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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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 토머스 머튼
  • 승인 2019.11.10 1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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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그리스도교의 이상-2: 불완전한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는 이유가 항상 악의, 게으름, 우둔한 죄 때문이라고 그럴듯하게 추측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혼란, 무지, 약함, 몰이해 때문일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자신의 소명이 지니는 의미와 위대함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풍요하신 그리스도”를 어떻게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지조차 모른다(에페소서 3,9). 하느님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구원과 무한한 자비의 신비는 “신앙이 깊은 사람”에게도 모호하고 믿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명이 지닌 깊은 의미에 응답할 용기도 힘도 없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것을 잘못 이해하고, 그것이 가져올 참다운 전망들을 왜곡한 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고상한 사회적 소유물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한 경우 그리스도적 “완전함”이란 신앙의 어두운 밤 가운데에서도 은총에 꾸준히 그리고 놀라운 충실함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제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옳다고” 상식적으로 여겨지는 것에 남부끄럽지 않게 동조하는 것이 거룩함이라고 간주된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외적인 징표에 거룩함의 비중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형식주의를 무조건 바리사이주의로 몰아세운다면 그것 역시 지나치게 진부한 사고방식일 것이다. 이런 방식의 존경 안에도 도덕적인 선의가 꽤 많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 하느님은 선한 의도를 놓치는 법이 없으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적 집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성령께서 요구하시는 희생, 동료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며 외롭고 고통스러운 책임을 져야 하는 결정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깊이의 부족, 확실한 어떤 일방성과 불완전함이 항상 남아 있게 되어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그리스도적 거룩함의 길은 어떤 경우에도 힘들고 가혹하다. 우리는 단식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세상 사람들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고통과 희생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즐기며, 이따금 “우리의 의도를 정화시켜” 우리가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자세는 평범함을 초라하게 변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자세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정당화시켜주지 않는다. 독실한 척하는 제스처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상징적이어서는 안되며, 완전한 현실로 드러나야 한다. 그것은 정신적인 활동이 아닌, 우리의 가장 작은 자아를 내어주는 선물이자 투신이 되어야 한다.

인기 있는 종교들이 우리 가운데 “종교가 부활”하고 있다고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말을 전적으로 믿지 말자! 사람들이 단순히 겁을 먹고 불안함 때문에, 장밋빛 슬로건을 붙들고 늘어지고, 교회로 더 자주 달려가는 것, 고통 받는 영혼을 기분 좋고 인간적인 격언들로 위로하는 것을 보고 이 사회가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영적으로 병약한 것일 수도 있다. 병의 증세를 깨닫는 것은 확실히 좋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병을 엉터리 약으로 고치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므로 거룩함에 대해 단순하고 유아적으로 판단하여 자신을 속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뿌리가 깊지 않고 사람과 사회의 필요에 깊히 뿌리를 두고 열매를 맺는 관계가 없는 피상적인 신앙은 결국 실질적인 종교적 의무를 피하게 만든다. 우리 시대는 독실하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며, 심각한 죄(또는 최소한 죄로 인식되는 것)를 짓지 않는 반면, 건설적이거나 선한 일은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존경 받을만한 것으로 충분치 않다. 더 깊이가 있고 좀더 긍정적인 도덕적 가치가 없이 단순히 외부의 존경을 받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 믿음에 대한 의혹을 불러올 뿐이다.

20세기 독재체제의 경험으로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극도로 불의한 사회에서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든 악에 눈을 감아 버리고 아마 적어도 악에 태만하게 동참하며 신심이라는 자신들의 울타리를 친 삶의 공간에만 관심을 두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모든 일로부터는 물러나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종교를 이유로 내건 그런 초라한 핑계는 무지몽매함과 도덕적 불감증을 가중시켰고, 장기적으로는 모든 나라와 사회 전역에서 그리스도 정신을 죽음에로 끌고 갔다. 이런 성향이 현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노동자 계급의 상실-를 야기시켰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완벽함” 보다 “거룩함”에 관해 얘기해야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룩한” 사람은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과 행동에 의해 성화된 사람이다. 그는 자신 안에서 또한 자신을 통해 그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거룩한 교회”의 삶, 믿음, 자애에 깊이 잠기는 삶을 살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완전함”에 더 집중을 한다면 그는 조금 더 이기적인 태도를 갖게 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우월한 존재로서 완전하고 모든 덕을 갖추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자신을 그들과 비교하고 즐거워하면서 자신에 빠지게 되는 위험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룩함”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안에 이루어지는 친교와 연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영적인 완전함”이라고 하면 내적인 고행에 대한 지식과 훈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는 무시한 채, 격정이 더 이상 그의 순수한 영혼을 방해할 수 없게 된 평정의 상태에 들어선 철학자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교에서 의미하는 거룩함이 아니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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