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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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아버지
  • 한상봉
  • 승인 2019.08.12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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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2
사진출처=pixabay.com

낯선 숨결에 머무는 눈길
길섶에도 길바닥에도 화관처럼
피어난 노오란 양지꽃,
사람에게 밟혀도 여지없이 환하게 웃는
그 이들은 티밥처럼 작은 목숨이다.
응시하는 자에게만 화답하는 하느님의 얼굴이다.
마음 없이 스치고 지난 낯선 얼굴들 사이로
문득 떠오르는 한 줌 햇발이다.

 


그날은 무척 추운 날이었다. 아버지가 손톱 끝부터 새파랗게 변하면서 돌아가셨던 날은 햇살이 투명했지만, 투명한 공기를 가르고 바람이 맵게 불어댔다. 백석에 묘를 쓰고, 삼우제를 지내러 가던 날은 눈이 사정없이 내렸다. 공동묘지 앞산이 절경이었다고 말하면 욕될까? 발목이 푹푹 빠지는 길을 걸어서 아버지 묘에 술을 붓고 돌아왔다.

얼마 전 산골마을에 첫눈이 내리던 날, 나는 아버지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가셨을까? 나는 죽어서 간다는 하늘나라가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꼭 천국에 계실 것이라고 다짐을 두고 있다. 살아서 고생바가지로 살던 사람들에게 그나마 천국마저 없다면 얼마나 목숨이란 것이 부질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대뜸 ‘종교는 인민의 아편’ 운운할지도 모른다. 죽어서 좋은 데 가니 현세에선 억울해도 참고 살라는 어설픈 설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나면 그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면서 기꺼이 고난을 받았던 예언자들 역시 하늘나라가 있다면 거기서 영복을 누리도록 비는 마음 절실한 까닭이다.

사람들은 이유없는 고통을 받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생애를 감당하면서 살기도 한다. 산다는 것은 그저 견디는 것이라고 여겨야 했던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이 그래도 비빌 언덕 하나쯤 남몰래 갖고 있다고 그게 잘못된 것일까? 늘 시시비비를 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억울한 일 당할 일 없고, 나름대로 능력껏 자기 실현을 할 수 있는 조건인 경우가 많다. 세상엔 ‘어쩔 수 없이’ 사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게 삶이라고 어깨를 움츠리는 사람들도 많다.

처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시집이라고 갔더니, 식구들이 이불 한 채 없이 거적을 깔고 자더라는 것이다. 그만큼 궁핍했던 집안에서 어머니는 손이 부르트고 발이 헐도록 일을 했다. 식수가 귀하던 시절엔 물을 져나르고, 과일이며 생선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아버지는 일본 사람 밑에서 목수일을 배워서 문짝이며 창문을 만들곤 했지만, 솜씨 좋은 목수는 되지 못했다. 낮이고 밤이고 일한다고 형편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아버지는 술이 늘었고, 결국 그 때문에 병을 얻어 일찍 돌아가셨다. 평생 남한테 아쉬운 소리 잘 못하고, 어머니 몰래 김치 퍼다가 남 주었던 아버지. 내가 태어나던 날도 아버지는 윗마을 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한다. 아버지는 세상에 태어나는 나를 보고 어떤 심경이었을까? 안쓰러우셨을까, 아님 조금은 기뻐하였을까? 없는 살림에 육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난 터이고 보니 아마도 한숨 먼저 내쉬고, 그래도 생명이라고 피붙이라고 안아주셨을 법하다.

그날 밤
아버지는 쓰러진 나무처럼
집에 돌아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

‘꽃피는 아버지’라는 이성복의 시편에서처럼 모든 나무는 모든 가랑잎을 귀여워하는가?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 하고 안아주는 것일까? 이런 아버지를 두고 천국조차 없다고 한다면 뭔가 인생이 더 삭막하고 부조리하게 여겨지지 않을까? 어떤 이유에서든지 지금 가난한 사람들은 좋은 날을 기약받아야 공평한 게 아닌가? 지금 억울한 사람들이 당당하게 웃으며 먼저 축복의 손을 내미는 다른 세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길을 가다가, 방금 지나쳐 온 낯선 사람의 뒷모습에서 간혹 쓸쓸한 표정을 읽어내는 지혜가 필요한 시절이다. 그림자 없는 목숨이 없듯이, 앞만 보고 걸어가는 생애는 불행하다. 때때로 뒤돌아볼 줄도 알고, 타인의 그림자를 보며 은밀하게 몸을 숨긴 내 그림자도 다시 찾아볼 일이다.

눈이 내리면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처럼 꼭 그만큼씩 그늘진 인생을 위해 ‘복 받으세요!’ 이런 말 전하고 싶다. 그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을 지나치면서, 입속에서 응얼거리듯 혼자말로라도 축복의 말 한마디 남기고 싶다. 우리가 내어준 그 말이 은총이 되어 눈처럼 쌓일 것이다.

새해엔 전철 앞좌석에 앉은 사람을 보고도 마음속으로 복을 빌어주고, 공중전화기 앞에서 뭔가 하소연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복을 빌어주면 어떨까? 우연히 눈길이 마주친 아이를 위해서도 찰칵 사진 찍듯이 ‘복 받아라!’ 하면 어떨까? 인생이 깔끔하게 생각대로 매듭지어지는 일 없어 불행하다고 느껴질 때는, 내게 올 복이 누군가에게 나누어졌다고 여기면 어떨까?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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