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초대받은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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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초대받은 아기
  • 한상봉
  • 승인 2019.09.23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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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8

게으른 농부가 겨우내 밭에 나가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날 뒷집 처자가 우리 마늘밭을 들러보고 마늘이 꽤 자랐다고 일러주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나가 보았다. 마늘을 덮어두었던 볏짚을 들추어보니 과연 마늘싹이 돋아 손가락 두 마디쯤 솟아 있었다. 그동안 땔감을 해오고 장작을 패면서도 봄이 가까이 오는 걸 생각하면 두 가지 감정이 항상 서로 엇갈렸다. 따뜻한 봄기운이 퍼지면 땔감 걱정도 없어지겠지. 산중에서도 그만큼 땔감 마련이 힘겹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이제 농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섰다.

작년에야 첫 농사였던만큼 정신차릴 틈도 없이 일하기에 바빠 걱정할 겨를도 없었다. 사오월에는 해뜨면 밭에 나가고 해지면 괭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에는 <산림경제>며 <무농약 텃밭채소 기르기> 등의 책을 뒤지며 작물마다 농사짓는 방법을 익혀야 했다. 손을 많이 쓰는 노동이고 보니, 잠자리에 들 적엔 손가락 마디마디가 내내 저려서 주무르며 잠을 청했다. 게다가 가뭄이 길어서 물을 대느라 진땀을 뺐다. 그런데 막상 겨울 동안 잠을 자던 마늘 싹이 파랗게 올라온 것을 보니 자못 신기하기도 하고 흙에 대한 친근한 정이 덩달아 몸에 감긴다. 이제 감자밭부터 갈고 이랑을 만들어 올 농사를 시작할 참이다.

 

한상봉 앨범사진 다시 보며.
한상봉 앨범사진 다시 보며.

이즈막에 땅에 돋아나는 새순은 죄다 약이 되고 버릴 게 없다고 한다. 갓 싹을 틔운 어린 쑥을 뜯고, 냉이를 캐어 차린 밥상을 받는 기쁨은 그렇게 시작된다. 따뜻하고 그만큼 생기(生氣)가 산중에 가득하다. 이번 겨울을 지나면서 우리집에 손님도 한 분 늘었다.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식농사’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작물을 보살피듯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오신 아기에게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편히 집에 모시고, 건강한 육신과 맑은 영혼으로 세상에 나아가도록 다독거리고 더불어 성장해야 할 것이다. 아기의 몸은 새것이어서 그런지 투명하다 싶을 정도로 하얗고, 욕구는 단순명쾌하다. 군더더기나 변명이 없이 그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부모의 응답을 기다린다. 그걸 보고 천진난만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기를 받으며, 마늘 새순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아기는 아직 말을 주고받을 만큼 자라지도 않았고 마늘은 장에 내다 팔 만큼 크지도 많지도 않지만, 왜 나의 마음이 이리도 뛰노는가. 그들이 나의 걱정거리를 다 갖고 가는가? 그렇지 않다. 마늘은 볏짚을 걷어내고 수확이 끝날 때까지 더 세심하게 돌보아야 소출을 낼 것이다. 아기가 생기면서 우리는 밤잠을 설치고 있지 않은가.

아기가 태어나면 우주가 아기를 중심으로 돈다는 말은 옳다. 살림의 대부분이 아기를 중심으로 다시 놓여졌다. 방에서 제일 비중있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책장도 마루로 나가고, 재래식 방문을 여닫을 때도 삐걱이지 않도록 조심조심이다. 손이 많이 가는 밭농사는 줄이고, 그래서 여유있는 논농사를 늘이기로 한 결정도 이 아기의 출산과 무관하지 않다. 아기 역시 우리가 지상에 초대한 손님이고 보면 이 정도 배려는 해야 마땅할 것이다.

아기는 서너 달 때 가장 천사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기는 존재 그 자체로 충분히 우리에게 은총이 된다. 내 삶의 양식을 ‘기꺼이’ 바닥부터 새롭게 정렬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 사심 없이 무조건 남을 위해 에너지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나의 돈과 시간과 힘을 아낌없이 나누어준 적이 있었던가? 상대방을 위해 말소리를 낮추고, 똥기저귀를 빨며, 앞에 두고 쉬지 않고 노래를 불러준 적이 있었던가? 다른 사람의 양식을 위해 노동하고, 다른 사람의 불행에 항상 슬퍼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에 항상 기뻐할 준비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불안한 타인을 위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지켜주고, 밤을 새운 적이 있었던가?

아기들은 그 자신의 무력함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기들이 어떤 완전함으로 어른을 설복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목숨을 지탱할 수 없다는 절대적 무력함이 그 부모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만든다. 아기들은 사기를 치지 않는다. 과장된 무력함에서 구걸의 태도가 나온다면, 참된 무력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에 대한 투신의 태도를 낳는다. 가진 게 없지만 그의 생기만으로도 다른 사람의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아기이고, 마늘의 싹이고, 대낮 같은 봄이 가진 미덕이다.

예수는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럼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고 묻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겠지만, 어린이처럼 어리석어야 구원받는다고 알아듣는 사람은 더 어리석다. 나름대로 이해하자면, 다만 어린이의 ‘정직함’을 배우라는 뜻이 아닐까? 세상사에 좀 어리숙해 보여도, 검고 깊은 아이들의 눈망울마냥 진실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고, 본 대로 들은 대로 믿고 살며, 자신의 믿음에 따라서 한결같은 삶을 살아내려는 안간힘을 높이 산다는 뜻이 아닐까?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 안에서 이 세상에 초대하듯이, 그 믿음의 한복판에 자리한 것이 사랑이라면 결국 진실한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이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던가.

결국 아기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진작에 ‘사랑 연습’을 하는 것이다. 아기를 통해서 우린 사랑이 무엇인지 보고 듣고 만지고 깨닫는다. 특별한 영성을 얻지 못했다면, 아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사랑이란 걸 보고 듣고 만지고 깨달을 기회가 없다. 여기서 체험한 사랑의 원형이 확장되고 깊어지는 게 이웃 사랑이고 형제애가 아닐까?

 

아기가 태어날 무렵 한 수녀님이 방문했다. 수녀님은 방에 놓여 있는 성모상을 보고 ‘아기 없는 마리아’는 성모님같지 않더라고 했다. 가슴에 아기를 꼭 끌어안고 있는 마리아, 말 그대로 마리아는 거룩한 어머니가 아니던가? 예수 없이 마리아는 거룩해질 도리가 없다. 아기 예수를 키우며 어머니 마리아는 당신의 사랑을 키워간다. 그리고 아기로 인해 더욱 넓고 깊어진 사랑으로 초기교회 공동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어머니이신 교회’라고 부르는 전통마저 생겨났는지 모른다. 교회가 완전한 사회가 아니어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원천으로 되돌아가야 하듯이, 어머니는 아기를 통하여 항상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 아기에게서 사랑할 힘을 공급받아야 한다.

우린 어머니가 되든지 아님 아기가 되어야 한다.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어머니인 채로 아기가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부족한 사랑을 아기를 키우면서 보충하고, 충전한 사랑으로 세상에 생기를 돋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기처럼 특별히 무엇인가를 눈에 보이게 쥐어주는 것이 없더라도 존재만으로 충분히 주변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그리운 시절이다.

아기들의 반대 극점에 텔레비전을 두면 너무 비약하는 것일까? 텔레비전을 켜면 온통 광고투성이다. 상품광고는 당연하거니와 드라마 또는 쇼 프로그램 출연진 모두가 자신을 잘 팔리는 상품으로 처신한다. 그리고 사회자들과 관객·시청자들은 그들을 개런티 얼마짜리로 취급한다. 그들은 그냥 그대로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 떠들면서 온갖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제발 날 좀 잘 봐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정직함을 요구하는 것은 연예인을 우롱하는 발언이다. 그런 모든 것이 다 지나가도 남아 있는 것, 세월이 무상하다 해도 오롯이 있는 것, 낡은 사진첩처럼 색깔이 바래도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 것, 그것은 지금도 눈앞에 삼삼한 방싯거리는 아기의 얼굴이다. 그 아기의 천진한 웃음이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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