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아베와 예술인 - 우리는 기억하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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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아베와 예술인 - 우리는 기억하고 표현한다!
  • 김유철
  • 승인 2019.11.23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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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의 Heaven's Door

2019 기해왜란

일본은 2019년 7월 4일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시행에 이어 8월 2일 이른바 백색국가 명단(White List)에서 전략물자 관리 미흡 등의 괴변을 늘어놓으며 한국을 제외시켰다. 그러나 일본 아베 정부의 조치는 과거사 문제를 이유로 경제보복을 선언한 것으로서 일제강점기에 쌓인 민족적 감정을 딛고 평화선린으로 가기 위해 어렵게 쌓아온 협력과 신뢰를 송두리째 저버리는 행위이며 속마음이 드러난 사실상의 경제전쟁 선전포고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삼척동자도 아는 바처럼 아베 정부의 옹졸하고도 치졸한 결정과 시행은 2018년 한국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한국인에 대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미쓰비시를 비롯한 전범기업들이 배상하라는 판결과 박근혜 정부가 벌인 위안부 피해에 대한 부당한 합의를 바로 세우려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공격이다. 동시에 남북의 평화적 화해모드라는 민족적 앞길을 방해하려는 ‘2019년 기해왜란’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일과 앞으로 펼쳐질 숱한 ‘왜란’ 앞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예술의 힘

올해는 1919년 기미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민족을 덮친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은 민족의 말과 민족정신을 송두리째 뽑으려는 흉계를 앞세우고 36년에 걸쳐 한반도의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그 와중에도 선각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의 저항은 친일화된 이른바 엘리트들의 현실 안주와 요지부동의 자세를 질타했음은 물론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서린 독립 운동가들의 높은 기개와 잠재울 수 없는 한은 우리를 거듭해서 일깨우고 있다.

민족정신을 일깨운 독립운동에 힘을 얻어 당시 예술계는 같은 해 10월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를 김도산 감독이 만들었다. 하여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7년 후 1926년 나운규가 각본·감독을 맡은 35㎜ 무성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민족적 저항의식이 들어있어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이 목 놓아 울고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 어려운 시기에 민족에게 ‘아리랑’이란 단어가 주는 울림과 영향력은 어떤 독립운동보다도 더 큰 민족정신의 회복으로 생각된다. 그것이 예술의 힘이다.

“기억하라!”

해방이후 극 영화가 상업성을 위해 달음질치고, 군사독재시절 언론은 정권의 나팔수이거나 철저히 입막음을 당하고 있을 때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는 주류 언론과 상업영화에 대항해서 등장한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는 한국 사회의 은폐·외면되고 누구도 손대기 어려워하는 현실을 현장 중심으로 담아내려 시도했다. 결국 1995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는 한국사에서 은폐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담은 첫 영화다.

해방 이후 국가는 학도병, 강제 징용, 심지어 문화재 수탈까지 통계를 잡고 분석하였지만 일본에 동원되고 끌려간 치욕적인 성노예 즉, 위안부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생존 여부나 귀환 여부는 물론 존재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사건 자체에 대한 일본의 완고한 침묵 속에서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차원이 아닌 ‘우리도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그것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든 것이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였다. 진정한 독립에 대한 것을 예술인들은 제시했다. “기억하라!”

아베 노부유키 · 기시 노부스케 그리고 아베 신조

일제 강점기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태평양전쟁에 패망하여 조선을 떠나기에 앞서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라고 일갈하며 “조선인이 제 정신을 차리는 데는 100년 세월이 더 걸릴 것이다.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고,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며 이 땅을 떠났다.

현재의 아베 신조 총리와 아베 노부유키는 어떤 집안 관계일까? 사실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제국주의 전범인 도조 히데키 내각의 군수성 차관으로서 그 역시 A급 전범이다. 그러기에 이런 집안의 핏줄을 가진 현재의 아베 신조는 분명 한국을 발아래 깔린 식민지처럼 여기고 싶을 것이다. “에라이 못된 놈!”

 

N0 아베 거리공연

앞에 말한 대로 올해 8월 2일 일본 아베 정부가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한 조치를 치욕으로 생각하며 그 날 밤 창원민예총 회원에게 파발마를 돌렸다. 시위나 집회가 아닌 길거리 시민들을 대상으로 <N0 일본 거리공연>을 기획하니 참가할 의사가 있느냐는 말에 민예총 회원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 단지 우리의 대상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 못된 야욕을 품은 정치인 아베와 그를 동조하는 무리들로 변경하고 거리공연 이름을 <N0 아베 거리공연>으로 수정했다.

그렇다. 우리는 일본을 비롯한 모든 주변국들과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고 싶다. 예술이 지향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자유와 평등 그리고 평화가 아닌가? 다스리는 나라나 다스려지는 나라라는 단어가 사라진 마치 존 레논이 부른 <IMAGIN>의 노랫말 같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보라/ 아무런 나라도 없다고 상상해보라/ 가진 것이 없다고 상상해보라/ 온 세상에서 서로 나누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러한 상상력이 가장 빈곤한 사람들은 분명히 현재의 기득권층과 넘치는 부를 가진 자들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꿍꿍이에 능한 정치인과 블랙머니와 언더머니를 경제로 생각하는 자본가들이 쌓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바벨탑일 뿐이다.

“너희는 또다시 패망할 것이다”

거리에 나선 민예총 회원들이 어떤 경제적 도움도 없이 스스로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고, 시인이 시를 읊고, 풍물패가 장구를 두드릴 때 지나가는 시민들이 내미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김밥 한 줄은 분명한 독립운동의 현장이며 N0 아베를 향한 구호와 다르지 않음을 현장에서 느낀다. 거리공연을 위한 음향을 위하여 전기가 필요할 때 선뜻 상가의 전기코드를 내어주는 건물주인과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이 보내주는 박수는 ‘우리는 다시는 굴하지 않는다’와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염원하고 외치는 마음으로 느껴져 가슴이 뭉클하다.

일본이 수출규제 혹은 백색국가 제외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것에 우리가 굴복하기를 바라겠지만 한국인이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민족임을 몰라도 그들은 너무 모르는 것이다. 다시 돌아온다던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히틀러 표정을 지닌 아베 신조 모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너희는 또다시 패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우리는 기억하고 표현한다!

8월 2일 이후 매주 수요일 민예총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 예술인의 <NO 아베 거리공연>은 매주 진행 중이다. 언제까지라는 기약은 없다. 아베 정부가 한국 수출규제 이후 처음으로 액체 불화수소의 수출을 11월 중순 허가하였지만 아베가 “스미마셍”이라고 머리 숙일 때까지 예술인들의 공연은 지치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아베가 촉발시킨 반일·극일은 우리 일상의 발아래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기억하고 표현한다!

 

김유철 스테파노 시인
한국작가회의
<삶 예술 연구소> 대표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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