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옷은 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부는 밤을 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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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옷은 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부는 밤을 새워
  • 양승국 신부
  • 승인 2019.08.2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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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신부 묵상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셨던 스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법어(法語)로 유명하셨던 성철 스님(1912~1993)의 글을 오랜만에 접했습니다.

1981년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셨지만, 큰 스님께서는 속세로 나오지 않으시고, 가야산 해인사에 딸린 여러 암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백련암에서 엄격한 수행을 계속해 나가셨습니다. 큰 스님께서는 자신에게나 제자들에게나 얼마나 엄격하셨는지, 그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초파일이 다가오면 다른 절들에서는 사방팔방에 수많은 연등을 달랴, 가장 큰 대목이자 축제인 초파일 행사 준비로 눈코뜰새 없이 바빴지만, 백련암은 여느때 처럼 조용했고, 등 하나 다는 법이 없었습니다.

큰 스님께서는 백련암만큼은 불자들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가야 된다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백련암 스님들은 사시사철 언제나 바빴습니다. 농사 지으랴, 김장하랴, 장담그랴, 청소하랴, 공양지으랴, 수행하랴, 하루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답니다.

1973년 당시 백련암에서 수행하던 초짜 스님들은 큰 스님의 생신날을 맞아 속으로 엄청 기대를 했답니다. 큰 스님의 회갑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목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자비심 많은 여보살님들이 이것저것 보따리 보따리 싸오실 것이고, 오늘만큼은 배 좀 두드리겠지 했답니다.

그러나 웬걸, 아무리 기다려도 보살님들은 오지 않고, 어제와 똑같은 산나물 반찬 몇가지 뿐인 보통 메뉴였답니다. 큰 스님께서는 ‘속세를 떠난 사람이 생일은 무슨 생일이냐?’며 절대로 그런 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을 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수많은 정치인들, 권력자들, 재벌총수들, 언론인들이 큰 스님을 찾아와 가르침 받기를 원했지만, 큰 스님은 그 누구든 당신을 만나려면 법당에 가서 3천배를 하고 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큰 스님께서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승려라면 무릇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느 측면으로 보나 나는 그분을 대행할 수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별 도움이 안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늘 말했습니다.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아가십시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마치 벼락이나 천둥같은 큰 스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큰 스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가톨릭 수도자들에게도 큰 의미와 깨달음을 주는 주옥같은 말씀을 참 많이 남기셨습니다.

“밥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옷은 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면 됐고, 공부는 밤을 새워 하십시오!”

“도(道)의 길은 날마다 덜어내는 길입니다. 덜고 또 덜어 아주 덜 것이 없는 곳에 이르면 참다운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최종적인 지향점을 비록 다르지만, 큰 스님께서 보여주셨던 수행자로서의 청빈하고 소박한 삶과 세례자 요한의 삶이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자신에게나 제자들에게나 엄청나게 강직하고 엄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단 1퍼센트의 에너지도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메뚜기나 석청처럼 거친 음식이나 낙타 털옷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가 아닐까?’ 기대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아닙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입니다. 나는 그분에 앞서 와서 그분이 오실 길을 닦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조차 묶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저 분입니다. 따라가십시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불의 앞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는 법이 없었습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대상이 대사제든, 총독이든, 로마 황제든 유다 군주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목이 당장 날아갈지라도, 하고 싶은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을 옳지 않습니다.”

진리와 정의, 자기 뒤에 오신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세례자 요한의 삶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우리 안에 그런 열정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삶에 ‘열정’이란 단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열정이 식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시들해집니다. 우리 내면에서 열정이 사라져버리면 우리는 순식간에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열정이 사라질 때 우리 한 평생도 고작해야 쓸모없는 시작과 무익한 종말 사이에서 소모되는 시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세례자 요한처럼 열정이 살아날 때, 아니 활활 타오를 때, 비로소 우리는 참 인간으로 참 삶을 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가 따분한 생존의 연속이 될 것인가, 하느님 안에 하루하루 흥미진진한 충만한 날들이 될 것인가는 바로 이 열정 유무에 달려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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