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예루살렘 행: 제자들은 모르고, 민중들은 따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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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예루살렘 행: 제자들은 모르고, 민중들은 따르고
  • 김진호
  • 승인 2019.08.0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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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메시아 ― 예루살렘 유월절의 정치학-1
영화 [Killing Jesus] 스틸 컷.
영화 [Killing Jesus] 스틸 컷.

알다시피 예수는 갈릴래아 회당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었을 때 호숫가를 새로운 활동 중심지로 삼았다. 호숫가 지역이 새로운 활동 거점이 된 것은 유사시에 국경 밖으로 이동하는 데 용이하다는 점이 특히 유효했겠다. 실제로 예수는 배 위에서 호숫가에 앉은 대중에게 하느님나라 운동에 대하여 설파하곤 했다.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마르 4,1)

한편 예수일행은 갈릴래아 밖으로 간 적도 있었다. 한번은 ‘두로 지역으로’ 갔는데,(마르 4,24) 거기에서 시로페니키아 태생의 한 헬라여성(귀부인)을 만난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서 ‘두로 지역으로’라는 표현은 페니키아 지역의 가장 유명한 도시국가의 성읍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두로 외곽 끝쪽의 어느 촌락 안으로”(εις τα ὅρια Τυρου)라고 번역하는 게 정확하다. ‘호리온’(ὅριον)이라는 그리스어는 ‘변경지대’라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또 요르단 강 건너 데카폴리스 중 하나인 게라사 시 주변의 한 지역에(εις την χωραν των Γερασηνων) 갔다가 ‘군대귀신’ 들린 이를 만났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마르 5,1) 여기서 “에이스 텐 코란 톤 ~”은 ‘주변지역으로’를 뜻한다. 그 외에 필리피의 영토에 있는 큰 도시 카이사리아 인근의 촌락들에서 활동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마르 8,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εις τας κωμας Καισαρειας της Φιλιππου) 길을 떠나셨다.“) 그 이야기에 이어지는 유명한 ‘변화산 설화’가 더욱 유명하다.(마르 9,2~7)

이상에서 보듯 예수는 갈릴래아에 있든 타국 땅으로 가든 예외 없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이제까지의 행보와는 다른 양상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32)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다(Ησαν δε εν τη ὁδω αναβαινοντες εις Ἱεροσολυμα).

예수께서 앞장서서 가시는데(ἦν προαγων), 제자들은 놀랐으며(εθαμβουντο. orig. θαμβεω), 뒤따라가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였다(εφοβουντο). 예수께서 다시 열두 제자를 곁에 불러 놓으시고,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일들을 그들에게 일러주시기 시작하셨다.

(33)“보아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다. (34)그리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

―〈마르코복음〉 10,32~34

예수는 느닷없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간다. ‘느닷없다’고 한 것은 예수가 앞서서 가자, 놀랐고 두려워했다는 제자들의 반응에서 시사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어 성서는 ‘놀라다’의 주어를 명시하지 않고 복수3인칭 동사로 대신하고 있고, ‘두려워하다’의 주어는 ‘뒤따라가는 이들’(οἱ ακολουθουντες)이라고 함으로써, 자칫 두 동사의 주어가 다른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마르코복음〉의 대부분의 용례에서 제자들의 추종을 가리킬 때 사용한 ‘따르다’(ακολουθεω)의 복수3인칭 동명사 형태인 ‘호이 아콜루쏜테스’(οἱ ακολουθουντες)를 ‘두려워하다’의 주어로 쓴 것은 그들이 바로 제자들임을 뜻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놀라는 이들과 두려워하는 이들은 동일한 사람들, 곧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놀랐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에쌈분토’(εθαμβουντο)는 대부분의 영어 성서들이 ‘were amazed’라고 번역한 것처럼 경외심을 가졌다는 의미에 가깝다. 반면 ‘두려워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에포분토’(εφοβουντο)는 ‘were afraid’라는 영어번역어들처럼 일어날 일에 대한 염려의 마음을 담고 있다. 요컨대 예수가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에 대해 제자들은 동시에 상반된 반응을 품으면서 따랐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제자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경외감을 가졌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길래. 앞장서 가는 행위와 제자들의 복잡한 심사를 담은 뒤따름의 묘사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설명한다. 내용인즉슨 실제로 훗날 일어날 사건에 대한 압축적 예고다. 안병무는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행보를 일종의 의인의 사회적 자살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때 안병무의 심중에는 전태일 열사의 유서가 있었다.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하여 선생은 예수를 보는 해석학적 시선을 전태일 사건에 두었다. 그것이 그의 ‘전태일 예수론’이다. 흔히 전태일과 예수를 동일시하였다고, 전태일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하는 모든 주장들은 안병무의 글을 읽지 않은 채 그를 단죄한 결과다. 분명한 것은 안병무의 ‘전태일 예수론’은 ‘그때 거기’의 예수사건을 이해하는 데 ‘지금 여기’에서는 전태일 사건이 결정적 시금석이라는, 더 나아가서는 양자는 시공간을 달리하지만 사건의 관점에서는 겹쳐 있다는 ‘사건론적 동일시’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마태오복음〉이 예수를 ‘다시 온 모세’로 해석하는 것과 같은 해석방식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자들의 경외의 감정은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한 제자들의 혹은 대다수 인간의 오인(misrecognition)의 결과다. 즉 메시아에 대하여 사람들은 마치 악한 힘을 능히 힘으로 제압하는 ‘능력자 영웅’처럼 이해하는 통념적 인식(cognition)에 사로잡혀 있는데,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하여 안병무는, 전태일처럼 죽기 위하여 간다는 예수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를 오인했다고 이해한다. 물론 그 말 속에는 모든 이들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런 오인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어쩌면,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해석처럼, 십자가 위의 예수가 울부짖으며 소리 지른 마지막 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은 예수 자신도 처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군대가 쳐들어와 세상의 부조리함을 단박에 무너뜨릴 것이라는 상념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수도 있다. 즉 예수도 오인하는 모든 인간과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압축적 예고의 말은 원래 예수의 말이 아니라 후대에 설화자와 대중의 사후해석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후해석이어도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느닷없이 올라갔고, 제자들은 경외심을 품었다. 곧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소리 높여 외쳤던 그 말이 이루어질 때가 드디어 도래했다는 것, 그 행보를 접한 제자들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오인이라고 말한 것처럼 제자들은 그 메시아 사건의 도래를 힘에 의한 전복적 사건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여 이 텍스트에 바로 이어지는 텍스트는 제자들의 오인에 기반을 둔 경외심의 부정적 단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 열 제자가 이것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코복음 10, 35-45

그리고 이 텍스트 바로 다음에는 나면서부터 소경이던 티메오의 아들이라는 무명의 남자가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를 따랐다는 단락이 이어진다.(〈마르 15,46~52) 여기에서 티매오의 아들이 등장하는 문맥에서 오클로스가 나온다. 즉 티매오의 아들과 오클로스는 서로 겹쳐 있다. 한데 그 디테일은 매우 흥미롭다.

티메오의 아들은 자신을 낫게 해달라고 소리소리 지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사람들은 그를 꾸짖었다. 이때 꾸짖는 자를 텍스트는 오클로스라고 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πολλοι)이라고 표기한다. 얼핏 보면 오클로스와 동일한 사람들로 추정할 수 있지만, 만약 우리의 가정대로 〈마르코복음〉이 오클로스가 기억한 예수 이야기라면 그들은 티매오의 아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른 자들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 ‘많은 사람들’ 속에는 그 앞 단락에서 논공행상에 젖어 있던 제자들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예수가 드디어 힘의 메시아 사건을 실현할 장본인이라고 믿는 이들이라면, 그리고 예수의 지적대로 그들이 군림하는 자가 되고 싶다는 환상에 젖어 있다면, 그 모습은 티매오의 아들을 윽박지르는 모습과 잘 맞는다. 적어도 이 텍스트는 그런 뉘앙스를 풍긴다.

더욱이 예수가 주변 대중의 심지어는 제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다가가고자 발버둥 치는 가장 작은 자의 외침을 듣고 그를 불러 고쳐주면서 “가거라”(Ὕπαγε)라고 말했는데, 예수를 따라 그 길을 갔다(ηκολουθει αυτω εν τη ὁδω)고 표현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르코복음〉에서 ‘따르다’(ακολουθεω)가 예수를 추종하는 떠돌이 예언자를 가리킬 때 사용한 어휘라면, ‘가다’(ὑπαγω)라는 동사의 명령형인 ‘휘파게’(Ὕπαγε)는 〈마르코복음〉에서 8회 사용되는데(1,44; 2,11; 5,19・34; 7,29; 8,33; 10,21・52), 예외 없이 제자는 아니지만 적대자도 아닌 자, 즉 예수를 추종하며 하느님나라 운동을 주도했던 떠돌이 예언자와는 달리, 각 지역에서 예수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8,33의 경우다.

필리피의 도시 카이사리아 근처의 모처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위에서 인용한 10,33~34처럼 자기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예고의 말을 하자 베드로는 예수에게 비난을 퍼부었다(επιτιμαν). 이 상황이 충분히 짐작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간에 격한 논쟁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예수가 베드로에게 이렇게 꾸짖는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8,33)

이때 사탄이라는 표현에 흠칫 놀라게 되지만, 여기서 사탄은 ‘악마의 괴수’ 같은 뉘앙스가 아니다. 왜냐면 베드로가 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오인했을(φρονεω) 뿐이기 때문이다. 이 말 속에는 ‘호이 아콜루쏜테스’(οἱ ακολουθουντες)인 떠돌이 예언자들이라면 의당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빠져서 알아차리지 못하니 제자의 자격이 없다, 그러니 저 뒤로 ‘가라’(Ὕπαγε), 곧 대중처럼 가만이 있으라,라고 하는 꾸짖음이 들어있다.

떠돌이 예언자로 하느님나라운동을 이끄는 자가 아니라 지역에 있으면서 예수가 외치는 그 나라운동에 동참하라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따르다’가 예수운동의 전략집단으로 떠돌이 예언자 유형의 적극적 활동가를 가리킨다면, ‘가라’는 말 속에는 지역에서 예수운동을 지지하는 소극적 참여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여 티매오의 아들을 예수는 고쳐주면서 지역에서 예수운동을 지지하는 자가 되라고 했는데 그는 예수를 추종하는 떠돌이 예언자로 나섰다는 것이다. 여기서 10,32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다”는 표현을 상기하게 된다. 이 구절의 그리스어 문장에 가장 가까운 표현은, 원문에 가장 충실한 영어성서로 유명한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 They were on the road, going up to Jerusalem)나 MEV(Modern English Version: They were on the way, going up to Jerusalem)처럼,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위에’(εν τη ὁδω) 있었다.”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그 길 위’에 있지만 그 길의 의미를 오인하고 있었는데, 티매오의 아들은 10,52에 따르면 예수의 그 길로(εν τη ὁδω) 따랐다. 즉 제자들이 오인하여 탈선한 반면, 오클로스인 티매오의 아들이 그 길대로 간 것이다.

다시 경외심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예수는 느닷없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제자들은 경외심을 품으며 그이를 따랐다. 한데 제자들은 그 경외심을 힘에 의한 메시아 사건처럼 오인했다. 하지만 무지렁이 대중에 불과했던 티매오의 아들이, 그러니까 오클로스가 예수가 말한 수난당하여 죽어야 하는 메시아에 관한 경외심에 충실했다.

한편 제자들은 경외심과 함께 ‘두려워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두려움은 하느님나라 사건이 드디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 결과는 처절한 죽음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죽기 전까지 받을 무시무시한 고문은 상상하기도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게다가 최악의 상상은 자기 가족과 지인들까지 그 저주의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누군들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그런 마음으로 최후를 향한 예수의 길을 제자들은 따르고 있었다.

 

김진호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의 객원컬럼리스트. 《예수역사학》 《예수의 독설》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권력과 교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반신학의 미소》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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