회를 변혁시키는 데에 적극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모린이 제안한 프로그램들 중에는 새로운 개념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너무 오래된 개념이라서 새롭게 보이는 것”이라고 모린은 말하길 좋아했다. 토미즘(중세 토마스 아퀴나스 학파)에서 “공동선”에 대해 알게 되면서 모린은 성 프란치스코와 초대 교회 공동체, 중세 아일랜드의 남자 수도원, 교황 회칙들, 그리고 에릭 길과, 쟈크 마리땡과 같은 20세기 초의 철학가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원탁 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을 널리 확장하고, 가난한 사람들, 고아, 과부와 집없는 사람들에게 쉴 곳과 먹을 것을 주는 환대의 집을 확장하며, 도시에서 땅으로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기 위한 농경대학을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도로시의 신문 잡지 근무 경력에 착안하여 피터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더 많은 청중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녀에게 신문을 발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형편이 매우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에 도로시는 즉시 재정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피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성인들의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로 모아집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보내 주시죠.”

첫 발행 부수는 2,500부에 불과했으나 1936년에 이르러서는 1부당 1센트씩 모두 15만 부를 발행했다. 이 가격은 오늘날까지도 전혀 변함이 없다. 잠깐 사이에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어 장부 정리라든지 신문 배달 및 발송이라든지, 시를 써주고 그림을 그려주고 그밖에 신문 발행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도와주었다.

원탁 토론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배경과 재능 및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현 상황의 고질적인 면들을 토론하고 이상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모습을 결정하고 마침내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내고자 하는 회의이다. 학자는 이 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이론을 사회적 현실과 접목시키게 된다. 또한 토론은 맹목적으로 학자들이 학구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도록 “훈련된 마음”을 유지하게 해준다. 한편으로 토론은 노동자들에게 학자들의 이상을 드러내주기 때문에 “훈련되지 않은 마음이 피상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도 한다.

지금도 「가톨릭일꾼」 신문을 펼치는 사람들은 저명한 신학자들, 영성 작가들, 평화 운동가들, 사회학자들, 역사가들, 시인들, 음악가들로 구성된 원탁 토론이 뉴욕의 성 요셉의 집에서 매주 금요일 밤에 예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회문제에 대한 개인의 인격적인 책임의 연장-환대의 집

모린이 구상한 두 번째 프로그램은 환대의 집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것은 초대 교회 신자들과 중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볼 수 있었던 구호소에서 암시를 받은 것이었다. 부자들은 이들 구호소를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다. 환대의 집들은 쉼터와 의복과 먹을 것 등 모든 것이 부족한 불경기에서도 필요한 만큼 얻을 수 있었다.

모린의 관점에서 볼 때 환대의 집은 성직자와 평신도들을 서로 만나게 함은 물론 사회 구조와 직접 맞닥뜨리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사회 구조에 희생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끔 했다. 환대의 집에서는 실업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으로부터 더이상 격리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환대의 집에서 이상이 행동으로 실천되는 구체적인 실례를 볼 수 있었다. 이 실천은 사회문제에 대한 개인의 인격적인 책임의 연장인 것이었다.

동시에 모린의 관점에서 환대의 집은 영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고통과 마주한다는 것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구원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노동자의 마음으로-농경공동체

모린이 “농경 대학”이라 부르던 것은 그의 프로그램의 세 번째 단계였다. 농경 공산체로 잘 알려진 프로그램은 도시 거주민들에게 농사 및 공예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시골에 자리잡았다. 실제로 이러한 기술 전수와 농업 협동조합의 양성은 땅으로의 귀향을 용이하게 함은 물론 자급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아울러 학자에게는 육체 노동의 중요성을 노동자에게는 마음의 훈련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우기 생계유지의 농사 및 공예는 생산력을 “이윤보다 필요에 쓰이게 함으로써 인간존재의 영적인 영역과 협동가치를 재발견하는 기초”(마크 엘리스)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농경 공산체들이 과거 60년대에 두루 퍼져 나갔다. 중도에 포기된 곳도 있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곳도 있으며 새로이 시작하는 곳도 있다. 초창기 공동체에서는 사유재산과 공유재산 사이에 마찰도 생겼고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과 정신 노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도 생겼다. “노동자들은 단지 자신의 손으로 일하기를 원하며 그 결과에 만족한다. 아무리 지식인들이 구체적인 결과를 얻고 싶어 해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지적인 차원에 더 많은 관심을 두며 구상과 이론에 대해 다루고 싶어한다”(마크 엘리스). 농경 공산체에서는 지금도 생존을 위해 생산할 뿐 벌이를 위해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가끔은 재정 문제와 생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가톨릭일꾼운동의 확대

환대의 집들은 아주 재빨리 시작되었다. 신문 발행을 도아주러 온 사람들에게도 머물 장소가 필요했고, 그래서 신문을 만들던 일층 가게에 머물렀다. 끼니를 때우려 줄을 선 많은 사람들, 실업자들, 노동자들, 그밖의 다른 많은 사람들도 머물 장소가 없었던 건 마찬가지여서 아무데나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그래도 공간이 부족하자 「가톨릭일꾼」은 다른 가게 하나와 싸구려 아파트까지 빌렸다. 「가톨릭일꾼」은 빈털터리였고 빚에 시달렸다. 하지만 정말 돈이 필요할 때면 그들은 그 지역 본당에 가서 성 요셉께 기도를 드리거나 9일기도를 바쳤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 필요한 기금은 마련되었다.

「가톨릭일꾼」 운동은 애덕의 실천과 신문을 통하여 다른 도시로 퍼져나갔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와 같은 나라에서도 「가톨릭일꾼의 집」이 시작되었다. 각지에서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에게 「가톨릭일꾼」에 대해 강연을 요청해 왔다. 그러나 초기의 이런 성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가톨릭일꾼」이 평화주의적 입장을 내보이면서 미국의 제 2차 세계대전 개입을 반대하자, 전반적으로 전쟁에 호의적이던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비난이 잇달았고 운동 내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공동체 성원들 중 많은 이들이 평화주의적 입장에 반대하며 떠나갔다. 이러한 내부의 혼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로시 데이는 굳건히 버티면서 교황도 전쟁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가톨릭일꾼운동과 아나키즘

「가톨릭일꾼」의 평화주의적 입장은 가톨릭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라 불리는 커다란 운동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 역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칠 것이다. 또한 자신과 이웃을 위해 해야 할 바를 할 것이다. 이러한 아나키즘은 정부에 의해 선전되는 혼돈, 무질서와는 다른 것이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을 회피하고 정부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을 반대함은 물론 정부의 독단적인 중앙 통제에도 반대한다.

「가톨릭일꾼」의 아나키즘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위만을 인정한다. 권세와 권력, 온갖 권모술수를 모두 포기한 사람들은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도로시 데이는 “어떤 권위 앞에서도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 하고, 마땅히 자신의 양심에 이러한 점들을 환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도로시 데이는 또한 뉴맨 추기경의 말을 인용해서 우리의 양심은 가장 신비스러운 부분이자 성소(聖所)이며, 홀로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가톨릭일꾼」의 성원들은 선거 유세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 즉, 투표를 통해 정치인에게 자신들의 신뢰를 보내거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낡은 옛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할 책임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음을 믿는다. 그것은 곧 피터 모린이 자주 언급하던 “사람들이 좀더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말한다. 「가톨릭일꾼」 성원들 중에는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부의 대량 살상용 무기 생산과 저장은 곧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정적인 지원을 거부하는 것이다.

대신 「가톨릭일꾼」 아나키즘은 감옥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진다. 불가피하게 그것이 시민 불복종 운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 자신도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한국에도 이런 운동이 가능할까?

나는 자주 「가톨릭일꾼」와 같은 운동이 한국에 생기는 것이 가능할까 궁금하다. 물론 가톨릭 액션, 사회 활동, 자선 사업 등등에 많은 평신도 단체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는 신자들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단체도 있다. 또 공식적인 가톨릭 조직과는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단체들도 있다.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도로시 데이도 “노동자”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에 의해 어느 정도는 「가톨릭일꾼」 운동이 불신을 받는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 교회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으며 심지어 노동자라는 이미지를 일부러 피하기까지 한다. 그래도 보다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노동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타인의 수고가 아닌 우리 자신의 피와 땀으로 돈을 번다는 자부심을 가르쳐야 한다.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는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 뿐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실제 증명해내야 한다.

「가톨릭일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살고자 공동체를 만들었다. 공동체가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설명하기란 무척 힘들다. 공동체는 대부분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필요성에 직면했을 때 형성된다. 아울러 공동체 성원들이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내맡길 때, 그리고 두려움이나 불신, 일체의 곤경과 나약함을 떨쳐 이겨낼 때 비로소 공동체는 생겨난다.

무엇보다 중심이 되는 것은 사랑이다… “가끔은 끔찍하고 지긋지긋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의 신앙은 사랑이라는 불로 단련을 받는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빵을 쪼개는 가운데 그분을 뵙고 빵을 쪼개는 가운데 서로를 알게되며 더이상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기나긴 고독’을 겪어왔다. 유일한 해결책은 사랑뿐인데 그 사랑은 바로 공동체와 함께 시작된다”(도로시 데이) 

 

일꾼운동의 인격주의

「가톨릭일꾼」과 같은 것의 한국에서 가능한지 묻는 것보다는,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의 삶을 보다 그리스도인답게,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보다 예언적인 역할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느가 하는 질문이 더 적절한 질문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신앙을 보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시키는 것을 시도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톨릭일꾼」에 대한 개념 내지 접근 방법 중에서 한국 가톨릭 교회가 수용해야 할 것으로 사려되는 것을 하나 꼽으라 한다면 나는 “인격주의”를 꼽겠다.

인격주의란 각개인의 자유와 인간적 존엄성을 모든 도덕의 기초와 핵심과 목적으로 삼는 철학이다. 인격주의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에서 타인의 선으로 향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이 타인의 유익은, 국가나 여타의 제도적 기관들처럼 비인격적인 자선에 기대지 않고 사회변혁을 위하여 각자가 인격적인 책임을 짊으로서 이루어진다.

만약 우리가 무주택과 가난, 범죄와 공해 및 병자들의 문제를 정부나 교회 기관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 의무를 게을리 하게 될 뿐더러, 그러면 여타의 문제들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모든 것을 얻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을 따를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가능한 대로 모든 것을 줌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을 뿐이다”(피터 모린).

인격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한국에서 (또는 그런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발견하는 것과는 다른 교회의 개념을 제안한다.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 당시에도 그랬지만 현재의 「가톨릭일꾼」도 하느님 사업을 수행하는데 주교들이나 성직자, 수도자들, 그밖의 교회 기관에 의존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인정이나 인준을 받기 위해 굳이 애쓰지도 않는다.

평신도의 사도직은 정당하다

「가톨릭일꾼」은 교회의 실천과는 별도로, 각자 인격적으로 서로를 적극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마태오 25,31-46)을 좇는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평신도들을 보노라면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있어 자신들의 삶의 일부를 희생해야 하는 의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사도적” 직무란 사제나 수도자들에 의해 행해질 때에 비로소 적법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사제나 수도자들과 유사한 직무를 행하는 평신도들에게는 교회 내에 지지 세력이 없다. 설령 교회 내의 형제 자매들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하더라도 아주 미약할 뿐이다. 그러나 「가톨릭일꾼」을 지지하는 힘은 -재정적이든 자발적인 봉사이든- 거의 대부분 평신도들에게서 생기는 것이다. 배워야 할 좋은 본보기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우리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덕행을 배워야 한다. “가난의 신비란 남들에게 우리 것을 주는 가운데 우리 스스로를 가난하게 만들어 서로 가난을 나누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믿음은 더 증가된다”(도로시 데이). 즉 가난해지려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자유롭게 맡아야 할 역할을 분담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향해 자신을 포기하는 은총을 받고 또 요청한다. 물론 이런 일이나 자발적 가난을 포용함으로써, 다시 말하자면 강요된 가난한 사람들과 기꺼이 그 운명을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자신을 내어 맡기는 은총을 간구하게 된다.

이와같은 일과 생활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한국에서 그와같은 공동체를 시작하기 위해 우선 원탁토론을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원탁토론을 통해 우리는 국내의 가난과 궁핍,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필요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를 깊이있고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응답을 시작해야 하지만, 공동체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실패처럼 보이는 것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희생과 고통은 그리스도인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일꾼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으신 분은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잣대는 사랑>, 바오로 출판사에서 낸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선택>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글은 미국사람의 미국현실에 대한 체험이기 때문에 몇가지 개념이 우리들에게 낯설게 보일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환대의 집(House of Hospitality), 애덕의 실천(Works of Mercy), 인격주의(Personalism) 등입니다.

환대의 집은 아마도 마태복음 25장의 내용을 그대로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주님과 가난한 이들을 일치시켜 이런 명칭을 택한 것 같고, 애덕실천은 단순히 자비의 행동이라기 보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가난의 뿌리깊은 원인을 고려하는, 새로운 사회질서와 정의실현의 의미를 담고 있는 사랑의 행위라고 여겨집니다.

또 인격주의라는 개념이 가장 낯선 것으로 느껴지는데, 공생(共生) 공동체적 삶을 강하게 지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삶의 실현에 있어 어떤 제도나 집단의 힘보다 모든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유와 인간적 존엄성의 힘으로 개인 하나하나가 자율성과 책임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는 철학인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Individualism)와는 철저히 구분되어야 할 개념이며, 이 인격주의는 근본적으로 타인지향, 이웃, 사회, 세상지향을 표방하기 때문에 공동선에 위배되는 모든 개인의 행위와 부당한 제도, 정책에 대한 항의, 거부 및 대안의 제시와 실천을 필연적으로 수반합니다.

인식과 행동에 있어 철저한 동기와 이유,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 같은 가톨릭일꾼운동을 대략 살펴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인식과 행동, 특히 가난한 이들과 사회문제에 관한 우리들의 자리는 어디쯤 와있을까 반성해 봅니다. 도움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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