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은 믿음만큼 거룩하다
상태바
의심은 믿음만큼 거룩하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10.29 10: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봉 칼럼

가톨릭일꾼운동을 해보자고 나선 걸음이지만, 과연 눈에 보이는 뚜렷한 청사진이 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비틀거리며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느 패션모델이 바닥에 선을 그어놓고 곧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일꾼운동의 가장 매력적인 가치가 ‘자발적 가난’이지만, 어디까지 가난해야 끝이 보이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내 삶은 그 잣대 위에서 어디쯤 서 있는 것일까, 늘 의심합니다. 일을 하자면, 생활을 꾸리자면, 오히려 조금 더 수입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현실적인 까닭입니다.

도로시 데이에게 처음 누군가 ‘환대의 집은 어디에?’ 하고 물었을 때, 그녀는 자기 아파트 방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지금 저희에게 누군가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아직, 준비된 게 없다’며 어설픈 웃음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부족하고 갈 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기에, 주변을 다독여 가며 걸어야 하기에, 다행이고 또한 불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정도 발생하고 자잘한 갈등을 빚어지겠지요. 그것도 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이라 여기며, 하루하루 기대하면서 새벽을 맞이합니다. 새롭고 유일한 하루를 시작합니다.

 

Martin Schleske
Martin Schleske

가문비나무의 노래 두 번째 이야기 <바이올린과 순례자>(니케북스, 2018)를 통해 바이올린을 만드는 장인 마틴 슐레스케(Martin Schleske)를 만났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이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믿음에는 의심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 사랑에는 위기가 없어야 하고, 확신에는 불안이, 희망에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모두 내 욕심이라고 타이릅니다. 때로는 아프고 힘든 일이 복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언제나 익숙한 답변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은 묻는 자로 남기 위함이고, 친숙한 지식이 통하지 않는 것은 깨닫는 자로 남기 위함이라 합니다. 그래서 때로 “의심은 믿음만큼 거룩하다.”고 합니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되네요. 그분은 ‘창조적 불안’을 높이 평가하더군요.

“우리의 믿음에 하느님의 존재가 결여될 때, 의심은 거룩한 힘을 발휘합니다. 소중한 의식(ritual)이 사랑 없는 틀에 박힌 의례가 될 때,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종교적 익숙함이 스며들 때, 과정을 통해 배우기를 중단하고 경직된 생각의 집 안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을 때, 믿는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느님을 막아서고 그 결과를 종교라 부를 때, 의심은 거룩한 권위로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불안을 일으키는 의심이 없다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하느님을 잃어버릴 테니까요.”

마틴 슐레스케는 “사랑을 간직하는 한, 의심은 위험하지 않다.”고 합니다. 의심은 진리를 향한 절규이며, 하느님은 이런 아픈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 한, “설령 믿음을 잃어버릴지라도,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일은 절대 없다.”는 그분의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그분은 쉽지만은 않은 세상을 견디게끔 하늘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 음악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공명이 강한 바이올린은 음이 “새로 내린 눈 위를 한 발 한 발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눈이 압축되는 느낌”을 자아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강함과 부드러움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특성이 공존한다고 합니다. 바이올린의 강함과 부드러움처럼, 제 일상에서도 의심과 믿음이 공존하며 삶을 하느님에게로 밀고 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처럼 비틀거리며 가는 인생도 의미 있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좋은 바이올린의 울림은 열정적이면서도 결코 날카롭지 않습니다. 어두우면서도 칙칙하지 않습니다. 거칠지만 저속하지 않습니다. 높은 음에서는 섬세하지만, 절대 얄팍하지 않습니다. 감미롭지만 천박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삶이란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삶에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것처럼 기술이 필요하지요. 삶의 기술(Art of Living)은 마틴 슐레스케가 ‘적절한’ 압력으로 칼을 연마하는 것처럼 섬세한 마음으로 삶을 다루는 것입니다. 날이 무뎌졌다고 연장 자체가 가치를 잃은 것이 아니듯이, 다소 인생이 삐걱거리더라도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힘든 작업이 많아서 날이 무뎌진 칼처럼 버거운 삶에서도 배울 만 한 게 많습니다.

그렇다고 무뎌진 날을 그냥 사용하면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이 빠진 칼날은 나뭇결에 생채기를 냅니다. 이 빠진 날이 나무를 할퀴듯이 우리의 이 빠진 마음도 세상을 할퀴게 됩니다. 그래서 참회가 필요합니다. “참회는 뭉툭해진 연장을 연마하는 일이고, 음정이 어긋난 악기를 조율하는 일이고, 필요한 순간에 우리의 참모습으로 돌이키는 일”이라고 마틴 슐레스케는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복이 되는 도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참에 말하고 싶은 게 더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연장’이라는 것이지요. 그분께서 쓰시는 도구라는 뜻이지요. 그분이 하느님 나라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그 나라를 위해 세상을 깎고 매끄럽게 다듬는 끌도 되고 대패도 되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연장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은 “네가 아니라, 하느님의 어린양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간다.”(요한 1,29)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나를 좀 더 자비롭게 다독거릴 필요가 있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복 받은 인생입니다.

그분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모두를 당신의 ‘일꾼’으로 부르고 계심을 믿습니다. 부족한 채로, 미숙한 채로, 다만 ‘사랑 안에서’ 저희를 부르시는 분에게, 우리는 그저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응답할 뿐입니다. 그리고 만사를 당신 뜻대로 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 길에서 선한 이들을 많이 만나고, 그 덕분에 나도 조금 더 선해지길 바라고 바랍니다. 열정적이면서도 결코 날카롭지 않게, 어두워도 칙칙하지 않게, 거칠어도 저속하지 않게 말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