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공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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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공부방이다
  • 한상봉
  • 승인 2019.09.17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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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공감필법", 유시민, 창비, 2016

나는 원래 글과 인연이 그리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글보다 그림을 좋아했고, 사진 찍는 것을 더 사랑했다. 최근에 통영 사는 강제윤 시인의 사진전을 보러 인사동엘 나갔다. “당신에게 섬” 사진전. 강제윤은 전시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바다를 떠나 살 수 없다. 잊고 살지만 우리는 모두가 섬사람들이다. 대양 위에서 누구는 큰 섬에 살고 누구는 작은 섬에 살 뿐이다.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 공간이다. 섬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만드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이다. 오랜 세월 외면 받고 소외되었던 섬들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바다 위에 솟아있다는 점에서 유라시아 대륙도 큰 섬일 뿐, 이라는 시인의 상상력은 대단하다. 사유적 기능보다 직관적 기능이 유독 발달한 시인들은 ‘오지 않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발끝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바늘 끝에서 우주를 상상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존경받을 만 하다. 아마 우리 삶이 우주 위에서 바늘 끝만 바라보는 것처럼 비루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시민은 아마도 글과 책에 가까운 사람일 텐데, 인지적 사고에서 직관적 사고로 나아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시인들이 직관적 사고에서 인지적 사고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시작점이 무엇이든 공감과 이해로 나아가는 ‘공부’란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작업일 텐데, 불가(佛家)에서는 인생 자체가 ‘공부’라 하니, 바다를 헤아릴 듯 나아가는 공부를 더듬거리더라도 포기할 수 없겠다.

<유시민의 공감필법>(共感筆法). 제목이 단아하고 멋들어진다. 여기서 유시민은 독서와 글쓰기가 여러 공부 방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이라 말한다. 유시민은 ‘공부’란 “인간과 사회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 작업”이라고 규정하고, 글쓰기는 “그런 생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행위”이고, 그 결과물로 나온 책을 우리는 다시 읽는다. 이 때문에 독서는 공부하는데 아주 요긴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그대로 내 안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글로 적어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유시민은 “즐겨 읽고 끊임없이 쓴다”고 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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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피엔스가 다른 사피엔스에게

책이 나의 정체성을 확인해 줄 때가 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순간, 우리는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가 정해진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사피엔스>라는 책 속표지에 “From one Sapiens to another”(어느 사피엔스가 다른 사피엔스에게)라고 썼다. 자신은 유대인이나 유럽인이 아니라 ‘인류의 일원’이라고 밝힌 것이다. 유시민은 이 말의 깊은 뜻을 새긴다.

생물학자들은 현생인류를 여러 동물 종(種) 가운데 하나로 보아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學名)을 붙였다. 하라리가 굳이 ‘사람’이 아니라 ‘사피엔스’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인간이 지구 행성에 존재하는 여러 종의 생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하라리 자신도 그 사피엔스라는 종의 개체에 불과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유시민은 추측한다.

“호모 사피엔스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과(科, family)에 속한다. 이 엄연한 사실은 역사에서 가장 은밀히 숨겨진 비밀이었다. ... 좋든 싫든, 우리는 거대 영장류라는 크고 유달리 시끄러운 과의 일원이다. 현생 종들 중 우리와 가까운 친척으로는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이 있고, 가장 가까운 것은 침팬지다. 불과 6백만 년 전 단 한 마리의 암컷 유인원이 딸 둘을 낳았다. 이중 한 마리는 모든 침팬지의 조성이, 다른 한 마리는 우리 종의 할머니가 되었다.”(<사피엔스> 1장)

이 이야기는 단순히 인류의 기원과 생물학적 계보를 알려주는 정보가 아니다. 피부색, 인종, 민족, 국적을 불문하고 지구에 사는 70억 호모 사피엔스는 모두 서로 인연을 맺어 자식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같은 조상에게서 갈라져 나온 형제자매”라는 뜻이다. 그래서 자신을 호모 사피엔스의 일원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강한 유대감을 갖게 되고, 인류가 살아가는 터전인 지구와 자연에 대해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종들에 대해서도 그런 유대감을 지니게 된다. 유시민은 그래서, “내가 하라리 박사와 같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사실이 기뻤다.”고 말한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호모 사피엔스도 태어나고, 성장하고, 자식을 낳거나 낳지 않거나 낳지 못하고, 늙고, 병들고, 결국 죽습니다. 하루살이, 나비, 도마뱀, 들소, 산양, 고래나 같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어요.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이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고 우주로 돌아간다는 것도 같습니다.”

유시민은 이런 장대한 우주 안의 인류를 생각할 때, “우리가 서로 티격태격 싸우거나 죽일 듯이 미워하는 이유가 대부분 지극히 사소한 문제”라면서, 호모 사피엔스로서 “의미를 찾아가는 공부”를 계속할 것을 권한다. 인류와 생태계 전체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생겨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면, 참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럼 하느님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허나, 데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 인류는 하느님의 창조 안에 있으며, 하느님의 창조는 지금도 계속되는 진화과정이라고. 그 진화의 축에서 ‘인류’가 가진 몫이 크고,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가 되는 날까지, 그 진화는 멈추지 않을 거라고. 그날이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맞물려 있음을 생각하며, 진화의 수레바퀴를 힘차게 돌리기 위해 위해 역시 하느님의 창조에 협력해야 한다고.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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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내게 말을 걸고, 내가 책에게 말을 걸고

한편 유시민은 문자 텍스트 안에서 저자의 감정을 읽고, 공감할 수 있어야, 의미 있는 독서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적어도 처음 읽을 때는 “그래, 어떻게 썼는지 두고 보자”하는 심정으로 저자와 동떨어져 있으면, 그 텍스트는 나한테 말을 걸 수 없고, 결국 나는 그 텍스트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브루클린의 젊고 가난한 이민자 부부의 첫 아기로 태어난 칼 쎄이건은 <코스모스>를 쓰게 된 어릴 적 경험을 전한다.

“일찍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라도 겨울에는 별을 가끔 볼 수 있다. 나도 멀리서 반짝거리는 별들을 올려다보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그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나 어른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의 불빛이지, 꼬마야.’라고 대답해줄 뿐이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빛’, 그 정도는 나도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떠돌아다니는 작은 등? 무슨 이유로 떠돌지? 나는 별들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그들이 가진 독특함이 완전히 잊혀지고 아주 평범한 것으로 취급받던 별들의 신세가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나는 좀더 깊이 있는 답을 듣고 싶었다.”

저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독서의 출발점이다. 저자의 심정이 되지 않고서야 문맥을 제대로 이해할 도리가 없다. “그래, 그랬을 거야! ... 하지만 이건 어때?”로 나아가야 텍스트가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유시민은 딸의 책장 정리를 돕다가 우연히 발견한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ë)의 <제인 에어>를 발견하곤, 옛날에 읽던 생각이 나서 선 채로 책장을 넘겨보았다. 이야기인즉,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제인 에어는 외삼촌 집에 맡겨져 내내 구박을 받다가 고아원이나 다름없는 기숙학교로 보내진다. 교육사업가 행세를 하며 후원금을 갈취하고 돈을 횡령하는데 혈안이 된 시설장 브로클허스트는 여학생들 머리를 짧게 자르게 하고, 형편없는 밥을 먹인다. 제인을 의자 위에 세워 벌을 주면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배은망덕한 고아’라고 모욕을 준다. 유시민은 “제인이 영양실조로 병들어 숨을 거둔 헬렌을 껴안고 한 침대에서 잠드는 장면에 가서야 저는 비로소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중학생 시절 느꼈던 감정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분노에 불타오르는 까까머리 중학생이 보였다.”고 말한다.

<제인 에어>는 물론 지식과 정보전달 목적으로 쓴 책이 아니다. 여기서 샬럿은 특정사건이나 등장인물의 성격이 아니라 “우리에게 고귀하고 가치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말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게 유시민의 생각이다. 그것은 ‘사회적 공분’이었다. 돈을 권력을 가졌으나 인간으로서는 비천한 자들이 고귀한 인간적 감정을 지니고 자기 힘으로 힘껏 살아가는 사람들을 공공연하게 경멸하고 모욕하는 세태에 대한 공분이다. 덧붙여 유시민은 “진화생물학자들에 연구에 따르면 공분을 느끼는 능력은 문명의 산물이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라며 “사회적 공분을 느끼는 능력이 호모 사피엔스의 생물학적 본성에 속한다니 반가운 일”이라고 말한다. 책에서 저자의 감정과 독자의 감정이 소통하고 공감을 나눌 수 있을 때, 책읽기는 참으로 복된 일이 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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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인전 인생관’을 버렸다

자신이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고, 정치권에 들어가게 되었던 이유가 “어쩌면 유신교육 때문”이라고 말하는 유시민은 책을 다시 읽으며 삶의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보면 제가 유신체제 때 데모한 것이나 5.18 때 데모했던 건 박정희 대통령 탓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살아야 훌륭하다고 가르쳤으니까요. ‘대한민국은 민주국가가 돼야 해. 그래야 민족중흥이 이루어질 수 있어. 우리는 그런 사명을 띠고 태어났으니까 싸우다 죽는 한이 있어도 민주화투쟁을 해야 해.’ 역설적이지만, 이런 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전체주의 유신 교육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충무공 이순신 같은 이들의 위인전을 읽고 자랐다. “위인전은 대개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 이야기”다. 게다가 박정희가 만든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며 자랐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집단적 요청 앞에서, 우리는 늘 주눅 들고, 내 개인의 행복을 찾아가는 삶을 평가절하 하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그럴까? 반작용처럼, 유시민은 자신을 거듭거듭 ‘자유주의자’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상당한 기간 ‘개인’이 없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공동체, 집단, 국가 개념이 낯선 것처럼.

그래서 유시민은 “저는 ‘위인전 인생관’을 버렸습니다.” 하고 고백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답게 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나답게’ 사는 것이 ‘역사적 대의’에 부응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정작 당시 유시민에게 위로가 된 글은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였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

세상 탓하지 말고 유연하게 제 삶을 살라는 거다. 꼭 세상을 구한다고 정치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대중이 나를 원하면 정치를 하고 대중이 원치 않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겠다.” 생각했다는 것인데,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선 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을 때, 더 큰 격려가 되는 글은 <맹자>의 ‘등문공’ 하편에 나오는 이 구절이다.

“천하의 넓은 집(仁)을 거처로 삼고, 천하의 바른 자리(禮)에 서며, 천하의 대도(義)를 실천하여, 뜻을 얻었을 때는 백성과 함께 그 길을 가고, 그렇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간다. 부귀도 나를 흔들 수 없고, 빈천도 나를 바꿀 수 없으며, 위세와 무력도 나를 꺾을 수 없어야, 비로소 대장부라고 하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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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다는 것

유시민이 ‘위인전 인생관’을 스스로 문제 삼으며 ‘나답게’를 주장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심경일까, 잠시 생각해 본다. 도로시 데이는 고대교회 교부들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성인됨에 있다.”고 했다. 유시민이 이순신을 읽을 때, 나는 젬마 갈가니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를 읽으며 꿈을 키워 왔다. 그분들처럼 ‘사랑만이 전부’인 삶을 살고 싶었고, 그런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을 꿈꾸어 왔다. 이 때문에 절망하고 자책해 온 날도 있었다. 지금이야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기에, 타협책을 찾아보기도 한다. 헨리 나웬은 ‘나’(ego) 없이, 또는 ‘확장된 자아’(self)를 살라고 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내가 사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도록” 하자고 권고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해지라”고 한다.

아마 이 지점에서 삶을 대한 ‘자유주의자’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갈라지는 것 같다. 자유주의자가 ‘집단’ 대신에 ‘개인’을 발견했다면, 그리스도인은 “고유한 자신만의 길을 걸어서 하느님께로” 가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나다운’ 길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길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변할 수 없지만, 어떤 방향성을 가진 삶인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인생행로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이 그분을 향해 길 떠나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이다. 언젠가 그 길 끝에서 그분이 “그동안 고생했다” 다독이며 마중 나와 주실 것을 믿는 게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행복(satisfaction; happiness)을 갈망할 때 그리스도인은 축복(blessing)을 희망한다.

유시민이 위인전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 이야기”라고 한 것처럼 성인전은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인들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게 하는 사람들 이야기”이다. 그 세상이 국가든, 사회든, 교회든 상관없다. ‘동정 없는 세상’은 교회라고 예외일 수 없다. 주교와 사제들에게서도 ‘비정’(非情)함을 맛볼 수 있다. 그런 동정 없는 세상에서 ‘공감과 연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성인이다.

그래서 ‘위인전 인생관’을 가질 필요까지는 없지만, 적어도 내 생애를 걸고 따라 살고 싶고, 마음으로 흠모하는 ‘스승’ 한 분 정도는 있는 게 좋다. ‘나’를 믿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나’ 과신하는 것도 위험하다. 항시 비추어 성찰케 하는 거울이 있다면, 불확실성 시대를 살아가며, 수시로 때때로 갈등하는 우리에겐 그나마 안심이 된다. 좀 실수해도 좋아, 다시 시작하는 거야, 다독여줄만한 어른이 있다면 더욱 좋겠다. 그런 사람이 지근거리에도 있고, 책에서도 만나고, 기도 중에도 떠오른다면, 그런 삶도 참 복되다. 여전히 겸손하고, 여전히 제 가야할 길을 걷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오늘 밤도 공부하면서, 스승의 그림자를 떠올리는 것, 참 기분 좋은 일이다.

 

* 이 글은 <공동선> 2019년 8-9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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