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생활은 온실 속에서 재배되는 고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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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은 온실 속에서 재배되는 고행이 아니다
  • 토머스 머튼
  • 승인 2019.10.2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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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의 삶과 거룩함/토머스 머튼의 서문

나는 이 책 <삶과 거룩함>을 단순하게 쓰려고 노력했으며, 그리스도교 영성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해 기초적인 수준으로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에게나, 가톨릭 교회의 내적인 생활의 어떤 원칙들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관상”이나 “지적 기도”와 같은 주제들은 여기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가장 보편적인 동시에 가장 신비로운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은총, 우리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의 힘과 빛, 우리의 가슴을 정화시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 우리를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로 만드는 것, 인류의 선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에서 그분의 도구로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행동하는 삶에 적합한 몇 가지 근본적인 주제들에 관한 묵상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하는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확실히 행동하는 삶은 수도자들이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자를 돌보고, 기타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가 있다(“관상 생활”과 대치되는 개념으로서의 “행동하는 삶”이라고 할 때에는 대체로 이런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말하는 행동은 관상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애덕의 표현이자 세례를 통해 맺은 하느님과의 일치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행동적인 삶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사명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성사를 집전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자비의 행위를 펼치는 것일 수도, 사회의 영적 쇄신을 위한 전세계적인 노력에 동참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인류의 존립 자체를 결정짓는 평화와 질서 확립을 위해 노력하는 것일 수도 있다.

봉쇄 수도원의 “관상가”라 할지라도 사회의 위기와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데 그것은 그가 여전히 사회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그는 사회의 혜택을 분배받고 사회에 대한 의무를 공유한다). 그 또한 기도와 거룩함 외에 이해와 관심으로 교회 사업에 어느 정도 “활발하게” 참여해야만 한다.

 

관상 수도원의 경우에도 생산적인 일은 공동체 생활에 필수적이며, 넓게는 사회에 대한 봉사로 볼 수 있다. 관상가들이라도 국가의 경제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역할이 갖는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특히 수도원이 피정 기간 동안 사람들에게 쉴 곳과 성찰이라는 “봉사”-매우 중요한 봉사임에 틀림없는-를 제공할 경우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미 이 책이 관상가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다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행동하는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만 말하겠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며 가시적인 교회의 권위와 일치하면서, 인류 사회 전체의 영적이고 물질적인 발전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삶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교 활동에 적합한 특정한 기법들을 다루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타당한 그리스도교 활동의 원천이 되는 은총의 삶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포도나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잎이나 과일이 아닌 뿌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행동적인 삶을 다루면서 힘, 의지, 활동 자체 보다 은총과 내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는가? 왜냐하면 은총과 정신이야말로 초자연적인 활동의 진정한 원칙들이기 때문이다. 광기와 인간 야망의 충동으로 인한 활동은 망상이며 은총에 장애가 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장애가 되며, 문제를 풀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킬 뿐이다. 우리는 행동주의라는 거짓 영성과 성령의 인도를 받은 그리스도교적 행동의 진정한 활력과 힘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모든 행동이 영적 생활에 위험하다고 섣불리 판단하여 그리스도인다운 삶에서 어떤 분리를 가져와서도 안될 것이다. 영적 생활은 외부와 동떨어진 고요한 삶도 아니고, 온실에서 재배되듯 인공적으로 꾸며진 고행을 실천하는, 평범한 삶을 사는 일반인들은 감히 접근조차 어려운 생활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일상적인 의무와 노동 속에서 하느님과 영적인 일치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원칙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 생활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나 설교자는 그들의 말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십상이다. 정상적이고 건강하며 인간적인 배경 속에서의 노동, 건전하고 온건하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는 노동 활동, 생산적인 사회 분위기와 통합되는 노동은 그 자체로 영적인 삶에 많은 공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질서하고, 비이성적이며, 비생산적이고, 권력과 부를 쫓기 위해 피곤한 광기와 낭비로 얼룩져 버린 세계적인 투쟁에 휩쓸린 노동은 거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영적인 삶에 효과적인 공헌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노동의 성격과 그 자리를 고려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 책에서는 그 주제에 관해 몇 장을 할애하고 있으나 완벽하게 다루지는 못했다. 논쟁이 될만한 분야나 명확치 못한 부분은 완전히 제외되었다. 나는 개개인의 일상적인 노동이야말로 영적인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노동이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에 도움이 되려면 그리스도인들이 그 노동을 정신적으로나 주관적인 노력에 의해 하느님께 바쳐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려는 그리스도교 전체의 노력에 그 노동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것을 간단하게 언급함으로써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노동은 정직하고 올바를 뿐 아니라 생산적이어야 하며 동시에 인류 공동체에 긍정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평화롭고 질서 정연한 문명을 세우려는 인류의 보편적인 노력에 한 부분이 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다가오는 세상을 맞을 준비를 하도록 가장 잘 도와준다.

거룩함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노력은(그리고 성스러움을 위한 노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다) 또한 새로운 세기의 문턱에서 교회의 행동과 맥락을 같이 해야 한다. 우리는 사라져버린 과거로 후퇴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거룩함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도 동료 인간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올바르고 생산적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사명을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교종 요한 23세는 1962년 10월 11일 다음과 같은 강력한 어조로 바티칸 공의회의 개회를 알렸다: “현재의 질서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를 새로운 질서의 인간관계로 이끌고 있으며 그 질서는 사람의 노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예상을 능가하여 하느님의 초월적이고 측량할 수 없는 계획의 완성을 향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교적 거룩함은 무엇보다 우리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에 동참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의무를 깨닫는데 있다. 이 깨달음은 거룩한 은총에 의해 빛을 받고 관대한 노력으로 강화되며 교회의 권위뿐만 아니라 인류의 현세적이며 영적인 선익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의 협조가 없는 한 한낱 허상에 불과할 것이다.

 

[원문출처] <Life and Holiness>, 토머스 머튼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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