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들은 성직자의 옷자락에 매달려 천국을 희망하지 마라
상태바
평신도들은 성직자의 옷자락에 매달려 천국을 희망하지 마라
  • 토머스 머튼
  • 승인 2019.11.04 04: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그리스도교의 이상-1: 어둠으로부터 건져지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세례 때 한 약속대로 죄를 거부하고, 자신을 아무런 타협 없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바쳐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며, 자신의 영혼을 구하며, 하느님의 신비 안에 들어가며, 그리하여 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의 빛 안에 잠기게 해야 한다.”

성 바오로가 말씀하셨듯이(1코린 6,19),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 그분의 성령이 세례 때에 우리를 완전히 소유하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성령의 성전이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 우리의 욕망은 우리 자신의 것이기에 앞서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실 권리를 갖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 당연히 되돌려 드려야 할 것을 실제로 드리고 있는지 의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죄는 하느님의 의지와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

우리가 자신의 천성적인 약점과 무질서하고 이기적인 열망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께 속한 것들은 그분의 성스러운 사랑의 힘으로부터 떨어져나가 이기심으로 썩고, 비이성적인 욕망으로 눈이 멀고, 자만으로 굳어져서 결국 죄라고 불리는 도덕적인 무(無)의 심연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죄는 영적인 생활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할 때 느낄 수 있는 내면의 질서와 평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죄는 하느님의 의지와 그분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이런 저런 일들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또는 그분이 금하시는 일을 안하겠다는 결심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인데,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에 숨겨져 있는 우리 자신의 신비롭고, 불확실하며, 영적인 실제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죄란 우리가 되어야 하는 모습-하느님의 자녀들, 하느님의 모상-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죄는, 마치 자유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자유로부터 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성인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거룩함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불리움을 받는다. 반면, 몇몇 사람들은 특수한 소명을 받고 수도적인 서약을 통해 더욱 엄숙한 의무의 계약을 맺어,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소명인 거룩함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다가가기도 한다. 그들은 확실하며 더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복음적 권고인 “완전하게 되기”를 약속하였다.

그들은 가난하고, 순결하고, 순종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의지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부인하며, 세속적인 집착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더욱 완전히 바치고자 한다. 그들에게 성화(聖化)는 단순히 이루어야 할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성화는 그들의 “사명”이다. 그들에게는 인생에서 성인이 되는 것 이외에 해야 할 일이 없으며, 모든 것은 이 목표를 따라 가는 것으로 그들에게는 가장 우선적이며 시급한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도자들이나 성직자가 거룩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직업적인 의무를 가진다는 것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 사실은 그들만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며, 평신도가 어떤 면에서든 그들보다 떨어지는 그리스도인이며, 그들보다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John Chrysostom
John Chrysostom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젊은 시절, 사막으로 나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후에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어 그리스도의 모든 일원은 그들이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도덕성, 하나의 거룩함만이 있을 뿐인데 - 그것은 복음에 제시되어 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준 만큼 평신도의 자격은 필연적으로 선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런만큼, 평신도들은 단순히 “죄를 피하기만 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어떤 정적인 거룩함만을 유지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가끔 이러한 삶의 본분의 차이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심하게 왜곡되고 과도하게 단순하게 부각되어, 신부, 수사, 수녀들은 완전함을 향해 성숙하고 진전을 보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평신도들은 은총의 상태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성직자들의 옷자락에 매달리듯, 홀로 “완전함”에 불리운 전문가들에게 이끌려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곤 한다.

평신도들의 삶을 하찮게 여기지 마라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수도자들의 삶이 더 엄숙하고 힘들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적인 성스러움의 주요 잣대가 어려움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성향은 평신도들에게 있어 구원이 덜 힘들어 보이기 때문에 자칫 그들의 구원이 참다운 구원이 아니라는 그릇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오히려 반대로, 크리소스톰은, “하느님은 수도원의 엄격함을 매일의 의무로 요구하실 만큼 우리 평신도와 재속성직자들을 엄하게 다루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셨다. [그분이 주신 권고에 관해] 어떤 사람은 동정을 지켜야 하고, 어떤 사람은 음식을 절제해야 한다... 우리는 소유물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하느님은 다만 도둑질하지 말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을 뿐이다”(고린토 전서에 관한 주석 중).

달리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하는 일상적인 절제, 정의와 자선은 수녀들의 동정서원이나 가난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것이다. 교회에 봉헌된 수도자의 삶이 더욱 존엄하고 내적인 완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수도자들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더욱 철저하고 전적으로 헌신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평신도들의 삶을 하찮게 여기게 해서는 안된다. 반대로, 결혼 역시 그 특성상 아주 신성한 것이며, 때때로 거기에 따르는 희생은, 경우에 따라서는, 수도자들의 희생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현실 안에서 보다 완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평신도라도 상관없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수도자의 기도와 거룩함의 표양은 중요하다 

성 크리소스톰은 수도자들만이 완전함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평신도들은 지옥만 면하면 된다는 오류에 맞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평신도와 수도자 모두 덕을 쌓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단지 살아있기만 해서는 안되며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집트를 떠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약속된 나라에 가야 한다”.

동시에, 예를 들어 동정을 지키는 것 등 복음의 이런 저런 권고를 아무리 완전하게 지킨다 하여도, 더욱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덕인 정의와 자선을 베풀지 않는다면 앞에서 말한 덕을 실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그는 말하길: “단식을 하거나 바닥에서 잠을 자는 고행, 재를 먹거나 쉬지 않고 우는 것도 의미가 없다. 만약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이 동정의 몸이라도 자선을 베풀지 않으면 주님의 신부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들은 교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갖고 있다. 그들의 기도와 거룩함은 교회 전체에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그들의 표양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그들 역시 “이 세상의 이방인이자 순례자”로 살도록 가르치며, 물질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고, 도시의 허망한 동요 가운데서도 그의 그리스도교적 자유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데, 모든 일에서 다만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고 동료 인간들에게 봉사하는 것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분의 은총을 활용하라

한 마디로 말해,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지복은 수도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만약 그렇다고 하면 그것은 우주를 파멸시킬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새로운 정체로 받아들인 사람이면 누구나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과 같이 거룩해져야 한다.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으며, 우리의 행동은 그분과의 일치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자신의 현존을 우리 안에서 또한 우리를 통해 드러내 보이셔야 한다. 생각하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은 강력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르코 5,14-16)

교부들은, 특별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사람 안의 “빛”은 하느님 자녀됨의 표상이며, 우리 안에 살아 계신 말씀이라고 믿었다.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결국 형식적인 전례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을 사그러들지 않는 사랑으로 보존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클레멘트는 덧붙여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완전함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행하시는 영적 교육의 장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한 빛이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은 곧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암흑에 싸여 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룩함”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진정으로 성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춰질 위험을 감수하고도 성인이 되길 바랄 수 있는가? 주제 넘은 생각은 아닌가? 가능하기나 한 이야기인가? 사실, 많은 평신도와 다수의 성직자들조차도 그들이 현실적으로 성화(聖化)될 수 있을지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적인 사고가 아닐까? 겸손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태만한 것인가? 패배의식, 또는 절망감인가?"

하느님이 우리의 삶의 성화를 바라신다면 그리고 거룩함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사실이 그러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빛과 힘, 용기를 틀림없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반드시 주실 것이다. 우리가 성인이 못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은총을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