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이 복음을 만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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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이 복음을 만날 때
  • 이송민
  • 승인 2019.10.2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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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톨릭일꾼에서 여러 번 했던 얘기를 다시 처음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가톨릭일꾼을 알기 전부터 의정부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고 있었어요. 자본주의의 그 치열한 현장에서 일을 하다보니까 되게 힘들었어요. 제가 그때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실린 박정은 소피아 수녀님에 관한 기사를 읽고, 세상에 이런 신문도 있네, 하다가 한상봉 편집장님을 만나게 되었죠. 그분의 글을 읽다보니까 제가 정말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어요.

저희 집 식구들은 굉장히 보수적인 성향이었죠. 가족끼리는 똘똘 뭉치는데, 딱 그 전형적인 중산층 모습을 못 벗어나는 시각을 갖고 있었던 거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향이 비슷했고요. 그런데 성당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눈을 뜨게 되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사를 읽으면서, 제 삶의 지평이 점점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낯선 것,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굉장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그동안 내가 좁은 식견으로 그 틀 안에서만 살아왔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죠. <인간극장>에서 민들레국수집을 하시는 서영남 선생님을 본 적이 있는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다시 그분의 글을 접하면서, 이런 세상,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던 거죠. 당시엔 뭐든 내가 모르던 세상을 마구 흡수하던 때였습니다.

이후 가톨릭일꾼에 와서 미사도 드리고, 세미나도 참석하고, 교육을 받다보니까 어느 새 제가 꽤 많이 성장했더라고요. 서울대교구에는 교육도 많고 배울 기회도 많지만, 의정부교구는 사정이 좀 달라요, 공부하는 문화도 낯설고, 본당을 벗어나면 뭐 제대로 배우기가 쉽지 않아요. 가톨릭일꾼 교육이 처음엔 강의도 어렵고 했지만, 자꾸 듣다보니 생각이 깊어지고 이해할만한 내용도 많아지더군요.

 

가톨릭일꾼 오픈닝 미사(1916.5.15)
가톨릭일꾼 오픈닝 미사(2016.5.15)

 

성가대 회보로 전한 복음

2018년 4월에 본당에서 성가대 단장이 됐어요. 우리 단원들 수준이 저랑 똑같아요. 사회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성당에서 미사보고 노래 부르고 술 마시고 밥 먹고, 그게 땡이죠. 겉으로 보면 다들 좋은 사람들이고 착실한 신자들인데, 정작 성경에서 말하는 본질적인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우리끼리는 서로 밥 사주고 좋은 사람들인데, 딱 거기까지죠. 우리 울타리 바깥에 있는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거죠. 가톨릭신자라면 당연히 가난한 분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교회가 가르치지만, 그런 인식조차 없는 게 사실입니다.

저는 가톨릭일꾼에 와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는, 교회는 뭐라고 가르치고 있는지, 정말 ‘복음’이란 게 뭔지 배웠어요. 알고 나니 이렇게 좋은 걸 나만 알고 있으면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단장이 되자마자, ‘나도 <가톨릭일꾼> 신문처럼 성가대 회보를 하나 만들어야지’ 생각했어요. <매일미사>에 나오는 내용뿐 아니라, 회보를 편집하면서 사이사이에 가톨릭일꾼에서 추천하는 시를 넣기도 하고, 한상봉 선생님이 <가톨릭일꾼> 신문에 쓰신 글을 싣기도 했어요. 다음에 김선애 자매님, 이정화 자매님 등 다른 언니들이 썼던 글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처음이 힘든 거죠

한 가지 더 극적인 경우가 있어요. <가톨릭일꾼> 신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을 읽은 적이 있었죠. 교황님께서 말씀하시길, 노숙인들에게 그냥 돈만 던져주지 말고, 그 사람 눈을 보면서 주라는 거였죠. 이 기사를 성가대 회보에 옮겨 싣고서는, 왠지 나도 그렇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회보에 이런 기사를 덜렁 실어놓고, 저도 그러지 못하면서 성가대 단원들한테 읽어보라고 던져주는 게 민망했던 거지요.

의정부역에도 노숙인이 계세요. 그래서 어느 날 정말 그 말씀대로 해보려고 제가 딱 돈을 준비해 갖고 나갔어요. 막상 가서는 너무 창피한 거예요. 저는 바구니에 돈을 넣는 행위조차 남이 의식되고, 처음에는 그래도 용기를 내서 사람이 좀 뜸할 때 갔어요. 보통 그 노숙자 분들은 엎드려 있거나 무릎 꿇고 고개를 숙여요. 얼굴을 안 들더라고요. 가서 그 분 손을 제가 잡았어요. 잡아서 거기다 제가 만 원을 집어주고 “이걸로 식사하세요.” 그러곤 정말 도망치듯 나왔어요. 나왔는데, 한 번 할 때는 부끄러웠는데, 두 번 세 번을 하니까 이제는 그 사람의 체온도 알겠고, 그 사람 느낌도 알겠더라고요.

아, 어떤 행동이 처음에는 낯설고 되게 창피해요. 그런데 반복을 하면, 어? 내가 이렇게 느낌이 다르구나 하는 경험을 했어요. 그래서 이런 것을 나만 알면 안 되겠다 싶어 집에 가서 동생한테 얘기했더니, 동생이 자기도 노숙자 아저씨한테 가서 바구니에 돈 넣고 손잡고 밥 드시라고 했다는 거예요. 제가 처음에 노숙인을 만날 때 조카가 있었는데, 그 다음부턴 제가 그냥 노숙인을 지나치면 조카가 “이모, 저기 돈 드려야지.” 이래요.

 

좋은 일은 좋은 일을 부른다

가톨릭일꾼세미나에서 만난 이덕숙 포티나를 만난 것도 참 축복이었다 생각해요. 그분은 의정부에서 ‘느티나무 공부방’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사실 공부방이란 것 자체를 몰랐어요. 거기도 비영리집단이고 정부지원 없이 하시는 것인데, 마침 저희 집 근처라서 공부방에 찾아가 보았는데, 상황이 좀 열악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여기 와서 청소봉사라도 해야겠다 생각했는데, 허리디스크 때문에 못 도와줬어요.

그 후 포티나 씨와 함께 공부방 하는 이정섭 씨를 저희 성가대 단원으로 초대를 했어요. 그런데 이정섭 씨는 부끄럼이 많아서 좋은 글이 많이 실린 공부방 회보도 우리 단원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성가대에서 노래만 부르고 가세요. 그래서 제가 공부방 회보를 복사해서 단원들한테 나눠줬어요. 회보를 보고서야 단원들 가운데 몇몇 분이 ‘여기 후원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더군요. 지금은 저희 지휘자님이랑 반주자님도 공부방에 후원하세요. 그때 알았죠. 다른 분들도 몰라서 그렇지, 알면 다들 선의를 베풀 마음이 있다는 것을.

한 가지 좋은 일을 하면, 다른 좋은 일이 줄지어 우리 앞에 나타나는 모양입니다. 공부방 이야기를 성가대가 속한 전례분과에도 알렸는데, 저희 본당 연령회장님께서 저를 부르시는 겁니다. 원래 사진기자 생활을 오래하셨던 분인데, 토요일에 어디를 가자고 해요. 따라 갔더니 파주 외진 곳에 ‘소망의 집’이라는 2층 건물이 있더군요. 거기가 출소자들의 쉼터래요. 그분은 예전부터 출소자들을 위해 봉사를 했고, 2015년에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지어, 지금은 무연고 출소자 열여덟 분과 더불어 사신데요. 이 이야기를 듣고 저희 성가대원들한테 이야기해서 다음에 방문하기로 했어요.

가장 잘하는 일을 통해 세상으로

이런 일을 겪으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이 있어요. 가톨릭일꾼들이 시국미사에도 가고, 강남역 김용희 씨 농성장에도 가는데, 거리상 건강상 저는 가기가 좀 버겁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내가 내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생각했더니, 저는 누구한테 소개를 잘 하더라고요. 제 직업이 원래 중개업이잖아요. 제가 마음에 드는 옷가게 있으면 제 친구들 다 데리고 가요. 그래서 지금 느티나무 공부방도 그렇고, 나는 이런 역할을 해야 되겠다, 홍보하고 알리는 역할을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아직 임시사무실이지만, 서울의 엣꿈에 자리 잡은 가톨릭일꾼이 본점이라면, 나는 지점이다, 생각해요. 그러면 본점에 가서 열심히 교육받고, 시간 날 때마다, 그리고 이렇게 선하신 분들의 행동을 내가 보고 익히면서, 꾸준히 수혈을 받아서 우리 지점에다가 뿌려야겠다,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하는 일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지요.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을 통해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이제 대충 가톨릭일꾼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아요. 

 

이송민 소피아
가톨릭일꾼
의정부교구 심곡2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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