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까 벌어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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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까 벌어먹을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11.04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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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제육볶음과 텃밭에서 기른 오이고추를 반찬 삼아 점심밥을 먹었다. 이 정도 끼니라면 다행스럽고, 내게 할 일이 남아있으니 그로 족하다. 얼마 전에 내 평생 처음 취업을 위해 면접을 보았는데, 오늘 ‘낙방’을 알리는 연락을 받았다. 가톨릭일꾼운동이 워낙 불안정하다보니, 얼마라도 고정급을 받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타진해 본 것이다. 생계삼을 일을 하면서 일꾼운동을 한다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붙어도 걱정 떨어져도 걱정이긴 했다. 허나 정작 떨어지고 나서 서운하고 조금 우울하다. 그리고 생각한다. 벌어먹지 말고 빌어먹으라는 소린가보다.

그동안 이런저런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후원에 의존해서 운영하는 사회사목 활동단체들이었다. 전부 교회에서 지원받을 길 없는 비공인단체였는데, 이런 빌어먹는 단체에서 일하면 사람이 겸손해진다. 하느님의 자비를 정성껏 보여주는 손길이 고맙고, 목숨을 부지하며 소신껏 일할 수 있는 게 은총이다. 헨리 나웬은 그리스도인을 “안전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투신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하느님나라만큼 애매한 게 없고, 예수님은 길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노잣돈 대신에 돈주머니도 차지 말고 지팡이도 짚지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신던 신발 그대로 가라고 했다. 참 너무하다, 싶다.

서울에서 사회운동을 하다가 전라도 무주에 정착해 만 6년 동안 농사를 지은 적이 있다. 그때 가장 기분 좋은 일은, 손님들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면 내가 줄 것이 있다는 거였다. 봄이면 산기슭을 뒤져서 꺾어 온 고사리가 있고, 늦여름이면 빨갛게 윤이 나는 유기농 고추, 땅콩이며 무와 배추라도 돌아가는 손님의 차편에 실어 보낸다. 벌어먹을 때, 자존감이 높아진다. 우리는 살면서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 기왕이면 기분 좋게 받고, 기분 좋게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겸손도 필요하고 자존감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세상에 빌어먹지 않는 사람은 없다. 농사를 지어도 하늘에 빌어야 수확을 얻을 수 있다. 실컷 벼농사 다 지어놓았는데 태풍이 몰아쳐서 논을 뒤집어엎으면 허사가 된다. 그러니, 하늘에 빌고, 내가 지금 육신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해야 한다. 예전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식당 하는 후배에게 당부한 말씀이 있다. 장일순 선생은 “너나 나나 거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집에 밥 잡수시러 오시는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 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을 해야 혀. 장사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가 없어.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 이 말이야.”

이 생각 하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그래, 빌어먹든 벌어먹든 한 세상이다. 겸손하지만 기분 좋게 일하자고, 마음먹는다. 선한 이들과 더불어 걷는 길이 가장 행복하다. 이들과 일을 하고, 거친 밥이라도 달게 먹자고 생각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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