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누구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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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구시더라?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10.1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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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전라도 어느 암자에서 빠짐없이 하루 세 번 정갈하게 마당을 쓸며 살았다는 어떤 늙은 싸리비보살 이야기. 그 정성이 대단하지만, 더 눈에 뜨이는 것은 하루이틀 암자에 머문 사람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라며 아침인사를 할라치면 보살은 빗자루질 하다말고 틀니를 덜그럭거리며 생전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처럼 “누구시더라?”로 인사를 받곤 했다. 아침에 만난 사람도 낮에 보면 “누구시더라?”, 낮에 이름을 댄 사람을 저녁에 만나면 또 “누구시더라?”다. “낮에 인사드렸잖아요. 저 아무개 아무개요.” 그러면 보살은 아이처럼 웃으며 “아, 그랬나요?” 했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되묻기를 “누구시더라?”

인문학자 도정일은 산문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문학동네, 2014) 안에 이 이야기를 담아두었다. 도정일은 ‘너는 누구인지?’ 되묻는 보살에게서 ‘도정일’이라는 이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사코 “자기를 자기라고 조석으로 우기는 나”의 어리석음을 꼬집는다. 내 이름은 그저 어쩌지 못해 편의상 부르는 것일 뿐, 나는 나보다 더 큰 무엇인가에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참된 나’가 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summitdominicans.org
사진출처=summitdominicans.org

하느님 없이 ‘나’란 무엇인가? 그분의 현존 바깥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이 ‘사랑 그 자체’라면 나는 그 사랑 안에 정성껏 머물고, 그분 사랑이 나를 통해 정성껏 사방에 흘러넘칠 때 나는 비로소 ‘사랑인 나’가 된다. 이럴 때 그분께서 “누구시더라?” 물으면 “접니다, 주님.” 말할 수 있다.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그분이 알고 내가 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종교가 뭔지?” 누가 물으면 우리는 너무 쉽게 “성당에 다녀요.”라고 답한다. 성당에 다니면서 단체활동을 하거나 본당행사에 참여하면서, 이따금 묵주기도 정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독실한 신앙인’이 되는 것일까. 생애를 걸만한 복음적 가치는 없는지 따져봐야 신앙인이지 않을까.

붓다도 공자도 존경스럽지만,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다가 실패자로 권력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자면, 그분이 왜 그리 사셨는지, 그분이 왜 그렇게 참혹한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는지 알아야 한다.

단적으로 그분은 주변부 인생으로 사셨고, 그런 이들을 위해 일하다 죽임을 당하셨다. 여기서 나도 그분처럼 살고 죽을 마음이 있는지 묻는다. 누군가 “누구시더라?” 묻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이미 천국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글은 수원교구 주보 10월 13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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