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 교회의 문턱에서 하느님 기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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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 교회의 문턱에서 하느님 기다리기
  • 한상봉
  • 승인 2019.08.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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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8월 24일 애시포드 요양원에서 과로와 영양실조로 34살의 나이에 이승을 떠난 시몬 베유. 그녀의 <신을 기다리며>라는 책이 번역되었다. ‘신을 기다리며’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를 페렝 신부는 서문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인이 돌아오기를 늘 깨어 기다리는 종을 연상했다.”고 적었다. 물론 그 주인은 하느님이었다. 애타는 갈증처럼 가톨릭신앙에 천착해온 시몬 베유, 그러나 그녀는 평생 영세 받지 않은 채 ‘가톨릭신비주의자’로 살았다. 그녀는 “교회 문턱에 꼼짝 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대학시절에 <불꽃의 여자 시몬느 베이유>라는 책으로 감동을 주었던 시몬 베유. <뿌리내림>과 아울러 이번에 <신을 기다리며>라는 책을 번역한 이세진 프란체스카 작가를 홍대입구 북카페 리벤에서 만났다.

 

이세진 번역작가는 시몬 베유를 매력적인 여성이라면서, 아는 대로 살았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사진=한상봉
이세진 번역작가는 시몬 베유를 매력적인 여성이라면서, 아는 대로 살았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사진=한상봉

“저는 하느님, 그리스도, 가톨릭신앙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고, 특별히 가톨릭전례와 그레고리안 성가, 성당과 모든 종교예식을 사랑했던 베유였지만, 그녀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베유는 신앙과 교회를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 당혹스러웠다. 이세진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베유는 집단적인 것, 전체주의 등을 상당히 혐오했습니다. 자신은 굉장히 부화뇌동하는 성향이 있어서 잘 휘둘리는 편이고,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독일청년 스무 명이 제 앞에서 나치스의 노래를 합창한다면 제 영혼의 일부나마 당장 나치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죠. 이런 약점을 피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게 베유의 생각이었어요. 베유는 가톨릭전례나 조국을 사랑했지만, 집단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이 자칫하면 타인의 고유한 삶을 침범하고 뿌리 뽑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죠.”

시몬 베유, 사회구조로서의 교회 거부
“교회에 대한 충성이 신앙을 삼켜버려”

이세진 작가는 “교회에 대한 사랑이 ‘신앙’을 대체하는 것을 시몬 베유가 가장 염려했다.”고 전했다. 시몬 베유는 집단이 힘을 갖게 되면 마음에서 신을 대체하게 되고, 결국 우상을 섬기게 된다고 여겼다. 국가도 우상이 되면 국가주의가 되고 히틀러처럼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타민족에 대한 폭력적인 '뿌리뽑힘'을 강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단 논쟁이나 인종주의도 여기서 나왔다. 그런 점에서 베유는 집단주의와 전체주의를 악의 근원으로 여겼다. 베유에게는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이세진 작가는 말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십자군이나 종교재판을 인정했던 성인도 더러 있었고, 교황 가운데도 나쁜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집단이 힘을 갖게 되면 교회라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게 베유의 생각입니다. 베유는 가톨릭교회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런 성인과 교황들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결국 하느님에 대한 갈망보다 ‘제도로서의 교회’가 더 크게 마음을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거죠. 교회가 성인들에게도 해를 끼쳤다면 한없이 연약한 자기 같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해롭겠냐고 시몬 베유는 걱정했습니다. 자기의 진정한 마음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교회에 충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라고 베유는 강조했습니다.”

사회주의자였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고, 가톨릭신앙에 심취했지만 영세를 받지 않고, 철학자였지만 책상에서 물러나 공장으로 포도밭으로 전쟁터로 나갔던 시몬 베유는 “저는 어떤 인간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으로 외따로 살아가게끔 예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포도밭에서 일할 때에도 늘 ‘주님의 기도’를 암송했던 시몬 베유는 교회 밖에서, 무신론자들처럼 교회에서조차 배제된 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 했다.

“저는 어떤 인간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이방인으로
외따로 살아가게끔 예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을 기다리며], 시몬 베유, 이세진 옮김, 이제이북스, 2015.
[신을 기다리며], 시몬 베유, 이세진 옮김, 이제이북스, 2015.

<신을 기다리며>에서 시몬 베유는 ‘신에 대한 암묵적 사랑의 형태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세진 작가는 이를 두고 “베유는 무신론자들뿐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전에 살던 사람들이나 예수를 몰랐던 시대와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보편적 구원에 관심이 있었다”면서 “꼭 예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지고의 경지에 이르면 구원이 가능하다고 여겼다.”라고 설명했다. 이것을 베유는 ‘암묵적 사랑’이라고 표현하는데, 세상의 아름다움과 이웃에 대한 사랑, 종교예식에 대한 사랑과 우정이다. 여기서 우정은 하느님의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이세진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 사람과 애착관계에 있으면서 상대방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기란 인간적인 사랑에서는 어렵죠. 그렇지만 하느님이 바라시는 사랑은 거리를 인정하는 사랑입니다. 그게 우정인데, 시몬 베유는 이게 가능하려면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은총이 필요하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고 욕심을 내는 것은 불순한 사랑이고, 자유롭지 않은 결박된 사랑은 굴종이라는 것인데, 두 친구는 하나가 아니라 둘로 존재해야 하고, 하나가 되려고 소망할 권리가 있는 대상은 오로지 하느님뿐이라는 게 베유의 생각입니다.”

공평무사하게 누구에게나 햇빛과 비를 고루 뿌려주시는 하느님처럼, 개별적인 사람에게 보편적인 사랑을 쏟는 게 참된 우정이라고 베유는 말한다. 한편 시몬 베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노예들의 종교’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곧 바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인 ‘야훼’가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이었음을 기억하게 해 준다. 시몬 베유의 표현대로 한다면, 노예들은 중력의 법칙에 짓눌린 사람들이다. 이를 이세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베유는 강자가 있고 약자가 있으며,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며, 어떤 사회구조가 사람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면, 이 질서대로 사는 것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곧 ‘은총’인데, 이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지요. 시몬 베유는 이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분을 기다리고 바라보는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베유는 자신 역시 ‘노예의 낙인’을 받았다고 여겼죠.”

그리스도교는 ‘노예들의 종교’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복종’ 강조

은총을 기다리는 노예들이 믿는 종교가 ‘그리스도교’라는 것인데, 이세진 작가는 또 다른 의미의 노예에 대해서도 시몬 베유가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바로 “가서 사랑하라고 이 세상에 우리를 노예로 보낸 주인이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인인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다짐하는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몬 베유는 1938년에 솔렘 수도원에서 성지주일 미사에 참석했으며, 몇 달 후에 신비체험을 했는데, 이를 “그리스도가 내려와 나를 안아 주셨습니다.”라고 표현했다.

시몬 베유는 그리스도교를 '노예들의 종교'라고 말했다.
시몬 베유는 그리스도교를 '노예들의 종교'라고 말했다.

이세진 작가는 “시몬 베유는 천성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에게 시선이 가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베유는 ‘그 당시의 노예’라고 말할 수 있는 노동자들과 농부들처럼 거친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정말 그들처럼 되기를 갈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체포되어 심문을 당했을 때, 심문관이 “이러다가는 창녀들과 함께 옥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을 때, 베유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그 바닥을 알고 싶었어요. 그 세계에 들어가려면 옥살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몰랐네요.” 자청해서 불행한 자들의 세계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시몬 베유 같은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자신을 그 불행한 사람들과 일치시키고, 그 안에서 하느님께 시선을 돌릴 줄 알았던 시몬 베유만이 누린 은총이었다.”고 이세진 작가는 말한다.

노예들의 종교를 사랑한 시몬 베유는 조지 헐버트가 지은 <사랑>이라는 시를 암송하는 중에 신비체험을 했다고 한다.

“사랑이 내게 오라고 하나
죄를 더럽혀지고 추악한 내 영혼은 뒷걸음질 치네.
그러나 사랑은 기민한 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저하는 나를 보시고
다가와 다정하게 물으시네,
행여 내게 부족한 것이 있는지.”


“하느님의 자비는 위로할 수조차 없는 비통함 속에서 빛난 것”이라고 믿었던 시몬 베유는 불행을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베유는 “불행은 잠시나마 신의 부재를 낳는다.”라고 했는데,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공포가 영혼을 뒤덮었을 때, 사랑할만한 것이 전혀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 영혼이 사랑하기를 그치면 하느님은 영영 없게 된다.” 그래서 시몬 베유는 이렇게 말한다.

“영혼이 텅 빈 가운데서도 계속 사랑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영혼의 미세한 일부라도 여전히 사랑하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면 욥에게 그러했듯이, 언젠가 하느님이 그 영혼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영혼이 사랑하기를 그치면 그때부터 그 영혼에게 이승은 지옥과 다를 바 없다.”

시몬 베유는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을 찾는다.”고 믿었다. 그러니,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하느님을 바라고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뿐”이다. <신을 기다리며>라는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시몬 베유는 “주인이 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열어 드리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문간을 지키는 종”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 이세진 작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이 나를 찾으시도록 기다리는 일”이라면서, “시몬 베유는 인간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선을 기다리며 악을 멀리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기다림은 소극적인 것 같지만, 어떤 추구보다 한층 더 강렬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이외에 모든 걸 포기하고 불행 속에서도 그분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시몬 베유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베유는 하느님을 기다리며,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불행한 이들 곁에 항상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했다. 거기서 노예를 해방하시는 그분을 마침내 만날 것이므로. 시몬 베유는 “나를 버리고 너에게 가마.”라고 말했던 전태일처럼 살다가 예수보다 한 해를 더 살고 34살에 죽었다.

 

* 이글은 <뜻밖의 소식>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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