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보화를 내놓은 사람도 연필 한 자루엔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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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보화를 내놓은 사람도 연필 한 자루엔 흔들린다
  • 로버트 엘스버그
  • 승인 2019.11.1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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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엘스버그의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놓아 버리는 것을 배우기(1)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단 한가지 요인을 알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집착이다. 집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것, 어떤 특정한 사람이 없다면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적인 매달림이다.

- 안소니 드 멜로

“영이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들은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서언이며 그분의 기본적인 가르침의 정수인 진복팔단을 시작한다. 수를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 “진복팔단”에 몰입하여 영적인 가난의 행복을 얻기 위하여 실제로 얼마나 가난해야 하는지, 아니면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사유재산을 허락하는지 알기 위해 고심해 왔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슨 생각을 했든 간에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즉 가난에 관한 한 그분의 의도는 현대 상품문화의 정신과 결코 화해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사회는 우리를 유혹의 두터운 구름으로 둘러싸고 있다. 어딜 가든지 우리는 행복이 바로 코앞에 있다고, 행복은 더 많이 가지는 것이며 더 좋은 것이나 더 새 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에 직면하게 된다.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태조들은 물론 이 신조를 정착시켰다. 록펠러는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1달러 더 가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미국의 경제는 그렇게 무제한의 욕망 위에 세워진다. 비극의 9/11사건이 일어난 후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경악하고 있을 때, 그래서 소비에 대한 맛조차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을 때, 개인적으로 부시대통령은 사람들에게 일어나 쇼핑하러 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 격려도 사실 필요가 없다. 소비를 부추기는 온갖 광고들은 어느 잡지를 보아도 쉽게 나타난다. 우리는 꿈에서도 이런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우리가 움켜쥐는 것은 재물만이 아니다. 우리의 안전, 자기이미지, “지배하려는” 욕구, 옳다고 생각하는 지나친 확신 등등. 우리는 실제의 우리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욕구, 존경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값을 지불한다. 또 우리의 비참함에도 매달린다. 상처, 수치스러운 기억,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진복팔단의 행복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그것은 오래된 잘못과 갚지 못한 빚들의 정신적인 기록부를 지우겠다는 결심, 즉 용서의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상황들을 평온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다 완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때에 놓아버리는 것은 감사의 표현으로, 가진 모든 것에 대한 고마움과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상적으로 생각하자면, 집착을 놓아버리고 남는 것은 어떤 가난의 상태이다. 그 상태를 비움, 자유, 단순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성인들은 바로 그 가난의 상태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을 찾은 사람들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집착이라는 갈구리

탐욕스러운 정신은 매우 오래된 현상이다. 사막의 교부들은 그것을 사악한 정신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교부는 “슬픔의 악마”라고 표현하면서, “이 악마는 특히 우리가 기울어지고 있다고 보여지는 곳에 올가미를 쳐 놓고 슬픔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사막으로 간 수많은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무엇보다도 이 악마로부터 도망가고자 했다. 그들은 단지 남는 재산을 처리하는 것이 이 악마로부터 벗어나는 해결책이라고 보지 않았다. 더 깊은 내적인 회심 없이 외적으로 가난해지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모세 원장으로 알려진 수도승에 의하면, “금은보화나 토지를 내놓은 사람들이 칼, 연필, 핀 하나에 흔들린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모든 재산을 포기했지만, 작은 것들에 대한 오랜 욕심을 그냥 갖고 있어서 순식간에 평온함을 잃어버린다.” 그는 한때 어부였던 베드로 성인의 모습을 보고 비웃는다, “주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받게 될까요?” 모세원장은 이렇게 표현한다, “제자들은 다 낡아버린 낚시망 밖에 버린 것이 없었다.”

소유물을 없애면서 사막의 수도자들은 마음 속에서 집착의 갈구리를 떼어버리려고 애썼다. 그들은 가난 그 자체를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은 다만 또다른 “교환의 도구”였으며, “마음의 순결”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방법에 불과했다. 단식, 기도, 가난 같은 고행을 통하여 사막의 은수자들은 “가시덤불과 잡초”(분노, 탐욕, 욕망, 질투 등)를 뿌리채 뽑고자 했다. 이런 것들은 마음을 질식시켜서 사랑하는 능력을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은수자들은 극단적인 행동까지 했다. 세라피온이라는 은수자는 성경책들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돕기도 했다. 그는 “나는 모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가르쳐 주는 책을 팔았다”고 말한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렇게 주장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영혼을 흔들고 더 나쁜 생각과 착각을 일으키는 욕망의 노예가 된다. 욕망은 모든 것이 나쁘므로 새롭고 더 좋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갖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갈망하는 데에 있다(더 좋은 표현은 만족하는 데에). 이 만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것을 놓는 것 못지 않게, 현재 부족한 것을 채워야만 행복하다는 착각을 버리는 데에서 발견된다. 많은 성인들은 실제로 가난을 받아 들였지만, 단순히 세상의 재화를 거절하는 것 그 이상을 실천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했던 것처럼 좀이나 녹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에 재화를 쌓는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살았다. 이렇게 노력하면서 그들은 다른 것들, ­재화와 소유, 물론 가짜 야심, 욕망, 그리고 소소한 감정들­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발견하였다.

“들에 핀 백합을 보라”고 예수님은 말한다.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했다”(마태 6,28-29). 복음서는 신뢰와 철저한 단출함에 대한 권고를 여러 곳에서 표현한다. 백합의 모형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모형이 여전히 남아 있다.

 

로버트 엘스버그 /1955년 미국 잭슨빌에서 태어났다. 존재의 의미와 참된 삶에 이르는 길을 찾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다니다 2학년을 마치고 1975년 도로시 데이와 함께 5년 동안 일했다. <가톨릭일꾼> 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하다 1980년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모교로 돌아가 종교와 문학을 공부한 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변화된 가톨릭교회 모습을 체험했다. 도로시 데이의 작품집을 냈으며 하버드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1학년을 가르쳤다. 1987년 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메리놀 수도회 Orbis 출판사 편집장이 되었다. 지은 책으로 <모든 성인들>과 <모든 여인 가운데 복되도다> 등이 있다. 도로시 데이 시성식 추진위원회와 헨리 나웬 재단 위원이며, 현재 세 자녀와 함께 뉴욕 주 오시닝에 살고 있다.

이 글은 2003년, 미국 메리놀 출판사가 발간한 <The Saints' Guide to Happiness>(Robert Ellsberg)를 <참사람되어> 2005년 3월호에서 편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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