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선, 눈도 오시고 하루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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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선, 눈도 오시고 하루 쉬자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09.1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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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7

경칩과 춘분이 지나고 내일 모레가 사월인데, 산중엔 눈이 내린다. 이따금 풍경처럼 새소리가 들리고, 마을엔 도무지 인기척이 없다. 문득 이철수님의 ‘오늘은 눈도 오시니 하루 쉬어야겠다’라는 판화가 떠오른다. 겨우내 쉬고 또 쉰다는 말이 쑥스럽지만, 모두 제 복이려니 스스로 다독거리며 안심한다. 감자밭을 일구어야 하는데, 오늘 내일 오늘 내일 미루다가 흰눈을 맞이한 것이다.

밭에 감자알을 파묻고 나면 이른바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되는 것이고, 온갖 밭작물을 다투어 파종하고, 논에 거름을 내고 땅을 갈고 모내기도 해야 할 것이다. 봄에는 해오름에서 해거름까지 일해야 한 해 농사를 그나마 이뤄낼 수 있는 게 농부의 처지이고 보면, 하루 이틀 더 몸을 놀린다 한들 나무랄 사람이 있겠나 싶다. 오늘은 아침녘부터 이웃집 꼬마가 우리 아기를 보러 마실을 왔다. 아내와 아기와 아이가 옆방에서 도란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철수, 눈도 오시고, 하루쉬자. 1989년
이철수, 눈도 오시고, 하루쉬자. 1989년

이철수의 그 판화에선 한 스님이 방문을 열고 누워서 밖에 내리는 눈발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이걸 ‘눈오는 날의 와선(臥禪)’이라 부르면 어떨까? 만사에 손을 놓고 있는 심심한 정경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것이면서도 아무나 선뜻 행하지 못한다. 하던 일 멈추고, 특별한 목적도 생각도 없이 방구석에 누워 있는 걸 마냥 두고 볼 아내도 없고, 아이들은 기회는 찬스라고 놀아 달라고 보챌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마음을 내지 못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면 왠지 불안하고, 남보다 뒤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럽고, 머릿 속이 뒤숭숭해져서 바쁜 마음이 후딱 일어나 뭐든지 하라고 부추긴다. 요즘처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들의 강박관념이 곤혹스러운 시절엔 제 영혼을 위하여 마음 편히 쉴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지없는 삶은 상상력의 빈곤을 낳는다. 상상력의 빈곤은 삶을 생존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인생이 황폐해지지 않을까? 그러니 삶의 속도를 늦추고 한 번쯤 모른 체 하고 브레이크를 밟을 필요가 있다. 한동안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고 쉬는 것은 사고를 막는 지름길이다.

시인 김수영은 ‘와선(臥禪)’이란 글에서 "선(禪)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누워서 하는 선, 즉 와선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선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면서도 이 누워서 하는 선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나는 내딴으로 해석하면서 혼자 좋아하고 있다. 내딴으로 와선이란, 부처를 천지팔방을 돌아다니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골방에 누워서 천장에서 떨어지는 부처나, 자기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부처를 기다리는 가장 태만한 버르장머리없는 선의 태도"라고 적었다. 가만히 누워 있다 보면 바깥에서 이런저런 아득한 소리가 들렸다가 또 까맣게 사라지곤 하는데, 그 소리가 다시 귀에 들려올 때 부처가 덩달아 나타난다는 말도 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와선이란 몸이 천지팔방을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몸은 한자리에 있건만 마음이 천지팔방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과 마음이 한껏 떠돌다보면 머무는 곳이 있을 법하다. 삶의 자리에서 막힌 곳이 보이고, 뚫어낼 요량도 떠오를 것이다. 산다는 게 뭔지 헷갈리면서도 결국엔 바로 그거다 싶은 걸 짚어낼 수 있겠다.

 

시인 백석
시인 백석

시인 백석(白石)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한때 만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그만두고 떠돌아다니며 생계를 위해 측량보조원, 중국인 토지의 소작인 생활 등을 감당했다. 해방되기 바로 전에는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해 산간오지의 광산에서 일하다가 해방 후 신의주에 잠깐 머문 적이 있다. 거기서 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이란 시를 읽어보면 객지에서 맛본 와선의 새로운 경지를 느끼게 된다.

"…(생략)…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복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고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가 재 위에 쓴 글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다른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백석은 좁다란 방에 누워서 흰 바람벽을 쳐다보노라면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고 적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애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비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백석의 와선은 쓸쓸한 처지의 자신에게 공감하고, 자기를 인정하며, 사랑과 슬픔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가련하고 연약하고 소박한 목숨들에 대한 위대한 긍정. 여기서 그의 삶은 아무리 슬퍼도 아름답고, 아무리 질퍽거려도 훈훈한 기운을 담고 있을 거라는 예감을 갖게 한다. 아직 그치지 않은 눈발을 바라보며, 그의 와선에 갈채를 보내고, 오늘은 제발 일하지 않아도 좋을 ‘내 영혼의 길일(吉日)’이 되기를 빌어본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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