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반댓말: 슬픔 아닌 무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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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반댓말: 슬픔 아닌 무감각
  • 로버트 엘스버그
  • 승인 2019.10.2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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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엘스버그의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깨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기 (1)

당신께 간청합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깨어있게 하소서.
- 트뮤이스의 세라피온

나의 주님, 생명의 주님이시여, 저의 뿌리에 비를 보내주소서.
- 제라드 맨리 홉킨스

삶의 슬픔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슬픔은 행복의 반대가 아니다. 적어도 슬픔 속에서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주 문제는 실상 슬픔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실존에 따라다니는 죽음과 같은 상태, 생기 없음, 무감각의 상태이다. 세상의 속도와 압력, “생존을 위한” 투쟁, 끝없는 광고로 야기되는 불안함, 소비문화의 산만함과 소음­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피곤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모든 것에 무감각한 상태를 가져온다. 우리의 신체들은 아마 이 모든 것을 견디며 살아 남을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세대도 오늘날과 같은 긴 수명이나 건강상태를 누린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병은 어쩔 것인가.

우리는 통근하는 열차 속에서 혹은 쇼핑가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이 병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거울에 비쳐지는 우리의 얼굴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교회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이 병은 보인다. 종교 자체는 이러한 무기력, 생기 없음에 대해 특별한 면역체를 주지 못한다. 특히 종교생활이 단순히 또 다른 수행과제나 복종해야 할 일련의 규칙들에 불과할 때에는 더욱 무력한 것이다.

돌보는 양떼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고 또한 풍성하게 얻기 위하여 왔다.”

생명이 풍성한 삶이라는 표현은 행복의 의미를 정의해 주는 한가지 길이다. 그것은 메마르고 속이 빈 삶에 대한 해독제 같은 역할을 해 준다. 공허한 삶은 우리의 “즐거움과 갈망들”에 대한 기억마저 둔하게 만든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러한 약속을 죽음 저편에서야 실현되는 것으로 바꿔치기 했으며, 현재에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도전과 노력들을 무시해 왔다. 초기 사막의 교부들 중 한 사람인 테오파니스 수도승은 “현재 세계에서 생명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내세에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당신 자신을 기만하지 마라”고 경고하였다.

2세기의 주교이며 신학자인 이레네우스 성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존재가 충만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이레네우스는 세상 안의 물질적 실존을 경멸하는 영성에 반대하기 위하여 이런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삶을 일이나 쾌락 혹은 내세주의적 영성으로 축소시키고 안주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전을 준다. 충만하고 온전하게 살도록 우리는 창조되었다. 성인들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그리스도는 이 목표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길을 잃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생명이 넘치는 삶에 대한 끌림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분명히 단순하게 먹고 숨쉬는 것이 아니다. 또한 미친 듯이 행동에 들떠있는 소란스러움도 아니다.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자아의 가장 깊은 부분을 살아내는 것이다.

자아의 가장 깊은 부분을 마음이나 영혼이라고 부른다. 마음이나 영혼은 우리 존재의 중심적이며 내밀한 핵심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음과 산만함을 볼 때, 그러한 부분이나 자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매우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저 표면을 미끄러지듯 살고 있다.

우리는 신문이나 이웃, 혹은 TV 광고로부터 우리의 역할을 받는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며, 무엇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인지 말해 준다. 그러나 그 소리들에 더 귀를 기울일수록 우리는 자신들에 대해 더 알 수 없게 된다. 행복이 그렇게나 잡히지 않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성인들이라고 불리는 남녀들은 다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다. 그 길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었으며, 또한 동시에 그들의 진정한 자아에 도달하는 길이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막대하다. 하지만 안내자로서, 스승으로서, 그들의 권위는 자주 그들에게서 분명하게 보이는 “다름”이라는 그림자 속에 묻혀버린다. 이 다름은 보통사람들에게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지고 매력을 별로 주지 않는다.

이처럼 성인들은 완전한 사람들로서 “우리와 같지 않은” 존재들이라고 여겨진다. 성인들의 전통적인 이야기들은 이런 모습을 더 강화시킨다. 그들에게서 인간적인 부분들을 말소시키고 기적이나 내세적인 흔적들을 강조하기 일쑤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다른 의미를 전해준다. 그는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의 맛을 음미했고, 매우 드문 신선한 빵을 즐겼다. 그는 바닷가의 물결치는 파도를 즐겨 바라보았고, 토요일 오후에는 라디오방송의 오페라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토마스 머튼은 성인다움이란 보다 더 풍요로운 인간이 되어 가는 문제라고 보았다. 이것은 “관심을 가지는 것, 고통과 이해, 공감에 대한 능력, 또한 웃음과 재치, 즐거움의 능력, 삶의 선함과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우리는 이러한 특징들을 근대의 성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마더 데레사, 요한23세, 달라이 라마­. 이 분들은 존재의 담백함을 풍긴다. 앗씨시의 프란치스꼬, 아빌라의 대데레사에게서도 생명의 현존, 풍성한 생명력을 맛 볼 수 있다.

깨어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

그렇다면 무기력의 진흙수렁에 빠져 있는 우리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아마도 막연한 불만족, “삶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더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 어떤 불안감으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문화는 이미 대답을 갖고 있다: 삶에는 무언가 더 있다. 그것도 무한하게 더 있다­더 많은 물건들, 더 많은 쾌락, 더 많은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과 기분전환 꺼리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증을 채워 줄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닫고 또한 우리의 불안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 때에 탐구가 시작된다. 탐구는 우리가 삶의 일상 속에 가라앉지 않는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탐구의 가능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 같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는 것은 곧 절망에 빠지는 것과 같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깨어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온전히 깨어있는 사람을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고 썼다. 그는 “의식을 갖고 숙고하며 살아가는 것, 삶의 기본적인 사실만 직면하는 것, 그리고 삶이 가르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그래서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내가 살아있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막과 같은 뉴잉글랜드에 한동안 칩거하였다.

 

로버트 엘스버그 /1955년 미국 잭슨빌에서 태어났다. 존재의 의미와 참된 삶에 이르는 길을 찾던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다니다 2학년을 마치고 1975년 도로시 데이와 함께 5년 동안 일했다. <가톨릭일꾼> 신문 편집장으로 활동하다 1980년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모교로 돌아가 종교와 문학을 공부한 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변화된 가톨릭교회 모습을 체험했다. 도로시 데이의 작품집을 냈으며 하버드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1학년을 가르쳤다. 1987년 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메리놀 수도회 Orbis 출판사 편집장이 되었다. 지은 책으로 <모든 성인들>과 <모든 여인 가운데 복되도다> 등이 있다. 도로시 데이 시성식 추진위원회와 헨리 나웬 재단 위원이며, 현재 세 자녀와 함께 뉴욕 주 오시닝에 살고 있다.

이 글은 2003년, 미국 메리놀 출판사가 발간한 <The Saints' Guide to Happiness>(Robert Ellsberg)를 <참사람되어> 2005년 3월호에서 편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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