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윤리적 상상력으로 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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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윤리적 상상력으로 소설을
  • 방진선
  • 승인 2019.08.0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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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청준 선종 11주기

존경하는 소설가 이청준 선생님 (1939년 8월 9일 - 2008년 7월 31일) 善終 11주기!
한 많은 세상사! 선생이 가신 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얼마나 깊은 한이 맺혔을까!

<이청준문학전집> 편집위원회의 작품세계 해설을 읽으니 선생의 몇몇 작품들이 끌어 당기는듯 합니다. 

“맺힌 응어리는 풀어야 한다.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풀리기보다 자꾸 맺히기 쉬운 게 우리네 삶이고, 그래서 삶이란 저으기 한스럽다. '남도사람'연작-<서편제>(1976년) <소리의 빛>(1977년) <선학동 나그네> (1979년) <새와 나무> (1989년) <다시 태어나는 말>(1981년) -에서 이청준은 한 많은 세상, 맺힌 현실을 말로 열고 소리로 풀어간다. 그래서 한은 용서를 통해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로 승화된다. 사람 사이에 진실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공동선의 꿈을 더불어 소리할 수 있게 한다. 동양적 정신주의의 비의를 바탕으로 민족심상의 무늬를 어루만지면서 작가는 온전하고 그윽한 삶의 진실에 날개를 달아주고자 한다. 이청준, 그는 척박한 황무지에서 날아오르는 영혼의 비상학(飛翔鶴)을 꿈꾸는 작가이다.”

이청준 선생의 문학과 인생!

“다른 누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혹은 부끄럽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열망이 이청준 문학의 정신적 핵자이다.” (서영채, " 이청준 문학의 발화점들-이청준 10주기 문학포럼"2018.9.28)

 

三十而立 작가의 순정한 초심!

“문학의 양심은 모든 인간질서의 최종적인 것, 바로 인간 영혼 그것으로 생각되었으며, ... 저는, 보다 넓은 인간의 영토를 획득함으로써 이를 윤택하게 하고, 또 이미 획득한 영토는 이를 수호함으로써 그 가치를 확인해 가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저의 노력을 보태어, 이 고마운 뜻에 보답하려 합니다” (<병신과 머저리> 제13회 동인문학상 수상 답사1967년)

四十不惑 작가의 서늘한 결기!

“농담처럼 들리는 얘기지만, 저는 항상 제가 도달한 것의 마지막 것을 썼어요"(1981년) !

六十耳順 작가의 따뜻한 정감!

“비록 너나 네 어려운 이웃들에게 그것을 직접 나눌 수는 없더라도, 누가 너를 위해 자기 몫의 절반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선생님의 도시락>2002년) !

七十從心所欲 
작가의 임종게(臨終偈) !

“이제 석양녘 장 보따리 거두는 심사 속에 오늘 이 책을 꾸미다 보니 그동안 가슴 한구석으로 소리 없이 비켜 앉아있던 여러 이름들이 새록새록 그리운 정회로 피어난다”(생애 마지막 소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서문.2007년)

선생의 문학을 ‘윤리적 상상력’으로 요약하는 글을 읽으며 여전히 ‘정치적 상상력’만이 난무하는 이 시대의 병폐을 치유할 선생의 처방전을 헤아려 봅니다.

선생님의 안식을 기도드립니다.

“내 생각에 이청준 문학을 아우를 수 있는 말은 ‘윤리적 상상력’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1980년대를 지배한 ‘정치적 상상력’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것이고 1990년대를 풍미한 ‘일상적 상상력’보다 더 긴급한 어떤 것이다. 비근한 예로 최근 이창동 감독에 의해 <밀양>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단편 <벌레 이야기>(1988년)가 있다.

내 아들을 유괴해 살해한 자가 종교에 귀의해 신의 용서를 받았다. 그렇다면 나는 뭔가. 나는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처참한 심정으로 어머니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자살을 택한다. 용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도대체 누가 하는 것인가. 이 작가가 던져놓는 윤리적 의제는 언제나 손쉬운 대답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면모는 지난해 말에 출간된 그의 마지막 작품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열림원)에서도 여전하다. 과거사 청산을 소재로 한 중편 <지하실>이 대표적이다. 선악을 가리기보다는 모두가 ‘가해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전언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런 논리가 어떤 이들에게는 ‘진실’보다 ‘화해’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여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진실’이라는 것이 확연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거친 선악 분별이 외려 ‘진실’을 훼손할 수도 있다면? 과연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논란은커녕 지루한 평화를 구가하는 한국 소설의 현황을 생각한다면, 이런 윤리적 상상력이 우리에게는 더 많이 필요하지 않은가. 

... 7월31일에 선생이 영면하셨다. 소설이란 그저 재미난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많아졌다. 요즘에는 작가도 더러 뜻을 같이하는 것 같다. 이청준 문학을 불태우지 않는 한, 소설은 이야기 이상이다. 나는 <삼국지> 세트를 앞으로도 구입할 생각이 없지만, 완간되면 30여 권에 이를 고인의 전집은 구비하려 한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피 끓는 영웅의 활극이 아니라 피맺힌 윤리적 상상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생전에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했다. 이제야 삼가 절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신형철, 2008년 8월 12일 시사인 제48호)

방진선 토마스 모어
남양주 수동성당 노(老)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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