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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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11.04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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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Catholic Worker Movement)은 1933년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나그네들을 위한 집(House of Hospitality)을 열고, 뉴욕의 유니언 광장에서 1센트짜리 <가톨릭일꾼> 신문을 팔면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미국 자본주의의 기반이 흔들리던 경제공황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운동은 두 사람,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의 만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들이 남긴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가톨릭일꾼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도로시 데이의 청원기도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서

1932년 12월이었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과 어울리던 언론가이며, 한 아이의 어머니이며, 가톨릭으로 개종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는 워싱톤 시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주최했던 실업자 및 농민들의 단식시위에 참가하였다. 훗날 도로시 데이는 이 시위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사나운 군중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었고 평범한 노동자들을 당신의 친구로 선택했었다. 이 군중은 그리스도교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면 오늘 이런 시위는 없었을 것이다. 점잔빼고 살찐 그리스도인들, 집안에 들어앉아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에 움츠러드는 그리스도인들보다는 이 굶주리고 거친 노동자들이 하느님의 눈에는 더욱 안쓰럽게 보일 것이다.”

20세기의 첫 30년을 살아온 다른 미국인들처럼, 도로시 데이는 딜레마에 빠진 자신을 발견했다. 도로시는 자본주의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자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빼앗아가고 공황과 전쟁으로 몰아가는 제도였다. 그러나 사회혁명의 붉은 깃발을 들고 있는 새로운 구세주, 아메리카의 길거리에서 분노의 목소리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공산주의는 폭력과 대립만을 가져오리라 생각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모두가 물질적인 실재만을 인정하고 인간의 가치를 그가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 과정에서 얼마나 생산적이고 도움을 줄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짓는 이념이었다. 또 자본주의, 공산주의 모두가 영적인 비전을 제시하거나 주장하지 않았다. 도로시는 실업자들에 대하여 계속 성찰하며 딜레마에 빠져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바로 나의 동료들이라고 느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들 중의 하나라고 느꼈습니다. 나는 과거에 그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가톨릭신자가 되었고 더 이상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들의 시위에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참가하고 싶었습니다.”

다음날,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에 도로시는 기도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영적인 현존을 깨닫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길을 보여 달라고 청하였다. 이때 도로시는 피터 모린과 만나면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피터 모린의 사회적 비전

피터 모린(Peter Maurin, 1877-1949)은 1877년 남프랑스의 한 농가에서 23명의 아이들 가운데 하나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그 고장에서 1,500여 년 동안이나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피터는 드 라살(Jean-Baptiste de la Salle)이 창립한 그리스도교육수사회 수도자였으며, 그리스도교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가톨릭행동주의 운동인 르 시용(Le Sillon, 밭고랑)운동에 참여했다. 1909년에는 캐나다로 농사짓기 위해 이주하였다. 그러나 함께 온 동료가 사고로 죽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먹고 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하였다.

피터는 선동가였으며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가 되었다. 1932년 그는 뉴욕으로 왔고 유니언 광장에서 연설하며 빈민가의 싸구려 여인숙에서 머물고 있었다. 농민이며 가톨릭 지성인이었던 피터는 ‘모든 사람들이 선해지기가 더 쉬운 미래사회’를 꿈꾸고 있었다.

피터는 광범위하게 책을 읽었고, 그의 지적 생활은 사회-종교 측면의 다양한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피터는 절대로 자신의 사상을 자기 본래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사상들을 종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종합한 생각들을 <알기 쉬운 글들>(easy essay)이라고 이름 붙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새로운 사회를 표현하고 제시하는 시와 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새로운 사회는 공동체와 땅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통합된 인간’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사회이다. 산업적이며 고립된 노동, 실업 그리고 가난으로 특징지어진 현재의 사회에 대하여 피터는 땅에 뿌리를 내리는 사회, 사람들이 땅에서 경작하고, 손노동을 배우며, 철학과 과학을 공부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예배에 참여하고, 자신의 삶을 서로 나누는 사회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피터는 농업과 손노동 등 “단순한 진리”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 좀 더 성장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래서 사회재건 프로그램, 곧 “우리들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 프로그램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먹고 입고 잠잘 수 있는 나그네의 집을 마련하는 것, 두 번째는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이상을 더 발전시키고 정리하는 토론그룹을 만드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농업경영학교’를 열어 사람들이 농사일과 수공기술을 배우고 문자 그대로 새로운 사회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
피터 모린과 동반하는 가톨릭일꾼운동

여행하는 사색가인 피터는 그의 이런 생각들을 일상생활에서 함께 구체화시킬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도로시 데이가 가톨릭잡지 등에 기고한 글을 읽었고, 이 사회재건 프로그램을 도로시가 시작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피터는 도로시가 워싱턴에서 돌아오기 전날 도로시의 친구들과 딸아이가 살고 있었던 집에 도착하였다. 도로시의 친구들은 그들이 처음 피터를 만났을 때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그는 황갈색 셔츠에 다 헤지고 얼룩진 바지와 오버를 걸치고 있었지요. 옷의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두 책과 종이로 가득 차 있었고요. 무엇을 찾을려고 할 때는 30센트 주고 산 돋보기 안경을 꺼내 코 허리에 걸쳤지요. 그나마 안경다리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거의 일 년이나 넘게 쓰고 다녔어요.”

피터 모린은 이렇게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했고, 도로시 데이와 함께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사회정의를 이루며, 가톨릭사회재건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살았다. 피터는 도로시가 워싱턴의 단식시위에서 느꼈던 딜레마를 풀어주었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도 포괄적인 행동 프로그램을 고안하였다. 그는 신문이나 팸플릿, 소책자로 노동자들의 문제를 알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행동과 함께 보다 직접적인 애덕의 행동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즉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벌거벗은 이들을 입히며, 집없는 이들에게 있을 곳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것은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고, 의혹에 찬 사람들을 이끌어주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하는 일이었다.

육체적인 일과 영적인 일은 반드시 함께 해야 했다. <가톨릭일꾼> 신문을 발간하고 자료들을 나누는 것은 피터에게 ‘애덕이라는 영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일이었다. 도로시에게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할 수 없는 방법으로 각 사람과 하느님의 특별한 영적관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가톨릭일꾼> 신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가능성을 깨닫도록 하는 행위는 도로시의 종교적 투신을 사회적 차원에서 완성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가톨릭일꾼운동의 시작은 극적이지도 않았고 엄밀하게 계획된 것도 아니었다. 캐나다와 미국에서 얼쩡거리던 한 프랑스 농부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한 언론가와 만나 시작된 일이었다. 1952년에 출간된 자서전 <긴 외로움>(The Long Loneliness)에서 도로시 데이는 일꾼운동의 시작과 발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피터 모린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사람들이 줄을 지어 모여들어 ‘우리에게는 빵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저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십시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해 버릴 수 없었습니다. 빵 여섯 개와 고기 몇 마리가 있으면 우리는 그들과 나누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빵은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때에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도록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이 떠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럭저럭 방도 늘어났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났습니다. 나는 자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저 이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벌어진 것이다.’ 우리들이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모든 일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그렇게 계속될 것입니다.”

 

 

자매형제적 사랑과 자발적 가난

가톨릭일꾼운동은 두 가지 중요한 전통이 있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적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며(의식주 생활), 또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것이다. 피터 모린은 가톨릭일꾼의 역할이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가톨릭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동체에서 봉사자들은 분노와 추함의 한 복판에서 작은 질서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봉사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작은 행위를 보다 인간답게 실천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 역시 존엄한 인간이며, 재산은 없으나 얼굴과 느낌을 지닌, 기쁨과 슬픔, 분노와 갈망을 느낄 줄 아는 인간임을 잊지 않는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세상에서 자신을 바치는 가난, 신앙으로 가득 찬 봉사, 그리고 이타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시대의 이기적인 지배문화와 반대되는 문화를 드러내고 있다. 이 운동이 봉헌하는 가난은 궁핍이 아니라 ‘복음적인 가난’이다.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은 자발적인 가난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행위이다. 또한 이웃에 대한 착취로 만들어진 편안함과 사치에 참여하지 않는 행위이다. ... 우리의 형제자매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 채워지지 않는 한, 우리는 편안함을 즐기기를 거부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믿는다. 자발적 가난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우리가 그것을 완전하게 살 수는 없으나 항상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정치참여와 그리스도교 평화주의

가톨릭일꾼운동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문제, 특히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밝히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유명한 예는 이차 세계대전 때에, 평화주의자의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 당시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의견을 표명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동료 여러분! 자비로우신 하느님, 우리들의 아버지인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침묵해야 할까요? 아니면 말해야 할까요? 그리고 만일 우리가 말한다면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분의 말씀을 여기에 전합니다.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잘해주고, 너를 박해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전쟁에 참여하고 협조하기를 거부하며 평화를 고집스럽게 바라는 마음 때문에, 우리는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친구들과 정부의 관대함을 믿으며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우리들의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가톨릭일꾼>, 1942년 1월호)

가톨릭일꾼운동은 항상 가난한 이의 편에 서서 그들의 권리를 옹호해 왔으며, 이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또한 전쟁에 쓰이는 세금 납부를 거부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국방부(펜타곤) 앞에서 중앙아메리카의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의 정책을 비난하는 시위를 하였고, 핵무기를 실은 기차가 지나갈 때 철로 위에서 밤샘시위를 벌였으며, 베트남전쟁에 참가하기를 거부하였다. 지금까지 <가톨릭일꾼> 신문에 실린 정치, 사회문제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930년대에는 노동자들의 파업, 조직화 그리고 그들에 대한 연대활동을 전했다. 2차대전(1940년대) 때에는 전쟁으로 인한 유럽의 황폐상을 보고하고, 미국에서 양심적인 전쟁거부운동을 지지하였다. 또한 잔혹한 살육에 대한 해독제로서 ‘평화신학’을 정리하였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민권운동, 동서냉전에 대한 저항운동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1970년대에는 조직화되는 농민운동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지난 수 년 동안 우리는 핵무기와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비판했다. 우리는 이 시대가 다시 전쟁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전쟁과 평화에 대하여 수많은 글을 써왔다. 우리는 평화주의자다. 우리는 어떤 누구도 이웃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가 없으며, 그것을 계획조차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미국정부에 조건부 무장해제가 아니라 조건 없는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가 평화시위를 할 때 혹은 성명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때, 우리는 어리석은 바보들이나 소련의 스파이 혹은 낭만주의자로 비웃음을 당하기도 한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무기 소유국이기 때문에 우리의 목소리는 무시되곤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저 평화의 씨를 뿌리는 작업, 가장 작은 씨를 뿌리고 있다고 여길 뿐이다. 우리는 교회가 왜 우리처럼 이러한 평화의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는가 묻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낭만적인 바보라고 여겨지며 겨우 ’작은 씨‘ 밖에 뿌리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럴 것이라고 이해한다.”(<가톨릭일꾼>, 1987년 5월호)

 

복음적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학교

1933년에 시작된 가톨릭일꾼운동은 세속화된 오늘의 세계에서도 ‘충실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에 대한 강한 믿음, 그리고 땅에 대한 인간의 결속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 운동은 평등한 참여로 이루어지는 마을 혹은 농업공동체를 끈질기게 지원해 왔다. 국가적 복지시스템과 별도로, 우리는 각자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믿으며, 가톨릭일꾼운동은 대도시 빈민가에서 그 삶을 계속해오고 있다. 또한 증오와 폭력을 사랑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확신하며, 개인적인 보복이나 국가 사이의 전쟁 등 모든 형태의 폭력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시대의 윤리적이며 영적인 문제와 계속 씨름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가톨릭일꾼운동은 이 세상 속에서 ‘선함의 상징’이 되어왔다. 그러나 가톨릭일꾼운동의 사상과 삶의 방식이 보여주는 근본적인 단순성은 참으로 급진적인 사상과 행동의 결합으로서 신앙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며, 신비로 남아있다.

현재 미국과 캐나다, 호주에는 100개가 넘는 가톨릭일꾼운동 공동체들이 있다. 이들은 다양한 이름과 다양한 활동, 다양한 조직을 갖고 있으나 같은 목표와 같은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이 운동은 단체라기보다는 유기체이며, 각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의 능력, 자원, 또 지역의 필요성에 따라 살기 때문에 질서가 부족하고 조직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사랑이 가득 찬 가족적인 공동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면 이 공동체들이 기성사회나 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매일 생활 속에서 증거하며 사는 것이다. 한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충실한 사람들의 이 집단적인 증언은 교회와 세상 속에서 복음적인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Ω

[출처] <참사람되어> 199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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