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길을 떠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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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길을 떠난다는 것은
  • 박철
  • 승인 2019.09.17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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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칼럼
사진=박철(가을길목, 숲은 더욱 그윽해져가고 나무는 더욱 신령해진다.)
가을길목, 숲은 더욱 그윽해져가고 나무는 더욱 신령해진다. 사진=박철

시나브로 산은 여름끝자락, 가을을 향하여 성큼성큼 가고 있다. 하늘은 높고 푸르다. 매미소리 잦아들고 각종 풀벌레소리가 충만하다. 아침 아내가 출근하고 9시 조금 넘어 나는 산으로 향한다. 산에서 네 다섯 시간 가량 머물다 집에 돌아오면 오후 3시쯤 된다. 나는 산길을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자연이 주는 녹색은총과 여분의 행복을 경험해 보지 않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아침산행은 내 영혼의 성소(聖所)이다. 그렇다. 이만한 호사(好事)가 어디 있겠는가? 삶이란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게 기회를 준다. 큰 어려움이나 폭포수 같은 기쁨 속에서 발견할 때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일로 인해 새로운 발견과 변화를 맛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지혜나 기쁨은 아주 작은 일상의 씨앗 속에 담겨져 오는가 보다.

이제 그 길 위에 내일도 서 있을 나를 생각하면 지금 걸으면서도 또 걷고 싶은 충동이 막 인다. 길은 참 묘하다. 평소 수많은 발자국을 찍게 하면서도 무언으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한다. 말하지 않아도 내어진 길이 인도인지 차도인지 산길인지 들길인지 또는 골목길인지 척 하고 아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오늘도 숲길을 걸으며 만약 이 길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느 방향으로 몸을 돌려 목적지에 도착할까? 길로 인해 생겨난 주변 나무며 경치들과 분주히 바쁜 차량의 모습, 그리고 건물들은 어떤 형태로 있게 될까? 하는 공연한 의문을 갖는다. 길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 자동차 따위가 지나갈 수 있게 낸 일정한 너비의 공간'이라고 되어있다. 움직여 이동할 수 있는 것들만의 공간이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를 잠시 벗어나면 길의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인생길, 사랑의 길, 부부의 길, 부모의 길, 희생의 길, 신앙인이 추구하는 십자가의 길과 진리이며 생명이신 창조주의 길 그리고 머무름이 없는 수행자의 길이 있다. 그러고 보면 길의 또 다른 의미는 뭇 생명의 인도(仁道)함이며 살아 갈 생명을 위한 삶의 선구자이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은 늘 길 위에 서 계신다. 부처님의 일생도 길에서 태어나 길을 걷다가 길 위에서 열반에 드신다. 길은 떠남과 버림으로 곧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임을 길 위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다. 그 길은 어느 누구도 시시비비를 하지 못하며 각자 주어진 몫만큼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의 길이며 좀 더 가볍게 가고 하는 평화의 길이기도 하다.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길은 다양하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이동 방법은 우주로 나르는 로켓에만 있지 않다. 자박 자박 한걸음씩 걸어내는 걷기는 때론 하늘로, 때론 바다 속으로, 때론 깊은 산중으로 나를 인도하니 어쩌면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일상에서의 시공을 초월한 행위일 수도 있다.

소박한 시골 아낙과도 같은 지방도로의 정취를 풍미하며 약간 늦은 길을 달리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각박한 현실을 살아내는 우리들은 벌써부터 정체 없는 고속도로의 길 위를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연에 상처를 덧 낸 자국으로 길을 터 만든 근심 가득한 고속도로에는 빠르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감흥 없이 속도에 동승한다.

가끔 휙 하고 스치는 무언가에 홀리어 뒤 쫓다 허망이 되 짚어 제 자리에 돌아오면 벌써 텅 빈 영혼의 끝에 다다른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편리함에 희생된 산이며 들판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하느님의 숨결로 만들어진 영혼이 그 자리에 머물렀었다는 걸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 영혼이 가까운 가족이며 이웃이며 이승에서 꼭 만나고 사랑해야할 그 무엇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적은 있는가?

자연의 이치는 곧 스승이라 했다. 편함과 앞서감으로 해서 잃은 것이 많았던 시간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은지 걷기를 하며 자신을 바라보기 참 좋은 계절이다. 또한 여유로운 발걸음 속에 함께하는 창조주의 숨결을 느껴봄에 부족함이 없는 나날이다. 여전히 길 위에 낮은 보폭을 재며 걷는다. 길의 저 끝에 있을 천국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길 위에 있다.

 

사진=박철(산책은 나만의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이다.)
산책은 나만의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이다. 사진=박철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내 마음에 속내를 다 들어 내놓고
신에게 가장 솔직해 지는 길이다.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길을 떠난다는 것은
사람이 절대로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길이다.
한번도 가지 않은 낯선 길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신이 보낸 사람이 틀림없다.

(박철, 길)


박철
샘터교회 목사. 탈핵부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부산예수살기상임대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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