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돈나하우스의 캐서린 도허티 "하느님 모시면 매 순간이 다시 시작하는 순간"
상태바
마돈나하우스의 캐서린 도허티 "하느님 모시면 매 순간이 다시 시작하는 순간"
  • 방진선
  • 승인 2019.12.16 19: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캐서린 드 휴엑 도허티 선종 34주년

경애하는 하느님의 종 캐서린 드 휴엑 도허티 자매님 (Catherine de Hueck Doherty 1896년-1985년 12월 14일) 선종 34주년!

● 사회정의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 <우정의 집> • <마돈나의 집>(1947년)의 창립자 !

1930년-80년대 동시대를 살던 북미대륙의 두 여인 캐서린 드 휴엑 도허티(캐나다)와 도로시 데이(미국)을 통해 펼쳐진 성령의 역사!

● 대공황이 빚어낸 빈민을 섬긴 철두철미한 가톨릭 그리스도인, 교회에 바친 기도의 여인, 오늘까지 이어지는 사도직 운동의 창립자!

● 평신도 사도직의 역사적인 해 1933년, 두분의 만남과 친교!

☞ 도로시 데이 자매와 피터 모린 형제는 5월 <가톨릭일꾼> 신문 창간!

☞ 캐서린 도허티 자매는 교종 사회 회칙 공부 및 실천을 위한 평신도 단체를 열고 <가톨릭일꾼> 신문 창간 소식을 읽자마자 구독 편지를 보내고 주일미사 후엔 거리에서 신문 배포!

● 이어지는 감동적인 만남의 역사 !

☞ 도허티 자매의 편지: 1933년 12월 12일

데이 자매님 !

토론토의 스트로에 신부님께서 자매님의 <가톨릭일꾼> 신문을 보내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러시아사람인 탓인지 외국계 캐나다인들 사이에서 편히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매님의 신문만큼 동료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없습니다. 내용이 아주 훌륭하여 구독을 간절히 바랍니다. 이를 통해 동료들도 노동자에게 대한 교회의 관심을 깨닫습니다.

자매님께서 하시는 훌륭한 일에 감사드리며
캐서린 드 휴엑 도허티 (주1)

☞ 데이 자매의 답장 : 1933년 12월 19일

자매님의 편지를 읽고 매우 기뻤습니다. 저희 신문은 알려주신 주소지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이미 [토론토의 맥닐] 대주교님께서 구독신청과 함께 다정한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동료들과 신문을 더 많이 나눌 수 있다면 추가로 12부를 기꺼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자매님의 기도 중에 저희를 기억해 주심을 믿으면서 특별히 저희 "환대의 집"을 위한 기도를 당부드립니다.

마음을 담아
도로시 데이 (주2)

도허티와 도로시 데이

● 1934년 뉴욕 가톨릭액션 여름학교에서 강연한 도로시 데이 자매와 피터 모린 형제를 만난 감동!

☞ 오, 예수님, 전 오늘 행복합니다. 도로시 데이 자매를 만나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자매를 축복하시고 지켜주소서. 아울러 주님의 사제직을 축복하소서. (1934년 8월10일 일기)-(주3)

☞ 도로시 데이 자매가 12시 30분에 오셨다. 반갑게 재회했다. 자매의 정신은 정말 훌륭하시다. (1935년2월12일 일기)-(주4)

● 1930-40년대의 많은 만남과 서신 교류로 깊어간 두 분의 진지한 친교를 목격한 증언!

☞ 몇 주 지나 도허티 자매가 우리를 방문했다. 두 사람은 부엌의 후미진 원탁 주위에 앉아 하고있는 일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도허티 자매는 도로시 자매에게 토론토에서 생긴 자신을 향한 반대에 대해 말했다. ‘제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왔지요. 제가 얼마 동안이나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도로시 자매는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겪은 수 많은 중상모략적인 공격을 들려주며 도허티 자매를 위로했다.” (Stanley Vishnewski<The Wings of the Dawn>)-(주5)

● 사도직 활동의 역경을 서로의 위로로 극복하고 경험을 나누며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더 높은 이상으로 서로를 추동하는 그리스도인의 깊은 우정 !

☞ 초창기에 많은 사람들은 우정의 집과 가톨릭 일꾼을 사도직의 자매 운동(Sister movements)으로 여겼다. 캐서린과 도로시는 매주 한 번 미드 타운 지역의 어린이 자선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하며 각자의 사도직 활동에서 생긴 다양한 문제들을 논의했다.”(Stanley Vishnewski)-(주6)

영성의 핵심-캐더린 도허티 자매가 예수님께 받은 말씀 : 작은 소명(Little Mandate)

일어나 가라!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어라.
내(가난한 이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 나와 함께 하라.
작아져라. 늘 작은 자가 되어라.
단순하고 가난하게, 어린이와 같이 되어라.
삶으로 복음을 전하라.
타협하지 말라!
성령에 귀 기울이면 성령이 너를 인도하리라.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은 일들에도 정성을 쏟으라.
사랑하고 … 사랑하고 … 또 사랑하되 그 사랑에 대가를 바라지 말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나와 함께 머물라.
기도하며 단식하라. 끊임없이 기도하며 단식을 지켜라.
드러내지 말라.
항상 깨어 있어 이웃의 발길을 비추는 등불이 되라.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
내 항상 함께 하리라.
항상 기도하라.
내 너희의 안식처가 되리라.(주7)

마음에 머무는 말씀

☞ 주님 ! 제게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주시되 어른으로 그 마음을 살아갈 수 있는 멋진 용기를 주소서. (Lord, give me the heart of a child, and the awesome courage to live it out as an adult.)

☞ 하느님을 모시면 매 순간이 다시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With God, every moment is the moment of beginning again.)

☞ 믿음은 인생살이의 어둠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 사이를 소박하고 어린아이처럼 걷는 것입니다. (Faith walks simply, childlike, between the darkness of human life and the hope of what is to come.)

하느님의 종 캐더린 도허티 자매님!
친애하는 도로시 데이 자매와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영복을 누리시며 이 풍요의 시대에 변방으로 내몰리는 가난한 이들의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솔선하도록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

 

최상의 성탄준비
(The Best Preparation for Christmas)

-캐서린 도허티 by Catherine Doherty

이사야 예언서 제40장에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 예언들은 영원하기에 예루살렘의 당시만이 아니라 지금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Chapter 40 of the Book of the Prophet Isaiah contains some of the most beautiful passages in Scripture. These prophecies are not just meant for the time of Jerusalem. They are eternal; they are meant for now.

자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 우리의 진면목을 살펴봅시다. 그래서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가 훌륭하고,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깨달읍시다.
So please, once more, let us risk looking in the mirror and seeing who we really are. And in so doing, let us realize that we are wonderful in the sight of God, that he loves us so much he has sent his own Son to redeem us.

대림절은 매년 그분이 오심을 이렇게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참 가치를 이해해야 할 때입니다.
Advent is the season in which we remember this anniversary of his coming. It is a time for us to understand what we are truly worth.

먼저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의 위로를 말합니다; 모든 죄의 용서도 설명합니다. 다른 구절에서는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First, Isaiah tells us to be consoled; he also explains to us that all our sins are forgiven. And then comes another verse, saying, Prepare in the wilderness a way for the Lord.

우리 마음과 생각이 때때로 갇혀있는 “광야”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혼돈과 장애물 투성이의 내면에서 이리 저리로, 사방으로 헤매보지만 갈 곳은 없어 보입니다.
We know that our hearts and minds are often a “wilderness” where we are trapped. We try to go here, there, and everywhere in this chaotic, uneven inwardness. And we seem to get nowhere.

모든 계곡을 메웁시다. 우리의 계곡은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가 숨어있는 마음과 영혼의 어둡고 낯선 곳은 얼마나 있습니까? 이 모든 게 마땅히 알아야 하는 '주님의 법'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Let every valley be filled in. How many valleys have we got? How many dark and strange places in our minds and souls, places in which we hide? All because we don’t want to face what we know we should : the Law of the Lord.

모든 산과 언덕을 낮춥시다. 우리의 산은 주님의 산이 아니라 다른 것들 즉 온갖 쾌락과 욕망의 산들입니다. 그 산들을 낮춰야 합니다.
Let every mountain and hill be laid low. We have mountains. Not the mountain of the Lord but others—mountains of all kinds of pleasures, all kinds of desires. They have to be laid low.

모든 절벽, 산등성이와 계곡이 평야가 되게 합시다. 성지에서라면, 그 땅의 물리적 지형 즉 낯선 언덕, 산, 산등성이들을 볼 겁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서 예언자는 이런 지리적 형태가 아니라 상징으로 우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Let every cliff become a plain, and the ridges, a valley. Now, if we were in the Holy Land, we’d see the physical topography—the strange hills, mountains, ridges and so forth—of that land. But in this passage, the prophet is not describing these geographical formations; in symbols, he is describing us. Yes, us!

우리가 마주해야 할 내면의 지평에 실제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그 의미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사과하고 고백하며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회개는 그보다 훨씬 돌아서는 것입니다.
We have a real situation in our inner landscape that we have to face. We have to repent, that’s what it really means. Repentance isn’t simply apologizing, then going to confession and being forgiven. Oh no! Repentance is much more than that. Repentance is a turning around.

회개는 진행형의 일입니다.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음을 이해하고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It is an ongoing affair. To understand that which we know we must do, and then to really do it. That is repentance.

달리 말하면 회개는 우리 삶에서 복음을 육화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죄를 지었음을 인정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길을 걸었음을 인정합니다.
To put it another way: repentance is the incarnation of the Gospel in our life. Yes, we acknowledge that we have sinned before the Lord. Yes, we acknowledge that we have trodden the wrong path.

이제 우리는 그 모든 것에서 등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안 지나서 다른 사제나 같은 사제에게 같은 죄를 반복하여 고백하고 또 다시 사죄를 청할 것입니다.
Now we must turn our back to all of that, and move in the opposite direction. Otherwise, in a little while we will be telling the same sins all over again—to another priest, or to the same priest—asking to be forgiven again.

회개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로 회개는 불도저가 되어 우리 마음과 정신에서 산등성이는 고르게 하고 산들은 평지로 만들며 골짜기와 웅덩이는 채워서 마음의 광야를 지나 주님의 길을 만드는 것 있니다.
Repentance means change. In a sense, it becomes a bulldozer that we apply to our minds and souls to level the ridges, flatten down the mountains, fill in the potholes and ravines, so as to make a path for the Lord to cross the desert of our heart.

주님께 이 불도저를 청하는 기도를 바쳐 낙석과 부스러기를 치워버려야 합니다.
We need to pray to the Lord for this bulldozer so that the rockfall and debris can be pushed away.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소용돌이치는 먼지같은 투덜거림, 늘 쓰는 대명사 '나', 우리는 항상 옳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는 끊임없는 생각, 형제 자매나 배우자와 자녀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것 등 이 모든 행동을 중단해야 합니다.
God will do this for us, provided we stop the swirling dust of our own mutterings, the constant use of the pronoun ‘I’, our continual thinking that we are always right and someone else is wrong, our non-listening to our own brothers and sisters or to our spouse and children.

그러면 방해받지 않으시고 하느님 친히 이 길을 걸으실 겁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셔 우리의 말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의 말을 들으시고,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를 통해 이해하시고, 우리를 통해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다른 이들을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Then God himself might walk these paths, unencumbered. He can come into our hearts and do the listening there. He can listen to others through us, talk through us, understand through us, help through us. He can console others through us.

우리 마음의 길이 곧아지면, 그분은 달려오실 것입니다! 복음 말씀 처럼 세상이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며 늘 봉사하길 바라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하느님께서 들으시는 귀가 있다는 것보다 더 좋은 봉사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If the paths of our hearts were made straight, he would come running! He wants to be with us until the end of time, as he said in the Gospel, and he still desires to serve. And what better service could there be than to have the listening ear of God within our hearts?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기도 드리며 다른 사람들의 굶주림에 귀를 기울일 시간입니다. 보통 그이들은 우리가 일을 많이 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듣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너무나 부족한 사랑과 우정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It is time for us to pray, dearly beloved, so that we may be able to listen to the hunger of others. Usually, other people don’t want us to do too much for them. They simply want us to listen because listening means love and friendship, for which there is such a great hunger today.

그렇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잘못으로부터 돌아서서 복음을 육화하는 올바른 일을 시작하는 겁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교는 이처럼 복음을 살고있는 지에 달려 있습니다.
Yes, to repent is to change. It is not just to acknowledge that we have done wrong. It is to turn our back to the wrong, and start doing the right—incarnating the Gospel. Christianity in the world today hinges on this living the Gospel.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담긴 가치를 신뢰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가르침을 육화(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The world today doesn’t believe that Christ’s teachings are of any value, because the majority of Christians do not incarnate them.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육화시켰고 그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게 바라는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육화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까?
Take, for example, Reverend Martin Luther King. He “had a dream.” He incarnated that dream, and he was killed because of it. He did the very thing that people expect a Christian to do: he incarnated his beliefs. Do we?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이사야40,3-5)
Make straight the path of the Lord, a highway for our God across the desert. Let every valley be filled in, every mountain and hill be laid low. Let every cliff become a plain and the ridges a valley. Then the glory of our Lord shall be revealed (Is 40:3-5).

이 영광은 우리 각자에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그저 성격 갈등, 서로 간의 판단, 불신, 분노, 적대감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This glory can be revealed in each one of us. How? It’s very simple, in a sense. All we need do is just to stop our personality clashes, our judgmentalism toward one another, our mistrust of one another, our anger against one another, our hostility against one another.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기 시작하면 됩니다. 그러면 고대 로마의 이교도들처럼 오늘날의 다른 종교인들도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봅시다! 정말 저이들에겐 엄청난 게 있네요. 저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All we need do is to begin to love one another as Christ loved us. Then like the pagans of ancient Rome, the pagans of today will say: “Well now, look at those Christians, will you? They’ve really got something. See how they love one another!”

마르코 복음의 첫 장에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주님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In the first chapter of St. Mark’s Gospel, we read about St. John the Baptist preparing the way for the Lord.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새로 오실 때마다 먼저 영과 삶에서 도로건설자였던 사람들의 작업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길을 준비하는 이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지렛대 역할을 하시고, 우리 삶 안에, 우리의 모든 삶 안에 거처를 두실 때마다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겁니다.
Every fresh coming of Christ into the world has followed the work of those who, in the spirit and in their lives, have been road-makers. Christ needs preparers of his way. We prepare the way of Christ whenever we give him leverage in our life, a place in our life, in all of our life.

도로건설에는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어서 죽어가는 이 세상에 말씀을 전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길을 곧게 만들게 됩니다.
A receptive mind is an indispensable road-making tool. We make Christ’s path straight whenever we bring his word to a world that is dying for lack of it.

주님보다 앞서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길을 막아서는 것들 즉 탐욕, 교만, 증오, 인격 충돌, 우리 안의 분열 등을 없앨 때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는 겁니다. 회개만이 오늘날 이 세상을 재앙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We go before his face and we make ready for him whenever we help to remove the things which block his entrance into our world: greed, pride, hatred, personality clashes, divisions among us. Nothing less than repentance can lead the world out of disaster today.

사람들은 권력, 명성, 이익에 혈안이 되어 벌이는 치명적인 쟁탈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People must be set in a new direction, turning away from their fatal scramble for power, prestige, advantage.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의 마음 맨 앞에는 심판이 도래한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그것을 감지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In the forefront of John’s call for repentance was his sense of the coming judgment. In our days, too, we can sense and feel it. Repent!

회개는 참회 이상의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이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바보짓을 했다"고 하는 자책이 아닙니다. 누구나 그런 비루한 장광설을 털어 놓지 않았습니까?
Repentance is more than penitence. It is not remorse. It is not admitting mistakes. It is not saying in condemnation, “I’ve been a fool.” Who of us has not recited such a dismal litany?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누구나 쉽게 말합니다. 회개는 그 이상입니다. 자기 죄를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혁명입니다.
All of us have. They are common and easy to recite. Repentance is more. It is even more than being sorry for one’s sins. It is a moral and spiritual revolution.

회개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모든 영적 진보에는 기본입니다. 회개는 교만에 찬 우리의 자기 확신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사소한 성공으로 지은 명성의 외투를 벗어 버리며, 자기 의지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 있는 성채를 허물어 버리라고 촉구합니다.
To repent is one of the hardest things in the world; yet it is basic to all spiritual progress. It calls for a complete breakdown of our prideful self-assurance, a stripping away of the cloak of prestige that is woven from our petty successes, a breaching of the innermost citadel of our self-will.
( 2000, pp.17-21, available from MH Publications www.madonnahouse.org.)

방진선 토마스 모어
남양주 수동성당 신자
Senex et Operarius Studens 窮究하는 늙은 일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