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방범창을 다느라 부지런한 손끝은 가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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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방범창을 다느라 부지런한 손끝은 가련하다
  • 한상봉
  • 승인 2019.08.17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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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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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백 고지 산골에 터잡고 산 뒤로 사방이 적막했다. 대여섯 가구 되는 마을 사람들이 밭에 일하러 갈 때나 이따금 들르곤 할 뿐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 없는 산골은 어쩌면 사람을 그리워하기에 안성맞춤인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무수히 마주치는 낯모르는 사람들 속에 끼여 살면서, 그 틈새를 비집고 실명(實名)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은밀한 기쁨도 좋은 일일 테지만, 전화 한 통화로 손쉽게 외로움을 해결할 수 없는 산중은 그리움을 차곡차곡 마음속에 담아둘 수 있다는, 그래서 속살마저 사람을 반가워할 줄 아는 놀라운 감수성을 지닐 수 있어서 좋다.

이따금 출타하였다가 집에 돌아오면 텅 빈 마을을 볼 때도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죄다 외출하고 나 혼자 남아서 마을을 지킬 때도 있다. 그럴 때 문득 비탈밭에서 콧노래를 부르는 인기척이 느껴지면, 고요하지만 적적한 마음에 새록새록 그리움이 쌓이기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자연과 벗하여 사는 기쁨을 이야기하지만, 도(道)가 트이지 못한 나에겐 아직 사람이 더 소중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의 집은 늘 열려 있다. 시제(時祭)를 지내러 묘소를 찾아 올라오는 사람들이 벌초할 낫을 갈러 우리집 수돗가를 서성거려도 낯설지 않고, 봄이 왔다는 소식처럼 양지바른 산등성이를 올라오는 촌로들의 걸망을 바라보는 고즈넉한 마음이 따뜻하다.

서울에 살 때 아내는 간혹 혼자 집을 지켜야 하는 밤이면 늘 불안해하였고, 그래서 창이란 창, 문이란 문엔 걸쇠를 채우고도 낯선 소리에 민감하였다. 그러나 이곳 산중에선 며칠씩 집을 비울 때도 자물쇠를 채우지 않는다. 이사올 때 마련해 둔 자물쇠가 있지만, 산골생활 2년째 들어서는 지금까지 그 물건을 사용하지 않아 지금은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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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에 빗장을 지르는 것은 결국 두려움 때문이다. 누군가 허락 없이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이 밝혀지거나, 또는 소중한 어떤 것을 함부로 빼앗길까 염려하는 것이다. 손님을 잠깐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어수선한 방안을 대충 정리하여 맞이하는 것은 당연한 예의일 것이다. 그러나 항시 문을 걸어잠가야 안심하는 마음은 바깥 세상에 대한 저항의 한 형식이거나 두려움의 결과다.

살다 보면 문을 닫아야 할 때도 있고 열어놓아야 할 때도 있다. 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줘야 할 경우도 있고, 타인에게 시간을 내줘야 할 때도 있다. 항상 제 시간을 남에게 넘겨주다 보면 더이상 줄 것이 없을 때 우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한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성장 또는 이기심에만 복종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절망하게 될지 모른다. 하느님은 우리를 곧추세워 세상으로 파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빛이 머무는 성소(聖所)이면서 동시에 빛이 지나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빛을 모아서 그 빛이 세상에 뻗어나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은 거룩한 우리의 사명이다.

문(門)이란 본래 열고 닫기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이다. 문을 여는 목적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미 그 문은 장식이 달린 벽(壁)일 뿐이다. 성령의 자유로운 바람을 막는 것이 벽이다. 그 벽을 허물어 창을 내거나 문을 달 수 있는 영혼은 복되다. 그 통로를 통하여 남의 것도 들어오고 내 것도 나간다.

산골에 들어와 살면서 도시에 두고 온 동료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편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지내왔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속에서 좀더 살 만한 세상을 일구기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하여 스스로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들이다. 나만이 자못 한가로울 수 있는, 평온한 한때를 즐길 수 있는 산골에 처박혀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도를 닦는 것도 아닌데 산중으로 세상을 피하여 도망쳐 온 것은 아닌지, 자괴감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고, 빛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투쟁에 나서는 것은 영적인 것이든 구조적인 것이든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문제는 나 자신이 얼마나 ‘목소리 없는 자의 신음’에 민감하게 마음을 열고 있느냐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들은 목소리 큰 사람들의 아우성을 뒤따라가느라고 바빴는지도 모른다. 소리가 너무 가늘고 작아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이 이젠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고통받는 자들이 소리치지 않아도 먼저 알아듣는, 섬세한 안테나가 내장되어 있는 사람이 기다려진다. 그래서 문을 열 때도 삐꺽거리지 않게 가만가만 손을 움직이면 어떨까?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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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라는 책에서 김선굉 시인의 ‘못박기’라는 시편은 참으로 가슴을 아프게 눌러왔다. 거실 벽에 못을 박으며 시인은 자기 가슴에 송곳처럼 후비고 들어오는 칼날을 느끼지 않았을까?

"거실의 벽에 붙어서 못을 박는다. 세멘못을 박는 방법은 서서히, 점진적으로, 하염없이 망치질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힘차게 몇 번 박아주는 것이다. 요즘의 못은 불꽃을 튀기며 부러지거나 든든히 박히거나 하지만, 왼손을 타고 흐르는 전율은 늘 불안하고 이가 시리다. 오히려 망치가 상하는 오늘의 못박기여. 드릴로 대문의 철판을 뚫어 보조키를 달고 염산을 자욱이 부어 하수구를 뚫는 일이 필요한데, 이런 건 다 높이높이 벽을 쌓는 일이며 안으로 캄캄히 저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알루미늄 파이프를 잘라 잇고, 볼트와 너트를 조여 방범창을 만드는 인부에게 더 든든히 죄어 달라고 당부하며 안심하는 내 어두운 가슴에 견고한 빗장 삐꺽 질린다."

못을 박으며 느끼는 왼손의 전율은 양심이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완고한 마음 때문에 저도 모르게 못을 박아온 사람들의 가슴이 얼마나 많을까? 때로는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서 못을 박고, 정의사회구현이라는 구호 속에서도 우린 은밀하게 또는 공개적으로 가련한 인생들에게 못을 치고 있다. 그네들의 가슴으로 통하는 통로를 차단하고, 낯선 얼굴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며 내 영혼의 방범창을 다느라 부지런한 손끝은 가련하다. 오늘은 집안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 자물쇠를 찾아내 아예 내다 버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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