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머튼 "한때 잔인했던 것이 자비로운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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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 "한때 잔인했던 것이 자비로운 것이 되었다"
  • 방진선
  • 승인 2019.12.1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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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 선종 51주년

경애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승 토머스 머튼 신부님 (Thomas Merton 1915년 1월 31일 - 1968년 12월 10일) 선종 51주년 !

트라피스트 수도승(Trappist Monk), 신비가(Mystic), 신학자, 비교종교학자, 시인, 작가, 시대의 영적 스승, 사회•평화운동가의 불꽃같은 53년의 종생(終生) 그리고 홀연한 선종!

생시라면 사제 수품 70년(1949년 5월 26일)의 해!

신부님 탄생 100주년의 해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고
(2015년 9월 미 의회 연설)

☞ 미국의 위인 네 분, 링컨 대통령, 킹 목사님, 도로시 데이 자매님, 그리고 토머스 머튼 신부님. 제게 성인이 된다는 것은 제 자신이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Abraham Lincoln, Martin Luther King Jr., Dorothy Day, and Thomas Merton. For me to be a saint means to be myself.")

머튼 신부님의 기쁨인 사람 

☞ 인류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운명이다. …나는 내가 인간인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몸소 성육신 하신 인류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토머스 머튼의 단상 : 통회하는 한 방관자의 생각, Conjectures of a Guilty Bystander>1966년)

☞ 머튼 신부님의 영적 스승 성 프란치스코!

☞ 저는 늘 조금은 비밀스런 방식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들이라고 느낍니다. 성 프란치스코 성인은 제가 교회 안에서 가장 경애하는 분입니다.

I will always feel that I am still in some secret way a son of St. Francis. There is no saint in the Church whom I admire more than St. Francis.” ('Thomas Merton's 1966 letter to reporter Anthony Bannon')

늘 그러하듯이 증오와 폭력의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스승 

☞ 테러와 폭력의 위협, 때때로는 종교와 관련된 위협이 극적으로 형성한 시대에, 머튼이 대화와 상호이해의 진정한 탐구로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는 다원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또한, 급변하는 디지털 세계에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궁구하는 시대에, 머튼이 하느님을 찾는 데서 “얼나•참된 자아”를 찾을 수 있는 관상•묵상으로 우리를 부른 것은 아주 의미심장하며 대안문화적인 초대입니다."

"… in an age shaped so dramatically by threats of terror and violence, oftentimes associated with religion, Merton’s lived example of dialogue and genuine quest to understand others offers us a model for living in a pluralistic world. Additionally, at a time in which we are constantly seeking to understand who we are in a rapid-paced digital world, Merton’s call to contemplation so as to discover our “True Selves” in discovering God is a very important and counter-cultural invitation."
(Daniel Horan 신부 인터뷰 < The Franciscan Heart of Thomas Merton: A New Look at the Spiritual Inspiration of His Life, Thought, and Writing>의 저자 ZENIT.2015.9.24)

늘 그러하듯이 변함없는 이 세상의 지옥도(the picture of Hell)

☞ 한창 큰 전쟁을 치르던 1915년 정월 그믐날, 물병자리 별빛 아래 스페인과 접경한 프랑스의 산맥 어느 기슭에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본성은 자유로웠지만 또한 이 세상의 모습을 따라 횡포와 이기심의 노예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나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인간들,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태어났으면서도 공포와 절망적인 자기 모순 속에 허덕이며 사는 인간들로 가득 차 있다.

Free by nature, in the image of God, I was nevertheless the prisoner of my own violence and selfishness, in the image of the world into which I was born. That world was the picture of Hell, full of men like myself, loving God and yet hating Him; born to love Him, living instead in fear and hopeless self-contradictory hungers.(<칠층산Seven Story Mountains>1948년. 정진석 역 )

늘 그러하듯이 변함없는 그리스도인의 성속(聖俗)모순 

☞ [파스테르나크]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경제구조란 과거의 유산이며,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란 그것의 거짓됨(falsity)이 철저하고도 불가피하게 드러난 것일뿐이라고 한다. 20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 우리는 복음의 10분의 1도 채 이해 못하면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자청해 왔다.

로마황제를 하느님으로, 하느님을 로마황제(Caesar for God and God for Caesar)로 섬겨왔다. '자선의 마음은 점점 식어가고(charity is growing cold)' 우리는 묵시시대(an apocalyptic era)의 흐릿한 여명을 맞이하고 있기에, 파스테르나크는 우리에게 진리의 원천은 유일하거늘 그 원천이 거기있음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가 했던 것처럼 우리도 진리의 원천에 가서 마셔야 한다. 그리 할 용기나 있는가? 파스테르나크의 말과 행동과 경험을 찬찬히 뜯어보면, 폭넓은 시야로 복음을 읽는 일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너무나 명백하게 알게 될 터인데! (토마스 머튼, <파스테르나크 사건에 대한 전망>도로시 데이의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By Little and By Little)>, 442-3쪽 전재)

늘 그러하듯이 변함없는 신부님과 함께 하느님의 음성에 다시 마음의 귀를 기울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이 낙원에서 들린다. (The Voice of God is heard in Paradise.) 한때 하찮았던 것이 지금 소중한 것이 되었다. (What was vile has become precious.) 지금 소중한 것은 하찮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하찮은 것을 늘 소중한 것으로 여겼다. 나는 무엇이 하찮은 것인지 모른다.

한때 잔인했던 것이 자비로운 것이 되었다.(What was cruel has become merciful). 지금 자비로운 것은 잔인했던 적이 없다. 나는 나의 자비와 나도 모르는 잔인함으로 요나를 어둡게 했다. 내 자녀 요나여, 나를 본 적이 있는가? 자비, 깊고 깊은 자비. 나는 우주를 끝없이 용서해 왔다. 나는 죄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때 가난했던 것이 무한한 것이 되었다.(What was poor has become infinite). 무한한 것은 가난했던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가난을 무한한 것으로 여겼다. 나는 부(富)를 좋아하지 않는다. 감옥 속 깊이 있는 감옥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현혹되지 마라. 세상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타락하고, 분(分)이 더 작게 쪼개져 남몰래 도망간다. 내 아들 요나여, 강물이 너를 멀리 쓸어가지 않도록 시간에 매달리지 마라.

가장 나약한 것을 나는 사랑했다. (I loved what was most frail). 한때 나약했던 것이 힘 있는 것이 되었다. 가장 나약한 것을 나는 사랑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나는 올려다보았다. 실체가 없는 것을 만졌다. 없는 것 안에 내가 존재한다."
(<토마스 머튼의 영적일기 The Sign of Jonas> 1952년 7월 4일의 마지막 일기,546-7쪽)

제 마음을 늘 추동하는 <칠층산>의 마지막 경구 

“책은 끝났으되 탐구는 끝나지 않았노라" (Sit finis libri non finis quaerendi)

토마스 머튼 신부님의 청원 기도 

저희가 그리스도인으로 주님의 복음을 제대로 깨닫아 일상으로 살며 하느님의 평화가 이 땅, 한반도에서 이루어 지도록 주님께 빌어주십시오 !

☞ 저의 주 하느님 !
저는 제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제 앞에 놓여있는 길을 보지 못합니다.
그 길이 어디서 끝날지도 확실히 모릅니다.
제 자신조차 정말 모릅니다.
제가 주님 뜻을 따른다고 마음먹은 사실이 그 뜻을 실제로 실행하고 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하오나 주님을 기쁘게 바램이 주님을 실로 기쁘게 함을 저는 믿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그 바램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 바램을 떠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혀 알지 못할지라도 제가 이 일을 한다면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심을 압니다.
제가 길을 잃고 죽음의 그늘에서 헤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저는 늘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저와 함께 계시고, 홀로 제 위험에 맞서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임을 믿기에 저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My Lord God, I have no idea where I am going. I do not see the road ahead of me. I cannot know for certain where it will end. Nor do I really know myself, and the fact that I think I am following your will does not mean that I am actually doing so. But I believe that the desire to please you does in fact please you. And I hope I have that desire in all that I am doing. I hope that I will never do anything apart from that desire. And I know that if I do this you will lead me by the right road, though I may know nothing about it. Therefore will I trust you always though I may seem to be lost and in the shadow of death.
I will not fear, for you are ever with me, and you will never leave me to face my perils alone. (토마스 머튼)

성 프란시스코, 거룩한 사부여, 저를 위해 빌으소서.

성인께서는 주님께 다다르려 드리는 제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시니,
제가 가난한 이들과 최대한 나눌 수 있도록 기도해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굶는 만큼 다른 이들이 먹게 하시고, 그리하여 제가 고통당하는 만큼 다른 이들이 고통당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조롱을 당할 때라도 웃고 노래하게 하시며,
제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미친놈, 바보, 재수 없는 놈이라 욕을 먹을 때라도 춤추며 즐기게 하소서. 아멘.”(토마스 머튼)

 

방진선 토마스 모어
남양주 수동성당 신자
Senex et Operarius Studens 窮究하는 늙은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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