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하느님의 창조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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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하느님의 창조는 끝나지 않았다
  • 한상봉
  • 승인 2019.09.01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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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노동-창조의 신학, 도로테 죌레, 분도출판사, 2018-1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한마디로 답하기 참 난감하다. 그래도 답해야 할 때, 인생에 끼어든 거품을 다 걷어내고 나면 “평생 사랑하고, 평생 노동하는 것”만 남을 것 같다. 세상과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일하고, 일하지 않고서는 타인을 사랑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사랑과 노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기쁨이다. 성경에서 “보시니 좋았다”라고 표현된 이 기쁨은 제 사랑이 구체적 형상을 얻었을 때 발견하는 창조의 기쁨이다. 인간이란, 어쩜 하느님이 누렸다는 이 기쁨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사랑과 노동>이란 책을 쓴 독일 신학자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는 파스칼과 키르케고르, 시몬 베유를 사랑했다. 그는 독일 괴팅겐 대학과 쾰른대학에서 공부하고,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교 초빙교수로 재직했으며, 2003년 독일에서 이승을 떠났다. 우리에게는 <신비와 저항>, <환상과 복종>, <고난>,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 <현대신학의 패러다임>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죌레는 “그리스도는 내가 그를 통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또 아버지에게 말할 수 있는 형제 같은 존재였다.”고 고백한다. 이런 그리스도를 그는 선망했고, 사랑했다. 그가 창조의 신학을 고민하면서 주목한 이도 그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여행의 출발점은 내게 노동과 사랑을 가르쳐 준 갈릴래아 출신의 고문당한 남자다. 그는 노동하는 사람이자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혁명을 하는 사람이었다.”

 

Dorothee Soelle
Dorothee Soelle

창세기, 사회적 평등을 위한 히브리의 각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아빠’라고 부른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이분은 창조주이며 해방자로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의 해방전통은 늘 창조신앙에 앞선다. 그래서 <창세기>조차 <탈출기>를 해석한 것이라고 죌레는 말한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사제계 문서의 창조이야기(1-2.4)는 바빌론의 문화와 종교에 반대한다.

수메르-바빌론 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무질서한 혼돈이 지배했으며, 많은 신들이 세력 다툼을 벌였다. 결국 가장 강한 신이 다른 신들을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어 왕이 된다. 패배한 신들은 독립성을 잃고 그 왕궁의 신하가 되어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하위계급의 신들은 ‘거룩한’ 군주의 요구에 싫증을 내게 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창조한 ‘종’이 최초의 인간이었다. 이런 바빌론 신화는 사회적 불평등을 위한 각본이다. 왕은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였고, 대중은 강제 부역을 당하는 반면 왕국의 신하들은 권세와 부귀를 누렸다. 이 신화에선 신들이 고된 노동의 멍에에서 벗어나려고 인간을 창조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제의적 수단을 통해 위계적 사회체제를 고착시키는 역할을 했다.

인간의 예속을 강조하는 바빌론 신화와 다르게, 히브리 창조신화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요구하지도, 전제하지도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 그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것도 직접 육체노동을 통해 인간을 창조하시고 기뻐하셨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인간의 노동은 하느님의 노동을 드러내는 ‘거룩한’ 성사가 된다. 인간은 하느님처럼 왕다운 존재이며, 인간의 한 인간의 모든 예속을 거부한다. 이처럼 히브리 창조신화는 사회적 평등을 위한 제의적 각본이 되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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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세상을 창조하다

도로테 죌레는 창조주와 인간의 친밀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든다. 모호크족 인디언 추장 사코크웨논크와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 자신의 손을 만물 위에 얹어 만물이 당신의 정신으로 충만케 하셨다. 이 위대한 신비를 우리는 믿는다. 내가 아는 한,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호크족에게 사물을 분리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신적이고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그에 합당한 경외심을 가지고 대하라고 분부하셨다.”

그리스도교 서구신학은 오랫동안 하느님의 “무(無)로부터 인간을 창조하신 초월성”만을 강조하면서, 그분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거부해 왔다. 이런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초월적 하느님은 독립적인 왕, 전사, 영웅의 전형과 가부장적 세계관이 투영된 것이다. 대조적으로 흑인 시인 제임스 웰던 존슨(James Weldon Johnson)은 하느님이 고독해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그의 시를 읽어보자.

“그러고 나서 하느님은 주위를 거닐면서,
그분이 만든 모든 것을 둘러보았다.

그분은 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분은 자신의 세상과
그 위에 사는 생물들을 보았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도 혼자이구나.

다음에 하느님은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언덕 기슭에 앉아,
깊디깊은 강가에 앉아,
머리를 손으로 싸매고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결국 이렇게 마음먹었다.
‘나를 위해 인간을 만들어야지!’”

하느님도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사랑이신 하느님’이 진짜 사랑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죌레는 서구신학이 왜 “사랑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amore)를 생각하지 못했는지 물으며, “하느님이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창조에 대한 모든 개념은 무의미하고 공허하다.”고 한다.

죌레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은 우리를 갈망하셨고 기다리셨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그냥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나를, 그리고 당신을 필요로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삶에 의욕을 잃고 하느님을 잃는다면, 하느님은 마치 잃어버린 자식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처럼 우리를 그리워할 것이다. 하느님은 몇 개 연대쯤은 잃어버려도 끄덕없는 초연한 군사령관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파울 게르하르트(Paul Gerhardt)는 <저 여기 당신의 구유 곁에 섰습니다>라는 찬송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당신은 나를 위해 태어나시고
나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네.
내가 당신을 알기 전에
나를 선택하셨네.
내가 당신의 손으로 창조되기 전에
당신이 어떻게 나의 것이 될 것인가를
당신은 홀로 생각하셨네.”

도로테 죌레는 여기서 다시 전통적인 하느님 개념을 문제 삼는다. “주님”을 뜻하는 라틴어 도미누스(dominus)는 그리스어 키리오스(kyrios)와 마찬가지로 봉건적인 전제군주를 나타내는 말이다. 자신의 신하들과 백성들을 지배하는 하느님상은 세계에서 억압과 수탈을 유지하고 정당화 하는데 가장 적합하다. 죌레는 지배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관계 맺는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

마르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하느님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충실하면서 언제나 자신을 넘어서 타인(인간)에게로 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죌레는 “절대적 무로부터 피조물을 창조했다가 그것들을 다시 무로 돌릴 수 있는 하느님, 그의 지배 의지에 인간이 전적으로 굴복해야 하는 하느님은 오늘날 믿을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예속이 아니라 결속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규정할 때, 우리는 사랑과 정의의 힘으로 창조적이고 동반자적으로 하느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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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에 이르는 창조는 끝나지 않았다

창조는 계속되는 과정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창조 과정에 동참하라고 요청한다.(이사 58,6-12) 그 창조 과정은 사람을 불의한 결박에서 풀어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우리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다.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우리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성경에 따르면, 거룩함은 하느님과 협력하여 인간이 겪는 고통을 경감시키고 세상에서 정의를 이루는 데서 드러난다. 하느님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거룩하도록 요청받는다.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마태 5,48)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행함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통해 하느님의 고유한 성품인 거룩함에 도달하도록 초대받았다.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은 <솔렌티나메 농부들의 복음>에서 니카라과의 한 농부 여인의 멋진 ‘주님의 기도’ 해설을 담았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행렬을 벌이고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예전처럼 기도와 행렬로만 하느님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결코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게 아니다. 달리 말하면, 비록 하느님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행하는 것이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이 땅에 그분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임금을 넘어서는, 선물 같은 노동

한편 도로테 죌레는 임금과 이윤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노동을 문제 삼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야만성은 노동자들에게서 노동의 존엄성을 빼앗는데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좋은 노동은 많은 대가를 받는 노동이고, 나쁜 노동은 적은 대가를 받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이럴 때 주부의 노동처럼 대가 없는 노동은 노동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우리가 노동을 임금노동으로만 생각하는 한, 노동은 우리에게 사고팔 수 있는 상품 이상이 아니다. 이것을 죌레는 ‘임금노예제’라고 부른다. 임금노예들은 스스로 비인간화 시키는 체제에 순응하며 ‘노동’ 자체를 신성시 한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입구에도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고 쓰여 있다. 그래서 죌레는 노동하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과 동료 노동자, 인류의 역사적 과업에서 분리된 상황을 ‘죄’라고 규정한다. 어떤 노동은 은총이 되고, 어떤 노동은 죄가 되기도 한다.

정말 좋은 노동은 하느님의 창조를 계승하는 노동이다. 현대의 대량생산 체제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한 문장으로 인류의 생각을 바꾸어 놓은 E. F. 슈마허는 <굿 워크>에서 “우리를 기계 부품이나 체제의 노예로 만드는, 무의미하고 지겨우며 어리석고 마비시키는 노동을 끝내 거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슈마허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나는 기계와 관료제의 노예가 되어 권태롭고 추악하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바보나 로봇, 일벌레로 살고 싶지 않다. 나는 가면이 아니라 진짜 인간을 상대하고 싶다. 내게는 사람, 자연, 아름다움, 전체성이 중요하다. 나는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노동의 기쁨 없이는 삶의 기쁨도 없다.”고 말한 것처럼, 노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노동은 창조된 인간의 사람됨의 표현이다. 우리는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노동을 ‘취미’라고 쉽게 말하지만, 이건 임금노예체제의 표현이다. 죌레는 주중에 한 번 맹인 할머니 한 분을 위해 책을 읽어주던 어느 소녀 이야기를 꺼냈다. 누군가 이 소녀가 하는 일을 ‘순전히 개인적인 취미’라고 한다면, 그녀는 당황하고 당연히 불쾌하게 여길 것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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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노동은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물”이라고 믿는다. 피터 모린은 <쉬운 글>(Easy Essays)에서 탐욕이 아니라 믿음과 자발적인 가난에 기초한 사회를 꿈꾸었다. 피터 모린은 “필요한 것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유용한 것은 가지고 있을 수 있고, 선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죽을 때는 오직 우리가 선사했던 것만이 우리에게 남는다.”고 했다. 이 말은 단순히 우리가 쓰고 남은 것을 이웃사랑 차원에서 나눠주라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여분의 것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소유이며, 그들은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분의 소유를 나누지 않고 낭비한다면 그것은 ‘범죄’행위라고 피터 모린은 말한다. 이 경우에,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요청이다. 또한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를 변화시키는 ‘연대성’의 표현이다.

또한 이 가톨릭 아나키스트들은 우리들의 노동이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그 길이다.”라는 간디의 말처럼, 수단이 목적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모든 노동이 거룩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자녀들을 위해 노동을 하지만, 이 노동의 결과가 군수품과 무기 수출, 대리전쟁이라는 거대한 살인 메커니즘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럴 때, 공장은 노동현장이라기보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폭력을 배우는 학교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서, 그리고 자연에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은 노동과 피조세계를 화해시킨다. 복음서에서 노동이 하느님의 창조를 계속 수행하는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은 예수님과 그의 친구들이 살았던 삶이다.

예수님은 어부들과 땅 없는 사람들, 여자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활동했다. 그분이 한 일은 치료하고, 배부르게 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사회적 필요를 약자들의 필요와 일치시켰다.

“생산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든, 의료산업 또는 문화산업에 종사하든 우리는 남녀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하느님이 ‘매우 좋다’고 말씀하셨던 그의 창조사업을 이어 나간다. 이렇게 보면 창조의 파괴를 가져오는 생산은 결코 ‘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범죄다.”

미국 텍사스 주의 주교 르로이 매티슨은 핵미사일을 생산하는 판텍스사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일자리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죌레는 이 요구가 정당하다고 지지한다. “살아 있는 존재들과 그 후손들, 동료 피조물들과 전 지구의 파괴를 목표로 하는 모든 노동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함께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의 공포와 폭력에 종속되어 있는 “군인은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19-23)

결국 남은 것은 우리들의 선택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멸망의 종살이에서 신음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생태계의 신음소리, 분쟁으로 고향에서 떠밀려나는 난민들, 전쟁과 계급갈등을 부추기는 경제적 제국주의, 인종적 성적 차별을 부추기는 상업문화, 이 모든 차별과 배제로 고통받는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 딸들이 나타나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 모든 가엾은 피조물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거룩한 노동만이 희망이다. 죽음의 롤러코스트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자, 그 용감한 영혼들이 하느님의 동역자로서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이 글은 <가톨릭일꾼> 2019년 8-9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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