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생 김지영, 페미니즘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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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생 김지영, 페미니즘을 아시나요?
  • 이정화
  • 승인 2019.09.0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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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화 칼럼

“그 놈의 돕는다는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2016년 겨울, 딸아이가 선물해 준 조남주 장편소설 <82년 김지영>의 한 대목이다. 육아를 위해 결국 직장을 그만둔 아내를 위로하며 열심히 돕겠다고 하는 남편에게, 화를 내며 대드는 아내 김지영의 말이다. 처음에는 김지영의 저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찌 보면 복에 겨워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도와준다는 데 화는 왜 낼까? 저 정도면 자상한 남편 아냐?’ 하면서. 하지만 내가 60년생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내 안의 ‘60년생 김지영’이 보이면서 이내 ‘82년생 김지영’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마치 김지영이 나인 것처럼.

나, 60년생 김지영

60년생인 나도 82년생 김지영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2남3녀의 둘째딸인 나는 착하고 공부 잘한다는 이유로 할머니 두 분과 부모님의 사랑을 받긴 했지만, 늘 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의 우선순위는 두 남동생들이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것을 약간의 편애라고 여겼고 ‘성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갔는데 모든 중요 업무는 남성들의 차지였고, 여성들의 업무는 주로 타자를 치거나 사무보조를 하거나 심부름을 하는 단순노동이었다. 대학 나온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혼 후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잠시 아이들을 가르치러 다닌 적이 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저녁때가 되어, 검은 봉지에 동태 한 마리를 사들고 마음이 급해 집으로 달려가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82년 김지영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정도일까.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산다고 생각했고 의심하지 않았다.

육아와 집안일에 충실하며 좋은 엄마와 현명한 아내가 되는 것이 여성의 당연한 삶이라고 생각했고, 남성들과 사회는 그것을 요구했다. 하면 티가 안 나고, 안 하면 티가 나는 끊임없는 집안일. 요즘 사회 초년생인 청년 노동자에게 열정을 담보로 적은 월급을 주거나 아예 돈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열정페이’처럼,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지불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고,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은 일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하지만 집안일과 육아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여전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전업주부들은 끊임없이 가사노동을 하지만 놀고먹으면서 돈을 못 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껴야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늘 죄인이고, 늘 피로하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에서 “문제는, 그리고 요지는 여성에게 ‘소비’는 가사노동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 자신도 ‘집’을 ‘사회’라 여기지 않기 때문에 집안일을 ‘노동’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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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박육아에 맘충이라니 ... 목소리를 잃은 김지영

조남주 작가는 이 책을 왜 썼을까?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제목이 그 이유를 담고 있다. 실제로 1982년에 태어난 여성들의 이름 중 가장 많은 것이 김지영이란다. 소설의 주인공 ‘82년생 김지영’은 독특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그야말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과 쏙 빼닮은 여성이다. 여성학자 김고연주는 “82년 김지영이 우리 여성 독자들의 삶과 너무 닮아서 김지영이 나인지, 내가 김지영인지 헷갈릴 정도”라고 말한다.

작가는 ‘82년 김지영’의 삶을 통해서 현재를 살고 있는 수많은 김지영들의 삶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지영은 평범하나, 소설은 평범하지 않다. 이 소설은 김지영들의 삶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남성중심사회에서 ‘나답게’ 살고 싶고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찾고 싶은 여성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게 하고, 결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으면서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김지영은 2녀1남 중 둘째딸로 자라오면서 집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크고 작은 성차별을 경험한다. 갓 지은 따뜻한 밥을 아버지, 동생, 할머니 순으로 퍼 담는 것이 당연했고, 남자는 1번이고, 남자가 시작이고, 남자가 먼저인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마치 주민등록번호가 남자는 1로, 여자는 2로 시작하는 것을 그냥 그런 줄만 알고 살았던 나처럼. 취업을 하려고 숱한 면접을 볼 때마다 여자라는 이유로 외모에 대한 지적이나 옷차림에 대한 저속한 농담을 들었고, 음흉한 시선과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겪기도 했다.

김지영이 이상한 증상을 보인 건 사랑하는 딸을 얻은 지 1년 되었을 때였다. 어떤 날은 김지영이 남편 정대현에게 장모가 되어 충고를 하고, 추석날에는 시어머니에게 섭섭해 하는 친정 엄마가 되어 섬뜩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정신과에서는 육아우울증이라고 추측했으나, 우리 여성들은 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축복이고, 어머니는 위대하다고 하지만 여성들에게 출산은 축복만은 아니라는 것을. 김고연주는 “출산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 피로, 당황, 놀람, 혼란, 좌절의 연속이다. 아이를,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은 여성의 의무가 아니라 사회의 의무인데, 개별 가정에서 대부분 엄마가 ‘독박육아’를 하고 있는 현실에 분노가 치민다”라고 말한다.

김지영이 이런 증상을 보인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은, 독박육아 몇 개월 만에 겨우 집을 나와 공원 벤치에 앉아 유모차에서 잠든 딸을 보며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옆 벤치의 남자 하나가 김지영을 보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한국 여자랑은 결혼 안 하려고......”. ‘맘충’은 남편이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카페나 다니면서 자기 아이만 위하는 ‘이기적인 벌레’라고 손가락질 받는 여성을 혐오하는 말이다.

“김지영 씨는 한 번씩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살아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모두 김지영 씨 주변의 여자였다. 아무리 봐도 장난을 치거나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감쪽같이, 완벽하게, 그 사람이 되었다.”

김지영은 살아오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입 밖으로 말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에 목소리를 삼켰다. 여성혐오 사회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행위가,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얼마나 숱한 위험에 처할 수 있는지 아니까 입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목소리를 잃어버린 김지영을 위해, 김지영의 입을 통해 다른 여성들이 김지영을 대신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환자처럼 보이는 이 증상이, 여성 혐오 사회에서 김지영이 택한, 택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삶의 방식인 것이다. 2016년 5월17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강남역 살인사건’의 희생자에게도 ‘여성혐오’라는 프레임이 씌워져 있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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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주다

여러분은 ‘페미니즘’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여성차별, 혐오, 억압, 드센 여자, 불평등, 가부장제 등이 떠오른다. 소위 똑똑하고 드센 여자들이 남성을 이겨보려고 ‘여성상위’를 외치며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조화롭게 살면 되는데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라 가벼이 여겼다. 그런데 ‘페미니즘’은 그렇게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하고 무거운 주제였다. 복잡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고, 지속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학문이 페미니즘임을 책을 통해서, 강의를 들으면서 알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멈추고, 끊임없이 “왜”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82년 김지영도, 60년 김지영인 나도 어처구니없고 부당한 상황에서 입을 닫아버린다. 속상하고 상처를 입지만, 맞서 싸울 용기가 없어서 현실에 안주한다, 심지어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갖는 이해심과 포용이라고 포장하여 합리화한다. 질문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하거나 질문하지 않는 것은 사유하지 않는 것이고 ‘나답게’ 살아가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한다는 것은 중력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 조류에 맞서서 당당히 서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 곳곳에 은밀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퍼져 있는 다양한 차별과 배제, 억압을 민감하게 의식해서 목소리를 잃어버린 수많은 김지영들의 목소리를 찾아주고, 스스로 그 목소리가 되어 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정치문제, 경제문제, 노동문제 등 중요하고 굵직한 사안들이 많은데 페미니즘처럼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시비 걸고 따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정치, 경제, 노동문제 속에 얼마나 많은 차별과 배제와 억압이 작동하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내모는지 ‘장자연 사건’이나 ‘me too’ 운동을 통해 이미 그 민낯이 드러났다.

지금도 강남역 8번 출구 앞 철탑 위에서 80일 넘게 소음과 더위와 비바람을 견디고 있는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나, 작년 말 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어 숨진 하청노동자 김용균 모두 자본주의 권력의 차별과 배제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린 사람들이다. 결국 페미니즘은 성(젠더, gender)의 문제를 넘어 인간(human)의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을 페미니즘 시각으로 읽으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린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롯의 ‘환대’ 이야기를 보면 롯이 손님에게 자기 딸을 내어주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가 딸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기막힌 행동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가부장제 사회이고, 그 당시 여자와 어린아이는 사람이 아닌 재산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딸까지 희생시키는 환대는 도대체 무엇일까? 질문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페미니즘 관점으로 읽으면, 그냥 지나쳤던 롯의 딸이 보이면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버지가 얼마나 미웠을까, 딸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딸의 목소리를 찾아 주고 싶어진다. 82년 김지영의 목소리를 주변의 여성들이 찾아주듯이 그녀들과 연대하는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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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페미니스트

강남순 교수는 “성경 속에 수많은 여성차별이 있지만 가장 좋은 접근 방식은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성경 어디에도 여성차별을, 인종차별을 부추기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고 차별받고 억압받는 이들 편에서, 그들의 손과 발이 되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여성이라고 모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남성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그 기준은 ‘인간을 대하는 태도’ 즉, 타인에 대한 책임성이 있는가, 타인을 사랑과 연민으로 대하는 가 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성을 넘어 여성됨, 인간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페미니스트이고, 페미니즘은 복음적이다.

페미니즘을 알고 나면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내가 사회교리를 알고 난 후 예전의 신앙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안다는 것은 보이는 것이고, 알고보고 나면 행동하고 싶어진다. 행동하려면 여성도 남성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혹시 내 안에 차별과 배제의 사각지대는 없는지 성찰하고, 회개해야 한다. 어떤 것을 내어주고 어떤 것을 지켜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불편한 진실이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가담하여 타인을 혐오하고 배제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빼앗고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여성혐오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넓고 깊은 혐오라고 한다. 언제 이 지독한 혐오가 사라질까? 사라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강남순 교수는 ‘낮 꿈꾸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나는 이 단어가 마음에 든다. 낮꿈을 꾼다는 것은 지금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구조가 바뀌면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혁명은 꿈꾸는 자들의 몫이었다. 72년 만에 ‘참정권’을 따낸 여성들이 그랬고, 우리나라의 해방을 이뤄낸 독립 운동가들이 그랬다. 광화문 광장의 ‘촛불혁명’ 역시 낮꿈꾸기의 결실이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은 낮꿈꾸기의 달인이었다. 아무리 봐도 불가능해 보이는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이루어지게 하셨으니 말이다.

공지영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의 머리채를 쥐고 놓아 줄 것 같지 않던 더위’도 힘을 잃고, 귀뚜라미 소리가 가을을 재촉하는 이 밤에 나도 어울리지 않게 낮꿈울 꾸어본다. 하나는 신학교에 ‘페미니즘 과목’을 신설하는 것이다. 교회 신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고 신부님들과 긴밀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여성임을 감안할 때, 여성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공부하는 페미니즘은 필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9월부터 새로 시작하는 ‘성서백주간’ 봉사를 하면서 그룹원들과 함께 성서를 페미니즘 시각으로 읽어보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룹원들도 이제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기를 바란다. 보이고 들려서 불편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지금여기에서 하느님나라를 사는 것임을 알게 되길 꿈꾼다.

멀리서 ‘82년 김지영’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도 함께 하고 싶다”고.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운영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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