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는 사랑이 내 안에서 폭력을 만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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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는 사랑이 내 안에서 폭력을 만나게 하라
  • 쟝 고스‧힐데가르트 마이어 부부
  • 승인 2019.12.13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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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을 살아가며- 쟝 고스‧힐데가르트 마이어 부부와의 대화-2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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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쟝 : 자,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처음에 내가 사랑에 대해서, 사랑의 힘에 대해 말하면 모두가 동의합니다. 문제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들 사랑에 대해서 알고 있지요. 소설과 설교따위에 사랑이 언급되지 않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모두가 푸줏간 백정을 계속 승인하고 있어요. 아니면 직접 백정노릇을 해요. 그래서 내가 방법을 바꾸었어요. 청중들에게 진리를 믿어야 하고 진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사람들은 기분좋게 동의를 했어요. 이런 태도가 이해할만해요. 아무도 거짓말장이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지요.

그리고 나서 나는 무언가 다른 것을 찾았어요. 정의라는 말입니다. 난 정의의 힘,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것에 대해 말했어요.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었어요. 정의가 다시 건설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주장했고 각자가 자신의 생활에서 불의 때문에 희생된 체험을 말했어요. 그러나 자신들이 저지른 불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발견했어요. 비폭력입니다. 나는 폭력에 ‘아니오’라고 했어요. 모두가 긴장했어요.

내가 청중들을 혼란시킨 것은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그러나 ‘아니오’라고 말하려면 반드시 머리를 들고 당신모습을 보여야 하지요. 그리고 노예가 아니라 사람이 되어야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요. 비폭력이라고 말함으로써 나는 운명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폭력의 운명, 악의 운명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악, 내 주변에 있는 악은 불가피한 것이 아닙니다.

폭력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때 난 자유인으로 행동하고 모든 인간적 차원을 내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초월적인 영역, 거룩한 차원까지 부여하는 것이지요.

♤ 제라르(대담자) : 관리들은 인간존엄성, 자유 그리고 심지어 거룩한 차원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분노를 야기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부드럽게 대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인데 당신은 폭력의 감정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 그저 말로만 ‘비폭력’이라고 하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왜 그렇습니까? ‘비폭력’이 단순히 한 단어가 되어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 쟝 : 어떤 사람이 오고 있어요. 그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참다운 가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그 어떤 이유도 사람을 죽이거나 거부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빚이 있다고, 어떤 죄를 지었거나 우리와 원수지간이라도 상관없이 서로에게 사랑을 갚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람들은 그를 이상주의자, 몽상가라고 말했나요? 아닙니다. 그는 매우 위험스런 개인이기 때문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방 한구석에서 보다 나은 세계를 꿈꾸었다고 사람들을 가두는 나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몽상가들은 위험스럽지 않아요. 대부분의 비폭력 옹호자들은 감옥에서, 수용소에서 시간을 보내지요. 그리고 거의 모든 위대한 비폭력운동가들이 예수님처럼 암살당했어요. 이건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이건 분명히 단어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적극성과 폭력을 혼동해요. 그리고 ‘비폭력’을 마치 어떤 ‘거세’와 혼동하지요. 비폭력의 사람을 연체동물처럼 아무것에도 맞서지 않고 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하게 내버려두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지요. 아닙니다! 전혀 그 내용이 아닙니다. 모든 비폭력의 사람들은 매우 적극적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공격합니다. 그들은 악과 불의에 대하여 철저하게 공격적입니다. 불의에 대항하여 일어서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어요. 겁장이와 함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폭력적인 사람은 비폭력의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고. 내가 당신 뺨을 치면, 그리고 당신이 정상이라면 당장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나를 그냥 가게 내버려두지 않지요.

♤ 제라르 : 뺨 때리는 문제에 대해 얘기를 더 합시다. 그건 아주 오랜 얘기이지요! 예수가 다른 뺨을 돌려대라고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됐지요. 또 실제로 예수가 뺨을 맞았을 때(재판 때) 그 자신도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았지요. 내가 기억하는 한.

♡ 쟝 : 맞아요. 예수는 때린 사람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어요. 고문자들을 공격했어요. ‘왜 나를 치느냐?’ 그가 오히려 나 같았으면 조용히 있었을 겁니다. 말하면 그다음 한 방이, 더 큰 한 방이 날아올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고문자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겠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두번째 반격이 없었어요. 강한 사람들만이 다른 뺨을 돌려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살을 막지요. 또 거기에서 그치지 않아요. 더 이상 그에게 욕지거리를 하지 않아요.

나는 2차대전 중에 독일에서 포로로 잡혀 있었어요. 그때 러시아 전선에서 돌아온 간수가 있었는데 그는 미쳐 날뛰는 짐승같았어요. 어느날 그는 포로들을 모아놓고 때리기 시작했어요. 그들 중의 하나가 그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자원합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때리고 싶으면 나를 때리시오.’ 고문자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어요. ‘몇대나 맞고 싶은가?’ ‘당신 양심에 맡기겠소.’ 포로가 말했어요. 이 ‘양심’이라는 말은 절대로 입밖에 내서는 안되는 말이었지요. ‘나는 짐승이야, 나는 도구일 뿐이야, 나는 양심이 아니야, 나에겐 양심이 없어. 나는 양심을 가질 권리가 없어.’ 그는 잠시동안 그 반대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매질은 끝나고 말았어요.

어떤 사람이 당신을 칠 때 당신은 즉시 반격을 합니까? 아니지요. 먼저 치는 사람의 체격을 보기 시작하고 무게를 재고 난 뒤에야 반격을 하지요. 첫번째 반응은 자연히 그 공격자를 없애버리려는 생각이겠지요. 이성이 문제가 안 돼요. 그냥 본능이지요. 판단할 수 있을 때엔 이미 당신은 인간적인 쪽으로 한 발자국 뗀 셈이지요.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 또 그와 상응하는 반응은 자유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비폭력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지요.

♤ 제라르 : 당신이 말씀하신 예는 개인적으로는 해당되지만 집단의 차원에서도 맞는 얘기일까요?

 

♡ 힐데가르트 : 1962년 우리가 처음으로 라틴아메리카에 살러 갔을 때 우리는 ‘반란적인’ 상황, 불의가 창궐하고 있는 현실을 보았어요. 그래서 농민들이 그들의 비참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선 죽이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그들은 더이상 잃을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우리에게 비폭력을 가르쳐준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효과적으로 죽이려면 무기가 필요하고 무기는 절대로 가난한 사람들 손에 들어오지 않아요. 항상 부자들 손아귀에 들어갑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요. 부자들은 절대로 공짜로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기는 더 말할 나위 없구요. 항상 돈으로 사야 하는 것이지요.

가난한 농부들은 부득이 비폭력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투쟁하면서 그들은 억압자들의 폭력을 야기시키고 싶지 않아요. 농부들이 폭력을 쓰면 상대방의 폭력이 언제든지 그들을 파괴시키려고 대비상태에 있지요. 그리고 항상 그 폭력은 엄청났어요.

폭력적이려면 먹을 것이 충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지요.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 가난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지만 그 반란은 일반적으로 평화적이지요. 무장혁명의 이론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체 게바라와 까밀로 또레스가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했던 것처럼, 부자와 지식인들의 특권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현실로부터 떨어져 있어요.

♡ 쟝 : 그렇다고 게바라와 또레스같은 사람들의 관대함이나 그들의 삶과 희생이 많은 사람들, 라틴아메리카와 전 세계 사람들의 양심에 미친 영향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체는 의사였고 또레스는 내가 개인적으로 알았던 사람인데 신부였습니다. 또레스 신부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정의를 지키고 사랑을 옹호하기 위하여 폭력을 선택했어요. 그는 죽임으로써 옹호하고자 했어요. 그런데 누구를 죽이지요? 불의를 만들어낸 사람들, 증오와 거짓말을 부추기는 사람들요? 실제로 그는 경찰과 군인들을 죽일 수 있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와 같은 사람들, 그처럼 일반적인 불의에 대해서나 책임이 약간 있는 사람을 말입니다.

1968년 체코사태를 기억하시지요? 손에 쥘 수 있는 무기를 갖고 러시아인들에게 대항했었지요? 누구를 죽일 수 있었습니까? 3등병 이반이나 디미트리스같은 사람입니다. 진짜 책임이 있던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있었지요.

우리는 비극적인 착각으로 살고 있어요. 첫번째 착각은 우리 마음속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을 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선 악을 죽이기 위해 그 사람을 죽이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거의 결론을 짓지요. 난 ‘거의’ 라고 얘기했습니다. 예외가 있기 때문이지요. 내 자신이 직접 개입되었을 때에는 그런 결론을 절대로 맺지 않아요. 두번째 착각도 비슷해요. 우린 항상 위대한 인간적 가치관들을 옹호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진리, 정의, 자유, 사랑등을 어떤 수단을 다해서라도, 심지어 살인까지도 불사하면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우리는 진실과 정의, 자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이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지요. 즉 인간은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도미니끄 샤바노라는 군인이 이렇게 말했지요. ‘인간애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파괴하는 길로 간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고문을 거부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모든 불의, 모든 전쟁, 모든 정치적 경제적 착취가 고문이라고 여깁니다. 인간에 대한 거부입니다.

♡ 힐데가르트 : 비폭력의 외침은 안전에 대한 우리들의 깊은 요구에서 오는 것입니다. 폭력적이 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자신이 침범되지 않는 것이지요. 심리학자들은 우리들의 일치가 위협받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 이상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폭력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원천, 오직 하나의 동력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건 사랑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유일한 안내자이지요. 더 이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을 가르치는 의무를 지닌 사람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계속하는 사람들, 예수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비폭력을 좋아하지 않아요. 비폭력의 그리스도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사람을 죽일 권리가 없다고 선언할 용기있는 교회가 없어요. 그들은 죽일 수 있는 예외가 있다고 인정할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예외는 실의 얼레같아서 실을 풀기 시작하면 타래 전체가 풀려 나오지요.

♤ 제라르 : 폭력은 우리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 같습니다. 불안정은 두려움을 야기시킵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폭력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갈려고 하지요. 내가 더 폭력적이 될수록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인간은 안전에의 권리가 있고, 가족도 한 국가도 마찬가지로 안전에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나 종교도 안전에의 권리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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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쟝 : 1981년 스톡홀름의 국제평화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전세계가 6만억달러를 소위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 국비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와르샤협정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는 전인류를 50배 이상 파괴시필 위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한번 파괴시키는 것으론 충분치 않다는 것 같습니다. 이밖에도 세균, 화학무기등은 앞서 말한 무기보다 백 배 이상의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전을 느끼기 위하여 인류를 얼마나 여러번 파괴시켜야 할까요?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누구의 안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목숨부지에 필요한 한 방울의 우유도 없는 사람들, 잠잘 한뼘의 자리도 없는 사람들, 치료를 받을 수 없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만봐야 하는 사람들의 안전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안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사는 사람들, 자족하는 사람들, 교육받은 사람들의 안전을 떠들고 있지요. 이 지구상에는 모든 사람 하나 하나에게 1 Kg의 쌀이나 빵을 충분히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유한 국가들은 각자가 자신만을 위하여 2만 Kg의 빵을 비축해두고 있어요. 2천년이 되면 세계가 보유한 풀루토니움 양이 백만 개의 핵폭탄을 생산해 낼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미친 것일까요?

역사적으로 평화주의적인 교회들, 예를 들면 메노나이트 교회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개의 주요 그리스도교파들, 가톨릭, 동방정교 그리고 개신교들은 모든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절대적 존중을 주장하지만, 항상 자신들을 위해서만 자유, 정의 그리고 존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종교는,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모두는 불안전속에 살기를 원하지 않아요. 불안전에 대한 성서적 용어는 ‘가난’입니다.

가난은 비폭력의 삶에 필요한 첫번째 조건입니다. 즉 복음적 가난, 산상수훈의 첫번째 조건이지요. 이 가난이 나머지 조건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가난한 이들은 우연히 비폭력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복음도 또한 라틴아메리카에서처럼 ‘가난해지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어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이 점에 동의하고 있어요. 문제는 하느님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인데 가난한 사람들만이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상의 손에 안전을 맡기고 있어요. 사랑의 손에 맡기는 대신, 주님의 손에 맡기는 대신 은행과 폭탄에 맡기고 있습니다. ‘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이 사람들은 휘청거려 쓰러지겠지만 우리는 꿋꿋이 선채 넘어지지 않사옵니다.’(시편 20,7~8)

♤ 제라르 : 나는 비폭력에 의하여 정말로 적극성이 분출되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폭력에 자신들을 내어맡겨보지 않으면 그들 자신이 지닌 폭력의 무정하고 적나라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폭력을 모른척해 왔고, 인간사회는 이 무관심에 의존하며 유지될 수 있습니다.

 

♡ 힐데가르드 : 폭력에 관한 한 우리 모두는 약간씩 맹목적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어떤 두려움을 갖고 있어서 폭력을 대면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우리가 폭력을 고발할 때에는 바로 사회조직을 공격하는 것이 됩니다. 요한 사도가 말하듯이 복음서에 나오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여겨집니다.

여인은 간음 중에 잡혀왔습니다. 물론 혼자 잡혀왔고 남자들은 그 자리에 오직 그 여인을 고발하기 위해서만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 점에 매우 분명합니다. 간음의 죄는 우상숭배와 똑같은 것으로 취급됩니다. 그 여인은 돌로 쳐죽여야 했습니다. 여인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지요. 예수님은 어떻게 할까요? 그분은 소위 거룩한 구조들과 대면해 있습니다. 하느님의 법, 모세 율법 그리고 이런 법들은 죽음, 절대적 폭력인 죽음을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올바른 편에 있고, 법과 도덕도 그들 편에 있어요. 예수님은 어떻게 할까요?

그분은 잠시동안 침묵하다가 구부리고 앉았습니다. 누가 주변에 서 있습니까? 바리사이들과 그 여인이지요.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그 여인을 바라보도록 권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그 여인을 보도록 말입니다. 한 여인을, 단순히 ‘법률의 사건’이 아니라 한 여인을 보도록 청합니다. 그리고 나서 일어나 말합니다. ‘당신 중에 아무도 죄없는 사람이 이 여인을 돌로 치시오.’

돌로 친다는 것은 돌격이나 폭격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이고 있으나 아무도 살인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익명성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이 순수하면 당신의 돌을 던져라. ‘가장 순수하신 분’의 이름으로 당신이 죽일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죄 없는 분’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일 권리가 있다면 돌을 던지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그들자신의 폭력앞에 맞대면하고 있어요. 그때까지 그들은 자신의 폭력과 죄악을 여인에게 전가시킴으로서 내던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율법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런 것이 오늘날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모래에 무엇인가 씁니다. 무엇일까요? 물론 진리입니다. 아마도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죄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제일 나이들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들은 아마 도망쳐 나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그분은 진리를 갖고 그들의 양심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그 싯점에서 중지하지 않아요. 그분은 자신이 공격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증명합니다.

사랑없는 진리, 사랑없는 정의는 살인적인 무기입니다. 예수님은 각자가 자신의 진실, 자신의 폭력과 대면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아요’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도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바리사이들을 그들 자신의 폭력으로부터, 그 여인을 자신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어요. 그분은 끝까지 올바르게 처신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그 여인을 정화시키지 않았어요. ‘가시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유다에게도 예수님은 똑같은 태도를 취하셨어요. 그분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배반한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을 표현하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내 벗이여.’

비폭력의 표현이 느슨해진 상태인 폭력은 비폭력의 메시지 안에 담긴 해방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폭력을 맞대면할 용기가 없고 두려워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비폭력운동들은 이러한 해방의 사랑, 사랑을 통한 해방을 포기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전적인 사랑을 통하여 개인의 변혁을 추구함으로서 해방의 사업을 시작하십니다. 우리 각자는 이 해방의 작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 구조에 관한 변혁작업도 해야하지요.

우리 각자는 자신의 폭력과 주변 사람들이 지닌 폭력간에 견딜만한 균형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와서 비폭력에 대해 얘기한다면 이 균형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시 위험스러워지고, 폭발적이며 마침내는 종말론적이 됩니다. 비폭력은 모든 사람에게 위협이 됩니다. 비폭력은 동서진영 아무데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무신론자들에게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폭력은 가짜 안전을 깨뜨리고,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폭력, 배신 그리고 불의를 다스리는 비밀의 체제를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중대한 힘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 쟝 :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이 구절은 복수로 균형을 창조해내는 방식이지요. 이것이 바로 발전입니다. 당신은 이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다른 친구를 죽일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빨을 부러뜨리면, 당신은 그 친구의 이빨 하나를 부러뜨립니다. 그러면 비긴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폭력의 착각입니다. 항상 균형이 잡혀야 하지요. 우리들의 문명세계에서 ‘눈에는 눈으로’ 라는 생각은 약간 수정되었지요. 개인대신 국가가 살인을 다룹니다. 국가는 개인이 죽이는 것을 금지하고 자신이 살인할 권리를 갖게 됩니다.

착각은 균형에 대한 집착에 있습니다. 폭력은 중지되지 않아요. 더 커질 뿐입니다. 악순환으로 계속 상승되어 나타납니다. 폭력은 절대로 자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습니다.

‘당신의 정의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정의보다 옳지 못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든 사람은 정의를 실천했거나 정의로부터 고통을 받은 체험들이 있어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

이것이 예수님의 정의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나쁜 짓을 할 때 바로 그 이웃들이 나쁜 짓을 가장 잘 압니다. 나쁜 짓을 하는 우리들은 잘 모르지요. 불의는 불의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만 더 절실하게 불의로 느껴집니다.

사랑은 예배 이전에 옵니다. 복음이 말하는 정의는 애덕의 필수적인 기반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과 정의에 반대하여, 이웃에 반대하여 침묵과 타협속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로 무엇이 자라나는지 놀라지 마십시오. 폭력입니다. 그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공적인 것일 때에 그 죄는 공적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학증이 아니라 공적인 건강법입니다. 어디에선가 조금씩 진리를 절단하기 시작하면 큰 범죄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비폭력의 사람들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어요. 이 선택을 복음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폭력의 사람들은 이런 선택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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