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어떻게 정치권력에 참여해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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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어떻게 정치권력에 참여해 왔는가?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08.0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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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정치와 신앙-1

한국천주교회는 현대사 안에서 사실상 정치적 입장을 포기한 적이 없다. 때로는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하고, 때로는 적극적인 정치개입주의로 나서기도 했다. 교회가 정치권력에 참여하기 위한 행동에 돌입하기도 하고, ‘공동선’의 관점에서 사회참여에 나서기도 했다. 보수적 인사들이 즐겨 내세우는 ‘정교분리’ 원칙조차도 교회사 안에서는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폐기되거나 유보될 수 있는 원칙이었다.

실상 ‘정교분리’ 원칙은 교회사 안에서 ‘성직자들의 직접 정치참여 금지’ 정도로 남아있을 뿐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교회와 성직자들의 정치적 관심은 그 자체로 타당성을 따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며, 다만 그 정치적 태도가 ‘복음’적인지 물어볼 수 있을 뿐이다.

 

 

해방공간의 한국교회와 노기남 대주교 적극적 정치 개입 
“교회당국의 지시를 받아 가톨릭 후보에 투표하라!”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노기남 대주교를 중심으로 미군정 및 이승만, 김구 등 정치세력과 교섭하는 한편 반공주의 사상투쟁에 몰두했다. 1947년에 <가톨릭청년> 등 교회매체를 통해 새 국가 건설에 대한 가톨릭적 대안을 제시했고, 1948년 총선을 앞두고는 세속사회에 대한 교회와 신자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전면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나섰다. 이는 일제식민통치아래서 호교론적 차원에서 공언해 오던 정교분리, 정치불개입 원칙을 완전히 폐기한 결과였다. 박해기와 일제식민지 경험을 통해 교회는 교회를 보호하는 방안으로 정치권력의 뜻에 수긍하고 협조하는 태도에서 더 나아가 정치권력에 직접 참여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5.10 총선거를 즈음해 한국교회가 정치개입주의로 나선 배경에는 미 군정청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과 선교사들을 통한 국제적 지원체계가 있었다. 또한 이미 한민당 등 우익세력과 연합할 수 있는 사상적, 인적, 물적 토대가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고, 파시즘과 나치즘에 직면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정치적 불간섭주의에 대한 교황청의 입장변화가 한국교회의 사목방침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교황 비오 12세는 “지금은 행동이 필요한 시대”라고 선언했으며, 이탈리아 총선거의 와중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항하여 가톨릭정권을 세우려고 범교회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6년 3월 12일 성베드로 성전에서 4만 명의 청중 앞에서 “천주와 종교의 정당성을 인증(認證)하는 자에게만 투표하라”고 권고했다.

 

 

한국교회는 천주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확장하고, 총선거를 통한 정치권 진입을 위해 1948년 1월 11일 ‘가톨릭 시국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김철규 신부를 대표로 임명했다. 천주교회는 선거를 앞두고 ‘가톨릭교회의 사회정치적 입장’을 두루 선전하기 위하여 <가톨릭청년>에 “가톨릭적 입장에서 각계(各界)에 보내는 말”을 여러 가톨릭 저명인사의 입을 통하여 발표했다.

심지어 <가톨릭청년> 1947년 5월호에는 “가톨릭 입후보자의 면모”라는 사설과 함께 장면을 비롯한 가톨릭신자 입후보자의 광고를 실었다. 이 광고에 등장한 이북(李北) 후보의 경우엔 “천주교 예비신자임”이라고 덧붙여 밝힌 뒤 본문 하단에 투표용지를 그려 넣고 친절하게도 이북의 칸에 공(0)표 찍은 사진을 싣고 있다. 장면(張勉) 후보의 경우에는 몇 면에 걸쳐 그의 사람됨을 극구 칭찬한 뒤 “우리 가톨릭교회의 대변자 장면씨를 국회에 보내자”고 주장했다.

교회가 이처럼 선거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가톨릭청년> 1948년 5월호에 실린 ‘투표자에게 고함’이라는 제언에서 알 수 있다. 이 제언은 “우리는 새로운 사상 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이것이 민족지상명령일 것”이라며 “5월 10일 총선거는 4천년의 우리 역사를 더욱 빛나게 할 수도 있고 조국을 영원히 멸망의 심연에 던져버릴 수도 있는 생사기로에 선 사업”이라고 밝혔다. 이어 “새로운 국회에 가톨릭의원을 보내야 하는 것은 췌언을 요치 않을 것”이라며 “가톨릭후보자에 투표하지 못할 경우에는 교회당국의 지시를 받으라”고 덧붙였다.

 

[가톨릭청년] 1948년 5월호에 실린 제언 ‘투표자에게 고함’
[가톨릭청년] 1948년 5월호에 실린 제언 ‘투표자에게 고함’

총선이 끝나고 노기남 대주교가 중심이 되어 서울교구에서 6월 20일에 ‘독립촉구를 기원하는 대례미사’를 봉헌했는데, 여기서 독립이란 ‘단독정부 수립’을 뜻한다. 이 자리에는 노 주교와 교황사절 방파트리치오 주교와 주례를 맡고, 이승만과 조병옥이 미사에 참례해 답사를 했다.

이 사건은 당시 한국천주교회 교도권과 이승만 세력이 얼마나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방 주교는 이승만과 장면을 도와서 남한 단독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받을 수 있도록 했는데, 통일정부를 갈망하던 백범 김구가 1949년 6월 29일 천주교회에서 ‘베드로’를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 선종한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이었다.

대구교구 최덕홍 주교
"반종교, 반교회 입후보자에게 투표함을 금함”

[가톨릭청년] 1947년 5월호에 실린 광고에서 이북(李北) 후보의 경우에 “천주교 예비신자임”이라고 덧붙여 밝힌 뒤 본문 하단에 투표용지를 그려 넣고 친절하게도 이북의 칸에 공(0)표 찍은 사진을 싣고 있다.
[가톨릭청년] 1947년 5월호에 실린 광고에서 이북(李北) 후보의 경우에 “천주교 예비신자임”이라고 덧붙여 밝힌 뒤 본문 하단에 투표용지를 그려 넣고 친절하게도 이북의 칸에 공(0)표 찍은 사진을 싣고 있다.

한국교회는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총선거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게는 어려운 조건의 선거였다. 이승만은 정부 수립 이후에 반민족자 처벌을 방해함으로써 친일혐의를 벗을 수 없었고, 실패한 토지개혁으로 원성을 샀다. 당시 대구교구의 최덕홍 주교는 <총선거에 임하는 가톨릭의 태도>라는 교구장 담화문을 발표해 “가톨릭 정신을 입법부에 널리 침투하기 위하여 존경과 신뢰를 받으며 정신적으로 우수하며 또 강력한 성격도 가진 가톨릭 대의원을 많이 보내야 할 것은 췌언을 요치 않는 바로서 본 주교는 교구 내 모든 신자들에게 이를 위하여 특별히 천주께 기구하며 각자의 직분과 역량에 따라 힘쓸 것”을 촉구했다.

또한 이 담화문에서는 투표지침을 정해 신자들에게 공지했다.

“① 총선거 일에 모든 교우는 가급적 미사에 참례하고, 국가를 위해 기구하며 될 수 있으면 영성체할 것. ② 반종교, 반교회 입후보자에게 투표함을 금함. ③ 교우 중 교회를 대표할 만한 인사(열심수계하며 교우다운 생활을 하는 자)가 출마하였을 때에는 교우들은 적극 후원할 것이요, 투표구에 교우 입후보자가 없는 지방은 가톨릭교회를 이해하고 옹호하는 친종교적, 친교회적 후보자에게 투표할 것.”

그러나 총선 결과는 교회가 우려했던 바대로 남북협상파, 단정반대 및 중도세력을 포함하여 무소속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해 무려 62.9%(총 210석 중 126석)를 차지했고, 지배계급이며 친여당적 성격을 지닌 대한민국당이 11.4%, 구지배세력이면서 야당계인 민주국민당이 11.4%를 차지했다. 제1대 국회의원 중 재선된 의원은 겨우 29명뿐이었다. 만약 한국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한 이승만은 실각하고 중도세력 중심의 연립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당연히 몰락할 이승만 정권을 구해주었다.

한편 1950년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과 결별한 장면은 자유당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서게 된다. 이와 함께 정치권력의 주류에서 밀려난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과 각을 세우면서 박해에 직면했다. 이승만 정권은 1958년 당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취임하려 했던 박양운 신부의 임명을 ‘천주교 신부’라는 이유로 거절했고, 1959년도에는 소록도의 교우 의사를 단순히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파면했다. 또한 당시 가톨릭 소유였던 <경향신문>을 무기 정간시켜, 4.19혁명 이후에야 복간할 수 있었다. 4.19혁명 이후 민주당 집권으로 천주교회는 호기를 맞이했으나, 장면 총리의 집권기간이 너무 짧았다.

 

박정희 대통령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이효상(맨 오른쪽)
박정희 대통령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이효상(맨 오른쪽)

군사정권에 참여하는 교회…‘유신의 반려자’

1961년 박정희 육군 소장이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키자, 상황을 지켜보던 한국교회는 서둘러 쿠데타정권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대구교구에서 발행하던 <가톨릭시보>에서는 “군사혁명과 반공정책: 반공은 국토통일보다 중요하다”라는 기사를 통해 “우리가 통일을 원하는 것은 국민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인데 공산치하에서는 잘살 수 없으므로 군사혁명정부가 국시를 반공으로 삼은 것은 현명한 정책이다.…(중략) 또 이 땅이 공산화되더라도 통일이 되어야 한다든가 공산당의 음모를 알면서도 민주주의에 충실하기 위하여 언론집회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가톨릭시보> 1961.5.28; 280호)이라고 발표했다.

그뿐 아니다. 한국교회는 1961년 9월 10일 간담회를 갖고 쿠데타 군부정권이 추진하던 ‘재건국민운동본부’에 가입하여 노기남 대주교를 총재로 한 ‘재건국민운동 천주교 서울교구추진회’를 결성해 정부 시책에 협조했다. 그리고 한국교회 주교단은 1961년 12월 4일자로 “영육의 각 분야에서 신앙을 실천하라!”는 교서를 발표해 “오늘날 우리 혁명정부는 재건국민운동을 부르짖고 국민 각자의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는 정신적 혁명을 모든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면서 “우리 신자들은 신앙의 정신으로 재건국민운동에 적극 협력하라!…(중략)특히 신자 지도를 맡은 모든 본당 신부들은 주일 강론 중에서도 신자들에게 이러한 정신과 실천을 강조해 주기 요망하는 바이다”라고 전했다.

한국교회가 해방공간에서 정치세력화를 위해 나섰으며, 가톨릭의 얼굴이던 장면 총리가 집권했던 민주당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린 군사정권을 다시 지지한 것은 ‘정치권력’을 따르는 종교집단의 비굴한 모습을 잘 드러낸다. 힘이 있으면 정치권력의 열매를 따먹고, 힘이 약하면 정치권력 뒤에 숨는 모습이다. 결국 해방 이후부터 5.16군사쿠데타 직후까지 교회는 여전히 일제강점기에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고 자신을 변호했던 교회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는 교회의 ‘정치개입주의’가 초래한 비극이다.

 

민주공화당 당의장 임명장을 받고 있는 이효상

대구대교구, 정치세력화에서 정권유착으로

이러한 ‘정치개입주의’가 지역교회 현상으로 극명하게 드러난 곳이 대구대교구다. 대구를 ‘이효상의 후예들의 도시’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62년 대구대교구의 서정길 대주교의 권유로 <천주교회보> 편집장을 역임하고 <가톨릭청년>에 왕성한 기고활동을 벌였던 이효상(이문희 대주교의 부친)이 민주공화당에 들어가면서다. 이효상은 1963년 국회의장으로 피선된 뒤로 8년(6대, 7대)동안 의장직을 맡았으며, 1972년에는 유신체제 아래서는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당 총재 상임고문 등을 맡으며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 요직에 있었다.

이효상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과 힘겹게 다투던 박정희 후보의 선거연설회에서 대구지구당 위원장 자격으로 사회를 맡아보면서 박정희에게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당시 계파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박정희의 신임을 받아 국회의장이 되었다. ‘박정희의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효상은 박정희 집권 전반부인 8년 동안 국회의장을 맡으면서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안정 기반을 마련한 1969년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박정희의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대구대교구 소유의 <가톨릭시보>(<가톨릭신문>의 전신)는 1963년 3월 16일자 ‘정치체질 개선의 본뜻-우리는 전환기에 서있는가’라는 사설에서 “교회는 현실정치에 직접 간여하기를 극력 피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특히 공식장소에서 정치에 언급하거나 사담으로라도 교회 울타리 안에서 그런 것을 비친다면 좋은 표양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정치 불간섭주의’를 내세웠다.

1971년 4월 17일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효상은 민주공화당 경남지부 연차대회에서 “대통령으로 모실 분은 박정희 씨 오직 한 분밖에 없다”면서, “후진국에 있어서 군 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엔 흔히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다. 국가의 지도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야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뒤 촛불시위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뒤 촛불시위

유신정권 이후 박정희는 초법적 권력을 휘두르고, 언론에 재갈이 물리고, 민주인사들을 감옥에 보내며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1976년 3.1절 명동성당에서 7명의 천주교 사제들과 문익환, 김대중 등 재야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 사건이 발생하자, 이효상은 “만일 존엄한 지성소가 정치의 선전장 혹은 정치의 소굴이 되었다면 이것이 간단히 묵과할 문제이겠는가?”라며 사제들을 공박했다.

대구대교구는 1980년 광주학살을 딛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도 우호적 태도를 견지했다. 제5공화국이 선포되고, 해산된 국회를 대신해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각종 악법을 쏟아냈다. 이때 입법회의에는 대구대교구의 이종흥, 전달출 신부가 참여했다. 특히 전달출 신부는 대구대교구 소유의 <대구매일신문>과 <가톨릭신문사> 사장 출신으로 한국반공연맹 이사를 역임했으며, 그 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대구대교구의 권력유착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방송사와 언론사들이 강제 통폐합 될 때, <매일신문>이 유일한 대구지방지로 남는 특혜를 누렸다.

결국 교회의 ‘정치개입주의’는 ‘정치불간섭주의’와 동전의 양면처럼 작용한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유착해 기득권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정치개입주의’를 작동시키면서, 교회 안에서는 ‘정치 불간섭주의’를 표방하면서, 교회가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길을 차단한다. 대구뿐 아니라 청주교구와 대전교구, 수원교구 등의 고위성직자들은 실제로 정치 불간섭주의를 표방하면서 독재정권과 사회 불의에 침묵함으로써 성지개발 과정의 특혜와 꽃동네 등 사회복지기관 등을 둘러싸고 사실상의 종교적, 사회적 이득을 취해왔다. 그 결과 해당 교구는 교황청이 신설한 ‘정의평화위원회’도 오랫동안 가동되지 못했으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참여하는 사제들도 소수였다. 그러나 최근에 대구대교구, 대전교구, 수원교구 등에 정의평화위원회가 재출범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현상이다.(계속)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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