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처음부터 촛불을 볼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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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처음부터 촛불을 볼 생각이 없었다
  • 유대칠
  • 승인 2019.10.2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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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의 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45]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그들은 그들의 편이다. 어쩌면 그들이 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지 모른다. 상식이니 양심이니 이런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그냥 그들은 그들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살았다. 심지어 별 일 없이 조용하게 하지만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살아왔지만 ‘정의를 세우는 사람’이니 ‘공정을 추구하는 사람’이니 또한 공부를 잘해서 시험을 통과한 ‘우수한 사람’이니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 높임 속에서 그들은 한 없이 스스로를 높이 보고 자신들을 높인 이들을 한 없이 낮게 보게 되었다. 과연 수백만 수천만의 촛불이 거리에 나온다고 그들의 눈에 그 빛이 보일까? 그 빛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왜 빛을 내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더 솔직하게는 그 뜻도 까닭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볼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살아왔다. 공부를 잘 한 것도 맞고 그 능력으로 시험을 잘 통과한 것도 맞다. 그런데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공부를 한 까닭 말이다. 그들이 공부한 까닭은 단순하다. ‘앎’과 ‘슬기’ 따위가 아니다. 바로 승리다. 이기기 위해서다. 승자가 되기 위해서다. 그 승자의 이름으로 약자 위에 서기 위해서다. 도덕, 그런 것은 시험 과목으로 있을 때만 유의미할 뿐이다. 삶 속에 도덕은 그저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이겨야 하고 누려야 한다. 그것뿐인 이들이다.

내란세력이 나라를 전복하야도 그들은 그들의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나면 된다. 과거 나라가 남의 나라의 것으로 있을 때도 그렇게 잘 살아왔다. 독재자의 폭압 앞에서도 손잡고 함께 즐거운 잔치의 시간을 보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겁나지 않는다. 도덕성을 문제 삼으면 너희도 결국 정도의 차이일 뿐, 나와 같은 놈들이란 식으로 몰아가면 그만이다. 그들이 만든 관습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린 것도 있으니 말이다. 바로 그것조차 그들에겐 자신들을 지키는 수단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를 한 번 돌아보자. 그들의 그 더러움이 우리 삶 속에도 어쩌면 일상이 된 것은 아닐까? 나는 너희보다 더 시험공부를 많이 해서 정규직으로 들어왔다. 너희는 나보다 공부도 못했고 시험을 본 것도 아니니, 그냥 그렇게 비정규직으로 살아라! 이런 슬픈 생각 속에도 어쩌면 나는 너희를 이긴 존재이니 마땅히 그 대접을 받으며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비정규직의 아픔이나 그 부당함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보다 그저 “내가 이 싸움의 승자다”라는 생각만 우선되고 강한 것은 아닐까?

그냥 한번 돌아보게 된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 한다. 혹시 승자가 되어 너도 그들의 편이 되어 살아라는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와 같이 그들에게서 멀어져 살지 말고 그들의 편이 되어 그들 속에서 승리자로 나와 같은 이들 위에 서서 마구잡이로 자유롭게 살라는 말이 아닐까?

한 검사는 말도 되지 않는 부당함을 후배 검사 앞에서 하는 선배 검사를 보면서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또 누군가는 바로 자신의 자식이 바로 그런 마구잡이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승자가 되라고 말이다. 우리의 그런 욕구가 그들을 더 당당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너희들이 그렇게 되고 싶고 욕심내는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있다. 이 패배자들아!” 이런 마음으로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결국 이 많은 학원과 이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봐라! 너희도 나와 같은 승자가 되고 싶고, 나름의 자리에서 독점하는 그 누림을 더 즐기고 싶은 것이 아니냐!” 이런 마음으로 말이다.

교수라는 이들이 자식을 논문 저자로 올리는 세상이다. 결국 대입을 위해서다. 승자로 만들기 위해서다. 과학고를 가도 결국 의사를 하고 싶어 하고, 돈을 더 벌어서 승자가 되고 싶어 한다. 외국어고를 가도 결국 그 마음 속에선 “나는 너희와 다른 공간을 다니는 사람이고 승자가 되고 싶은 이 싸움에서 너희를 이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과연 없을까? 자사고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세상에서 결국 승자의 자리에 선 그들은 모두의 부러움 속에서 그 마구잡이식 자유를 누렸다. 너무나 당당히 말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독재의 시기에도 그리고 지금도 말이다. 누군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도, 누군가의 가족이 차가운 바다 속으로 사라져가도, 누군가는 죄 없이 간첩으로 고난의 시간을 살아갔어도 그들은 그냥 그렇게 그들의 편에서 그들끼리 지금도 잘 살고 있다.

이제 그 추악한 당당함을 부러워하지 말자. 그리고 승자가 되기 위해,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살아가지 말자. 결국 그들은 그런 논리 속에서 쉼 없이 만들어질 뿐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아름답다 하셨다. 사실 어쩌면 이 세상은 빛의 공간이다. 단지 눈을 감고 있으니 희망이 옆에 있어도 모를지 모른다. 눈을 뜨고 현실을 보자. 어쩌면 가장 긴급한 첫 시작은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고, 그들과 같은 자녀를 강요를 하지 않는 것이며, 그들에게 준엄하게 이 사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지 우리가 빌러준 힘으로 맘대로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곳이 아님을 꾸짖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절대로 그들의 그 추악한 모습을 부러워하지 말자. 눈을 뜨고 잘 보자. 더러움을 부러워하는 곳에서 더러움은 이것이 기준이라면 모두를 더럽게 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자. 결국 이 모든 더러운 현실의 희망, 그 희망의 주체, 희망의 현실화, 그 시작은 바로 이 더러움으로 분노하는 ‘나’라는 것을 말이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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