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여성해방은 우정어린 혁명이다
상태바
예수와 함께, 여성해방은 우정어린 혁명이다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11.20 11: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 신앙 그리고 미래-5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요한11:5)

복음서를 읽어보면 마르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는 예수님의 아주 가까운 친구였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교사, 기적을 일으키는 분, 구세주, 예언자,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으로 알고 있어 그분이 친구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서에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도 제자, 사도, 바리사이, 사두가이, 절름발이, 소경,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는 예수님의 친구들이다.

마르타, 마리아 그리고 라자로는 예수님이 여정중에 휴식이 필요할 때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들이 만날적이면 올바른 우정관계의 친밀함에서 나올 수 있는 인격적인 친교로 가득차게 된다.

마르타, 마리아는 라자로가 아플 때 예수를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그들은 예수가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든지 하느님이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르타는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즉시 오지 않았다고 나무란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고난 후에도 마르타는 예수에게 라자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고 냄새가 날 것이라고 주의를 준다. 마르타에게 예수님과의 친밀한 우정관계는 때때로 구세주라는 별다른 실재와 갈등을 일으켰던 것 같다.

마리아도 예수님이 더 일찍 오지 않았다고 불평을 한다. 마리아의 눈물은 예수님을 괴롭혔고 그래서 라자로를 어디에 묻었느냐고 묻는다. 그들과 슬픔을 나누면서 예수님도 운다. 예수, 마르타, 마리아 사이의 친밀한 감정과 자연스러운 교류는 예수님이 그들의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알려준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구세주이신 예수께 대한 신앙은 그들이 예수와 맺은 친구관계에서 흘러나온다. 이러한 관계는 가정적이고 인간사로 가득찬 관계이다. 복음에서 우리는 두 번이나 예수님이 이 가정의 손님이었다는 구절을 읽는다(루가 10,38-42; 요한 12,1-8). 유명한 마르타-마리아 구절은 예수님이 그들 가정의 말다툼 한가운데 끼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예수님이 그들 가정에서 친절로 가득찬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라자로의 부활사화는 자매의 병든 오빠에 대한 걱정과 잇따른 죽음에 대한 슬픔을 그리고 있다. 자매는 예수가 친구이기 때문에 그들 가정사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그들 집에서 당신 수난을 시작하기 위하여 마지막 밤을 머무른다. 마지막 저녁을 인간적 사랑, 은총 그리고 우정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낸다. 그 때에 그 곳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발을 사랑스럽게 향료로 씻기고 그의 머리칼로 닦았다. 이러한 애정과 친밀함에 가득찬 행위는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랑, 부드러움, 말다툼, 눈물, 걱정, 친절, 따뜻함 그리고 관심이 마리아와 마르타의 신앙을 만들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친구요 구세주로서 포용했던 것이다.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by Sir Peter Paul Rubens and Jan Brueghel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by Sir Peter Paul Rubens and Jan Brueghel

여성적인, 혁명적인 우정

대부분 여성들의 삶과 가치관은 그들이 맺는 관계에서 오는 책임에서 만들어졌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세상을 보살피고 세상에 무엇인가 주는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그런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이 역할로 인해 여성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요구와 가까이 있다. 즉 먹는 것, 입는 것, 집, 건강 등의 요구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인류가정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를 책임지고 있어도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자원에 대한 권한은 거의 모든 여성들이 지니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작게는 가정부터 크게는 사회, 세계도처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가난의 여성화”라는 현상은 제 3세계뿐만 아니라 제 1세계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류가족의 생존이라는 문제는 아직껏 공공정책의 최우선 순위가 아니다. 우리는 전쟁, 가난, 기아, 고문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경쟁으로 얼룩진 세계에서 살고 있다. 또한 여성의 경험이나 그들이 지닌 가치관들은 국가 차원이나 세계 차원에서 공공정책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가족들에게 필요한 식량 마련에 고심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식량을 무기로 사용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여성해방이라는 문제는 모든 측면에서 인간해방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여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하도록 노력하지 않는 한 그들의 가치관과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매우 소수의 여성들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여성들의 창조력과 지도력은 공식적인 권력 테두리 밖에서 실행되고 있다.

예를 들면 본당활동 중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는 봉사활동은 주로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다. 또한 정의와 평화활동도 한 본당에서나 교구, 국가차원 그리고 전세계 차원에서 많은 여성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하여 여성들은 인류가족의 안녕을 위한 여러가지 정책과 실천사항을 정책결정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절감하고 있다. 즉 여성들은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그들의 주장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문제를 제기해도 단순히 여성들의 문제이거나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오늘날 여성들은 공공생활에서 그들 자신의 상호적인 역할을 주장하고 있다. 실제 체험을 통하여 여성들은 정의가 솔기없는 옷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절감하고 있다. 여성들이 주장하는 수많은 정의의 과제들은 여성의 평등권과 상호적인 역할 그리고 권력분담을 거부하는 가부장적인 사회, 교회 체제하에서는 도저히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싸움과 노력에서 중심은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과 나누었던 친절, 관심의 가치관을 구체화시키는 것으로써, 공공정책을 올바르게 책정하기 위하여는 개인적인 관계를 초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계를 부양하려는 결단은 참다운 결단이다. 어떤 혁명도 그런 결단을 택하지 않았다. 그런 선택은 여성들이 해방되어야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3년 10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