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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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 한상봉
  • 승인 2019.10.08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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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오늘 예수-3

"세례를 베푸는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였다.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주민)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로 나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물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그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굳건한 분이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허리를) 꾸부려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마르 1,2-8)

아이 성화에 못 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 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 있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한다

관계라니,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송경동 시인의 ‘수조 앞에서’입니다. 중국의 혁명가였던 덩샤오핑은 “모두가 가난해지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중국 사람이 함께 잘 살기 위해서 “일부가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인정해 가난한 사람이 따라 배우게 해야 한다”는 선부론(先富論)을 내세웠답니다. 예전에 혁명을 하면서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거나 “한솥밥을 먹어야 한다.”고 말하던 ‘가난에 기초한 평등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지요. 그래서 지금 중국은 예전보다 잘살게 되었으니 다행이지만, 자본주의 나라만큼 치열한 경쟁과 남루한 중생들이 많아졌으니 불행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강수돌 교수의 강연을 들었는데, 그는 “우리가 보통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보다 마음이 풍요로와야 한다고 말하는데, 성경에선 마음마저 가난해야 한다고 하니 더욱 큰 깨우침이 있었다.”고 말하더군요. 이어 이렇게 묻더군요. “1960년대 초반에 비해 지금 경제가 250배 정도 발전했는데, 여러분은 25배 정도라도 더 행복해지셨나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지도자가 나와서 그동안 고생했다고, 이제 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영화 보고 쉬면서 행복하게 살자고 하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정부가 덜 생산하고 더 소박하게 사는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면서 유기농을 살리고, 마을을 살려서 스스로 식의주 교육 문화를 성장시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거지요. 그때 그 분이 한 말씀이 ‘평등한 가난’입니다. 평등한 가난을 감당한 자신이 없으면, 수조 안의 열대어처럼 되어야 하겠지요. 스무 마리 가운데 여덟 마리를 해치우고 남은 열두 마리끼리 평온한 저녁을 보내야 하겠지요. 그러나 열두 마리의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예언자란 이 진실을 투명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투명하게 보이는 부당한 세상을 그대로 견딜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던 곳은 요르단 강입니다. 요르단 강은 갈릴래아호수와 사해 사이에 흐르던 강입니다. 그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며 사람들에게 생명을 선택할 것인지 죽음을 선택할 것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낚아 올릴 수 있었지만, 사해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 요르단 강은 봄철마다 범람해서 물줄기가 바뀌고, 거센 급류는 진흙과 나뭇가지와 온갖 쓰레기들을 한꺼번에 휩쓸어가곤 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강폭이 넓고 얕은 곳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요르단 강 세례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요르단 강 세례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요르단 강 세례터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요르단 강 세례터

요한은 요하난, 요카나온이라고 부르는데, ‘야훼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이 흔한 이름을 가진 세례자는 본래 아비야조에 속한 하급사제 즈카리야의 아들이었습니다. 유다의 사제들은 모두 24조로 나뉘어 유다와 갈릴래아 전역에서 성소를 돌보았지만, 교대로 희생제사를 집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불려가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자기 고장에서 난 농산물로 십일조를 거두어 생계를 도와야 했지만, 농부들이 선뜻 곡물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가난했습니다. 게다가 중앙성소인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고위사제들은 순전히 제 몫을 챙기는 데만 마음을 썼지요.

흔히 ‘사두가이파’라고 부르는 이 고위사제들은 평판이 아주 나빴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살면서 그리스 물이 잔뜩 들어 그리스풍의 옷을 입고 겉치레를 하며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도, 하느님을 내세워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을 누렸지요. 그 바람에 하급사제들마저 농민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니 하급사제들이 고위사제들을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입니다. 

게다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영원한 삶에 대한 민간신앙을 비웃고, 이승의 삶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지혜롭고 영예롭게 자신의 일을 처리한다면 현세에서 부와 존경을 보상받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물질적 성공이 곧 하느님의 율법을 잘 지킨 증거라고 떠벌이곤 했지요.

요한은 스스로 대물림하던 사제직과 단절을 선언한 사람입니다. 사제가 된다손 치더라도 바로 사두가이파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성전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종교적 경제적 연결고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느님 편에만 서기로 작심한 것이지요. 그래서 루카복음에서는 요한을 두고 “그는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며 이미 제 어머니 태내에서 성령으로 가득찰 터이니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로 돌아서게 할 것입니다.”(루카 1,15-16)라고 전했습니다.

요한은 사제가 아니라 “가죽으로 아랫도리를 가리고 몸에는 털옷을 걸친”(2열왕 1,8) 엘리야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르코복음은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허리띠는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유목민들은 전통적으로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허리띠를 동여맸다고 합니다. 허리띠를 풀고 모자를 벗는 것은 누군가에게 예속되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 안에서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그도 허리에 끈을 동여매고 광야에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외치듯이 말입니다.

요한은 하느님 앞에서 그 어떤 특권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숱하게 많은 자칭 예언자들이 나타나 식민지 유다 백성들에게 다가온 ‘다윗의 나라’를 선포하고 로마제국의 끝장을 예언했지만, 요한은 오히려 청중들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지요. 유다인들은 지금 닥친 불행의 원인을 이방인과 이교도, 지배자들에게 돌렸지만, 요한은 ‘유다인’이라는 사실이 어떤 특권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엄숙히 선포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너희끼리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신다’는 말은 아예 할 생각도 말아라. 사실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하느님은 이 돌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일으키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9-10; 루카 3,8)

자크 뒤켄의 <예수>(바오로딸출판사)에 따르면, 요한이 유다종교의 기득권에 도전한 가장 사건은 세례행위 그 자체였답니다. 요한은 단 한 번 죄를 고백하고 침례를 받고나면 완전히 구원받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일을 요한은 대가없이 공공연히 요르단 강에서 행했습니다. 그러니 수많은 이들이 그곳으로 몰려가 죄를 고백했던 거지요. 이것은 성전세력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 굳이 성전에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봉헌물도 필요 없고 사제들에게 세금을 낼 필요도 없고요. 다만 진정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서 세례를 받으면 그만입니다. 두둑한 복채가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것이지요. 그러니 성전을 빌미로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던 성전세력인 사제들이 환장할 노릇이었겠지요. 그래서 요한이 고와보일 리 없었겠지요.

그뿐입니까? 요한은 스스로 성전세력과 단절하기 위해 사제직을 계승하지 않았을 뿐더러 유다인의 보편적 특권도, 사제들의 종교적 특권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의 예언자적 특권도 마다했습니다. 예수조차도 요한을 두고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9-11; 루카 7,26-28)고 말했죠.

그런데 요한은 자신의 모든 권한을 예수에게 내어줄 태세입니다. 예수가 요한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이고 보면, 요한이 “나보다 더 굳건한 분이 내 뒤에 오신다.”고 말하거나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발상입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물로 세례를 베푼 요한에게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예수가 등장한 것입니다. 혁명의 열매를 따먹지 않는 세례자에게서 자신의 육신마저 밥으로 내어준 예수가 태어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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