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편지-이준균] 누가 알겠는가, 그대가 라파엘 천사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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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편지-이준균] 누가 알겠는가, 그대가 라파엘 천사였음을
  • 이준균 요셉
  • 승인 2019.09.20 1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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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사람이 한번 말해 보이소. 나, 미친 사람 아니지요? 그렇다고 말해 주이소, 예?”

- 아, 할머니가 왜 미친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지.

“정말이지요? 나 정말 미친 사람 아니지요? 그렇지요?”

- 할머니는 아무 문제없는 사람이에요.

한참을 울먹이다 내 다짐을 받고서야 문을 나서는 김할머니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김할머니는 오래 전 뇌경색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말이 제대로 안 나오고 오른손과 다리가 힘이 없다. 간단한 외출이나 집안일은 얼추 하시지만 고령에 장애인이라 낙상 위험도 있고해서 장기요양 신청을 해드렸다.

지금까지는 방문요양보호사가 아주 잘 해드렸다. 근데 이번에 새로 배정된 사람들이 문제였다. 도와주는 흉내만 내고 아무렇게나 이불에 드러눕고, 맘에 안 들면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 힘들어하는 문제는 자기들끼리 쑥덕대며 키득거리는 것인데, 할머니가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면 ‘저 할매가 미친 할매여’라는 것이다.

아무도 부양해주지 않는 독거노인을 도와주자고 나라에서 좋은 취지로 시행하는 사업인데 여기도 역시 사람이 문제다. 건강보험공단에 전화해서 추석 지나 현장조사 뒤 새 사람을 배치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도 오후 내내 마음 한 귀퉁이를 맴도는 개운치 않은 뒷맛의 실체를 궁금해 하다 나중에야 알았다. 할머니의 질문이었다. “나 미친 사람 아니지요?”

어찌 살아가면서 김할머니만 이런 질문을 하겠는가? ‘나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지요? 바보 아니지요?’라고 다짐받고 싶은 이가 어디 할머니 뿐이랴?

 

"당장 여기를 떠나 사라져라. 거기로 가서나 예언자 노릇하며 밥을 벌어먹어라"는 멸시를 받은 사람은 양떼나 몰고 돌무화과나 키우던 아모스였다. 그는 예언자의 무리에 어울린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새끼염소를 훔쳐왔다고 아내를 의심하다 타박 맞은 토비트는 가여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평생토록 진리와 정의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었다(토비트 1,3). 그는 마음이 괴로워 신음을 하며 크게 울었다(토비트2,14).

극한의 절망으로 내몰린 욥은 정작 하느님 앞에 의인이었다. 그는 의지할 데 없는 고아를 건져주고, 과부의 설움을 기쁨으로 바꿔주고, 소경에게는 눈이었고 절뚝발이에게는 다리가 되어주었다(욥29,12). 그는 울부짖는다. “차라리 그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고 숨져 태어나지도 않았던 듯이 모태에서 무덤으로 바로 갔다면 좋았을 것을. 나의 수명은 이제 다 되었습니다. 좀 내버려두소서.”

겁도 없이 아합왕을 꾸짖고, 한치의 흔들림 없이 수백 명의 바알 사제를 대적했던 엘리야는 ‘내일 이맘때까지 반드시 너를 죽이리라’는 이세벨 왕비의 협박에 도망치다 싸리나무 아래서 기도한다.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예레미야(예15,10), 시편저자(시편73,11)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이로써 우리는 깊은 어둠을 통과했던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들 모두 우리들처럼 아버지의 다짐을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신중하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약속받은 것을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했으며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 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얼핏 보면 기대를 접으라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하나의 진리를 말해준다. 목표는 저 아득한 길 끝에 있을지 모르는 가시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은 상수리나무 아래서 나그네를 대접하다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을 만난다. 도망다니던 엘리야가 먹었던 음식은 마지막 양식을 먹고 아들과 함께 죽고자 했던 사렙타 과부, 그리고 무심해보이던 까마귀 한 마리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누가 알겠는가? 살다보면 나와 네가, 혹은 다른 누군가가 토비트의 여정에 은밀히 함께했던 라파엘 천사였음을. 하느님은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창조하였다고 한다(시편8:5). ‘조금’의 차이는 부르심에 순순히 따르는 단순한 겸손의 차이가 아닐런지?

미래는 우리 몫이 아니라 여전히 불안할 것이지만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기를 기도해본다. (바오로 사도 역시 자주 근심걱정에 시달렸음은 위로가 된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이준균 요셉
가톨릭일꾼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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