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무기력이야, 죽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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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무기력이야, 죽음이 아니라"
  • 한상봉
  • 승인 2016.06.14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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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여덟 단계-8

로버트 엘스버그는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에서 “진정한 삶은 불멸성을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대면하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 죽음의 실제를 회피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망상, 두려움, 삶의 깊이에 몰입하지 못하거나, 내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일상은 죽음을 ‘잠시 덮어두고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야 좀 더 지금 누리는 행복을 더 연장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른바 죽음은 ‘사는데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행복은 불행한 생각들을 피하겠다는 결심으로 얻어질 수 없다.

성인들은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치정권에 저항하다 처형된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플로센베르크 감옥의 교수대에서 “이것이 끝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생명의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단순히 ‘내세에 기대할만한 영생’으로 믿으면 곤란하다. 사도신경에서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제 믿음을 되뇌인다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원한 생명’을 지상에서의 모든 고통이 끝난 후, 미래의 받을 보상처럼 여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 순교자들과 성인 등 고통과 박해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진 사람들은 단지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승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미 가졌고, 이미 만졌기 때문에 영생을 믿은 것이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단순히 “왜 우리가 죽는가?” 묻지 않고 “왜 우리는 살고 있는가?” 묻는 것이다. 삶의 과정 안에 이미 죽음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삶의 의미와 목표를 찾았다. 예수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실존의 경계선과 한계를 지웠으며,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진실”을 보여주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이 오직 우리의 옛 생명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뜻한다.

죽음이란 깊은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새로운 출구다. ⓒ한상봉

죽으면서, 우리는 산다

본회퍼는 “십자가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행복한 삶을 끝맺는 비참한 종말이 아니며, 그리스도와 우리의 일치가 시작되는 점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그리스도가 사람을 부를 때, 그분은 그에게 와서 죽으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결국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던 제자들처럼 우리의 무기력과 절망과 죄악을 뒤에 남기는 ‘죽음’을 통해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영생이다.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오 13,44). 그리스도가 추종자들을 부를 적에 그분은 그들에게 와서 살라고 한다.

이러한 변화된 삶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 바오로 사도였다. 바오로는 이미 제자들이 이 지상의 삶에서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부활했다고 전한다.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서 6,56)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서로 도와주고, 피차에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 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골로사이 3,2. 12-13)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은 죽을 때만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이며, 그리스도교 입문예식의 중심인 세례성사의 의미이기도 하다. 세례성사는 정화예식이 아니라, 실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성사이다. 세례를 받으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세상에” 죽고 어리석게 보이거나 미친 것같이 보이게 하는, 심지어 전복적으로 느껴지는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와의 동맹을 선포하였다. 그것은 구세주의 운명, 즉 체포와 고문과 수치스러운 죽음에 동참하는 선택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런 죽음은 자기 자신과 죄에 죽는 우선적이고 자발적인 과정의 정점일 뿐이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는 매일 죽는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2고린토 6,9)

박해시기가 끝나고서, 사막의 교부들은 광야에 머물며 다른 죽음을 경험했다. 그리스도교 시대가 개막되었지만,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악덕과 탐욕, 권력에 대한 갈증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사막의 교부들은 “새로운 생명 안에서” 거닐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한 영감은 나중에 수도회 전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모든 회심이 바깥세상과의 급격한 단절이라기보다 먼저 내면에서 일어나는 단절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성인은 죄에 대해 죽는 것이 단순히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한다. “나는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줄 죽음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삶과 죽음은 많은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함이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생명력 없는 삶’이 문제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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