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랑을 통해, 사랑 속에서 구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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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랑을 통해, 사랑 속에서 구원받는다
  • 한상봉
  • 승인 2019.11.10 11: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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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 존 니프시, 분도출판사, 2019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외친다. “현재를 즐겨라!”(Carpe diem!) 죽기 전에,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의 삶을 최대한 살라고 일깨우는 말이다. 개인의 소명과 사회적 양심에 대해 존 니프시가 쓴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는 소명, 이 신성한 부르심이 한 인간의 삶에서 절대절명의 요청임을 확인해 준다.

우리가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 중에 하나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있었음에도 ‘오늘을 즐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으며 후회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의 어떤 단계에서 우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월든 호숫가로 이끈 생각을 하게 된다고 존 니프시는 말한다.

“내가 숲에 간 이유는 신중하게 살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만을 마주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다.”(소로)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에서 “많은 이들은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만큼 완전히 살아 있음을 느껴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 죽음 앞에서는 많은 걱정과 근심이 무의미해진다. 많은 것이 그들의 진정한 가치에 따라 명확해지고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신성한 부르심이란 ‘삶의 우선순위’를 명료하게 깨닫는 일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가치와 무시해도 좋을만한 것 사이의 차이를 알아채는 일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정한 환경에서야 빅토르 프랑클은 가장 소중하고 영원히 참된 것이 ‘사랑’임을 깨달았다.

“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는 시인들이 노래로 표현하고 사상가들이 궁극적 지혜로 선포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았다. 사랑은 우리가 열망할 수 있는 궁극적인 최고 목적이라는 진리였다. 그때 나는 인간의 시와 신념이 전하는 가장 위대한 신비를 깨달았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사랑 속에서 구원받는다.’”

이 사실을 깨닫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마태오 복음의 한 구절만으로도 충분하다.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예수님은 우리 삶이 아주 단순한 기준으로 평가된다고 암시한다. 그 기준은 실천적인 사랑이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내게 마시게 해 주었다. 나그네 되었을 때 나를 맞아들였고, 헐벗었을 때에는 내게 입혀 주었다. 병들었을 때에 나를 찾아왔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내게로 와 주었다. ...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예수님의 이 가르침대로 살았던 마틴 루서 킹은 암살당하기 몇 달 전에 한 연설에서 자신이 죽은 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대해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전했다. 그는 노벨평화상이나 출신학교처럼 피상적인 것이 강조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옷을 입혀 주고, 갇힌 자들을 방문하려고 애썼던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나는 전쟁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취하려고 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내가 인간을 사랑하고 섬기려 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 그 외의 다른 모든 피상적인 것들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남길 재산을 갖고 싶지 않습니다. 멋있고 사치스러운 것들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헌신하는 삶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로의 말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슬프게도 “조용히 절망의 삶을 살다가 부르지 못한 노래와 함께 무덤으로 간다.”는 사실이다.

 

마틴 루서 킹
마틴 루서 킹

개인의 소명과 사회적 양심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장소는 우리의 깊은 기쁨과 세상의 깊은 갈망이 만나는 곳이다.”(프레드릭 비크너)

비크너의 말처럼, 성스러운 부르심의 장소는 우리의 내적 갈망과 사회적 요청이 만나는 곳이다. 그래서 호세 가르시아는 “세상은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은 세상으로 나아간다.”고 했다. 사람들은 보통 소명(성소)을 성직자나 수도자의 삶으로 부름 받는 것이나 세속적 의미의 ‘직업’을 가리키는 단어로 생각한다. 그러나 소명이란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비하는 일이다.

우리는 인생의 시기마다 다른 소명을 경험하기도 하고, 특정한 때에는 한꺼번에 여러 부르심을 받기도 한다. 이십 대에 의미 있었던 삶이 사십대에는 달리 보일 수 있다. 은퇴가 가까워진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이제 어찌할까, 새로운 소명을 기대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이다.

예언자 미카는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미카 6,8)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가 의사든 성직자든, 예술가든 택시기사든, 농부든 노동자든, 상인이든 교사든, 근본적인 소명은 이 땅의 짧은 생애 동안 정의롭고 사랑스럽고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소명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되어, 국민과 세계시민이 지녀야 할 사회적 책임으로 확장된다.

목소리를 듣다

소명을 뜻하는 영어 ‘vocation’은 라틴어 ‘vocare’(부르다)와 ‘vox’(목소리)에서 왔다. 즉, 소명이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퀘이커 교도 토마스 켈리는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다.

“우리 깊은 곳에는 영혼의 놀라운 내적 안식처, 거룩한 장소, 신적 중심, 말하고 있는 목소리가 있다. 우리는 그곳으로 거듭해서 돌아갈 수 있다. 세월에 찢긴 삶을 자극하고, 놀라운 운명을 암시하여 준비시키며, 자기 집으로 부르는 영원이 우리 마음 안에 있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기도와 명상은 이런 영의 목소리를 더욱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듣기 위한 기술로 볼 수 있다.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에 의해 죽음의 수용소에 보내진 네덜란드 출신의 유대인 여성 에티 힐섬은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기도할 때 나는 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존재, 편의상 내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존재와 소박하고 순진하게 때로는 극도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목소리는 우리 안에서만 말하지 않는다. 목소리는 타인을 통해 우리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잠시 우리의 관심사를 내려놓고 타인의 관점에서 느끼고 상상하는 ‘공감적 능력’이 필요하다. 다른 이의 말을 듣기 위해 우리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현실 속으로 직접 들어가 접촉해야 한다. 페루 리마의 빈민가에서 23년 동안 살았던 미국인 예수회 수사 댄 하트넷은 복음적 헌신을 위해 ‘먼저 가난한 이들의 말을 듣는데서 시작하라’고 권한다.

“정의를 향한 첫걸음은 우리의 주의를 우리 자신에게서 의도적으로 타인에게로 돌려 불의를 겪는 이들의 일상적 경험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입장, 특히 극단적 가난에 처해 있거나 사회적 배제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정의를 위한 참된 관심은 결코 개념적 정의(定義)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 실제로 대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일상적 고통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면, 고통의 실제 역사에 대한 한결같은 관심이 없다면, 정의는 한 사람이 참으로 관심을 기울일만한 것이 될 수 없고, 사실상 우선순위가 될 수 없으며, 자발적 헌신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영의 사람들

이처럼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초점을 이동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이들이 ‘영의 사람’(spirit persons)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권능 또는 지혜가 이 세상으로 들어오게 하는 ‘통로’이다. 모세는 불타는 덤불 가운데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고, 예수님은 요르단 강가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 존 샌포드는 이런 이를 ‘영적 영웅’이라 부른다.

“영웅은 남들보다 의식이 훨씬 발달한 사람으로, 심리적 통합을 이루고 자신의 삶에서 신의 계획과 방식을 실현한 사람들이다. 영웅은 탁월한 삶과 의식으로 전 인류의 의식수준을 높이고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삶 속에서 예언자, 천사 또는 하느님의 사자로서 어떤 식으로든 봉사하면서 우리에게 성스러움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 삶속에서 예언자적 진리를 말하는 사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사람, 삶의 우선순위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일깨우는 사람, 고통이나 곤경에 처했을 때 자비로운 천사처럼 나타나는 사람, 낙담할 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 개인적으로 혼란에 빠졌거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 적절한 조언을 주고 바른 관점을 갖게 해 주는 사람이 영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때로 익숙한 모습으로, 때로 낯선 사람으로 우리 삶에 찾아온다. 초기 켈트 그리스도교 전승에 이런 시가 있다.

“나는 어제 낯선 이를 보았네.
나는 먹을 자리에 먹거리를
마실 자리에 마실 것을 두었고
들을 자리에 음악을 두었네.
그는 삼위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나와 내 집에
내 가축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축복했고,
종달새가 이렇게 노래했네.
‘그리스도는 때로는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다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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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참되게 살기

파커 파머는 “우리의 가장 깊은 소명은 참된 자기로 성숙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토머스 머튼 역시 “내게 성인(聖人)이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과 구원의 문제는 내가 정말 누구인지 아는 것,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라 했다. 존 니프시는 “우리의 삶이 ‘화려한 겉치레’, ‘교활함’ 또는 가식에 근거할 때, 진정한 우리 자신과 조화되지 못하는 삶의 방식에 휩쓸릴 때, 우리 존재의 어떤 차원에서 메스꺼움과 염증을 느낀다.”고 했다.

여기서 주의 깊은 식별이 필요한 것은, 그가 아무리 위대한 영적 영웅이더라도 다른 사람이 제시하는 거룩함을 모방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소명은 거룩함을 향한 우리 자신만의 길을 찾는 것이다. 카를 융은 심지어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의 삶을 모방한다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본받음’을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삶을 모범으로 삼아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더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면의 갈망과 세상의 요청이 만나는 곳에서 “진리를 참되게 사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존 니프시는 ‘나의 열정과 자비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나는 진정 누구인가?”에 답하려면 “내가 누구에게 이끌리는가” 알아야 한다. 누구와 있을 때 편안한지, 특히 마음이 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떤 이를 더 사랑하고, 누구의 고통에 더 민감한지 묻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곳에 우리의 고유한 소명도 있다. 예수회의 페드로 아루페 신부는 이렇게 요약한다.

“하느님을 찾는 것, 즉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방식으로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 당신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것이 당신이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은 아침에 당신을 침대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 무엇일지, 저녁에 무엇을 할지, 주말을 어떻게 보낼지, 무엇을 읽을지, 누구를 알게 될지,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일지, 기쁨과 감사로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 무엇일지 결정할 것이다. 사랑에 빠져라.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러면 그 사랑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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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위한 고통

그러나 사랑의 소명에는 고통과 위험이 뒤따른다. 스콧 펙이 <아직도 가야할 길> 첫문장에서 “인생은 힘들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부르는 목소리를 따르는 것은 상처받을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사랑을 진작에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기 위해 낡은 존재방식을 내려놓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고 낯설고 죽는 것처럼 두렵다. 괴테가 그의 시 <거룩한 갈망>에서 말하는 바로 그것이다.

“죽어서 성장함을 경험하지 못하는 한
그대는 어두운 지상의 고달픈 나그네에 지나지 않으리.”

우리는 위험한 일을 피하려고 초조하게 애쓰느라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지상의 고달픈 나그네”가 되곤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게 “그럼에도 사랑하라.”는 시몬 베유의 말이다. 사랑은 배우기 어렵고, 자존심이 상하며, 평생 지속되어야 할 과정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한 젊은 시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사랑은 어렵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아마도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 것이고, 궁극적인 최후의 시험이자 입증일 것입니다. 다른 모든 일은 사랑을 위한 준비입니다. 이런 이유로 모든 것에서 초심자인 젊은이는 아직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온 존재로, 외롭게 고동치는 심장의 모든 힘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선택

그 사랑이 ‘가난한 자’를 선택할 때 더 위태롭고 그만큼 은총 가운데 있다. 복음은 가난한 자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은 중립적이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고자 하면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고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푸에블라주교회의는 “우리는 가난한 자의 우선성과 그들과의 연대를 표현하는 분명하고 예언자적인 선택을 하고자 한다. 우리는 온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우선적 선택, 그들의 완전한 해방을 목표로 하는 선택 쪽으로 회심해야 한다고 단언한다.”고 했다. 여기서 “우선적”이라는 형용사는 가난한 자들을 편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부자나 특권층에 반감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자나 특권층을 흔들어 그들의 양심을 시험하려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위한 선택은 하찮고 이름 없는 통계로만 세어질 뿐인 사람들을 우리에게 ‘중요한 타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무시당하는 그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들과 운명을 나누고 ‘생사를 같이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가난한 자를 위한 직업을 갖도록 부름받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가난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우리의 자비로운 감정과 선한 의도를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라는 부름에 대답해야 한다.

이를 실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난한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자주 만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에 돈을 기부하거나 기금을 모을 수 있고, 가정과 학교와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가난과 사회정의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을 계속 가난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공공정책을 발의하도록 하는 정치적 지지를 통해서도 실천할 수 있다.

이처럼 가난한 이들과 생사를 같이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재정적 비용도 지출해야 하고, 감정적 지출도 감당해야 한다. 가난한 이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함께 경험하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생명을 바쳐야 할 경우도 있다. 학대받는 가난한 이들을 편들다가 1980년 3월에 군부에 의해 암살당한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 정말이지, 누구든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과 같은 운명으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엘살바도르에서 가난한 자의 운명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것은 납치되는 것, 고문당하는 것, 투옥되는 것, 죽은 채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같은 해에 엘살바도르 군대에 잔인하게 살해된 메리놀회 수녀 이타 포드는, “어떤 사람들은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했다. 물론 모두가 목숨을 바치도록 부름 받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이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야 소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 굳이 마틴 루서 킹이나 로메로 대주교가 아니어도 좋다. 우리의 더듬거리는 목소리와 평범한 행동에서 소명은 시작되고 세상은 바뀐다. 마지막으로 존 니프시는 <별 거 아닐 거야>라는 우화를 소개한다.

진박새 한 마리가 야생비둘기에게 물었다. “눈 한 송이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 비둘기가 대답했다. “별 거 아닐 거야.” 진박새가 말했다. “놀라운 이야기 하나 해 줄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어느 전나무 가지에 앉아 있었어. 폭설도 아니었고, 꿈결처럼, 격렬함 없는 그런 눈이었어. 그때 나는 할 일이 없어 잔나무와 잎에 내려앉는 눈송이를 세고 있었어. 정확히 3,741,952개였어. 그 가지에 눈송이가 하나 더 떨어졌을 때, 정말 네가 말한 것처럼 별 거 아니었는데, 나뭇가지가 부러졌어.” 그 말을 하고 진박새는 호로록 날아갔다. 비둘기는 진박새가 해 준 이야기를 잠깐 생각하다 혼잣말을 했다. “그래,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단 한 사람의 목소리가 더 필요한지도 몰라.” 우리의 소명은 그렇게 깨달음처럼 온다.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1호. 2019년 10-1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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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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