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교회, 새로운 성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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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교회, 새로운 성찬례
  • 데이비드 몰란드
  • 승인 2016.06.0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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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와 정의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2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이어받은 전통, 참례하는 예배와 일치하면서 동시에 현실의 요구에 응답하는 그리스도교적 신앙관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예배에는 참석하는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관점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그들의 삶 전체에 생명을 주는 것을 기념하게 되기 때문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교회를 잘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하느님의 효과적인 도구이며 세상구원과 인류일치의 성사이다. 이러한 교회관은 교회의 존재와 행위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교회의 예배와 삶의 방식, 기도와 행위 모두에 적용되는 개념이다.

교회는 예배와 삶, 기도와 행위 모두를 통하여 당신 아들 안에 시작하였고 구체화시킨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도구다. 교회는 인류의 필요에 응답하여 활동한다. 그렇다면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경제적 사회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적절한 생활수준을 마련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물론 필요한 것이며, 그것을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라 하여 무시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조각내는 것이며 복음을 믿을 수 없는 허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경제, 사회생활 이외에도 우리는 죽음과 삶의 문제를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인간존재의 의미의 원천인 하느님의 초월적인 신비와 만나기 위하여 예배도 필요하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인간이 되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한상봉

결론지어 말한다면 인간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이며 인간인 존재, 모범적인 인간의 유형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 안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교회의 기본적 행위인 성사 특히 성체성사를 살펴보아야 하며 동시에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성사인 그리스도에게로 눈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성사 특히 미사의 이해를 새롭게 하고자 한다면 성사로서의 교회와 교회의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새로운 관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순전히 이론적인 작업만이 아니다. 실제로 행함으로써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모범을 보 이셨고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명쾌한 이론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행동과 고통을 받아들이겠다는 순명이다. 올바른 제자 됨 만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의미 따라서 그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길이다.

그리스도가 당시 가장 비난했던 점은 인간의 맹목성, 즉 굳은 마음 때문에 볼 수 없는 것, 회개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회개, 회심은 단순히 새로운 믿음이나 새 전례양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의롭게 사는 것, 타인과 사물과의 새로운 관계를 통하여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맹목뿐 아니라 집단적, 제도적인 무지와 맹목으로 괴로워하며 이러한 맹목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성사를 올바로 기념할 수 없다. 복음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누구이며 영과 진리 로 예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1971년 주교 시노드에서 발표한 <세계 속의 정의> 문헌 중에 유명 한 다음 구절이 있다.

“세상의 변혁을 위한 정의활동과 참여는 복음선포의 핵심이다.”

이 구절은 다시 이렇게 고쳐 쓸 수 있겠다.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복음을 발견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예배는 격리되고 율법화되며 기존의 틀에 얽매일 것이다. 실천을 동반하지 않는 예배는 참가자들의 잘못된 의지뿐 아니라 예배제도 자체의 막대한 오도에서 비롯된 집단적 위선에 물들 것 이다.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자신은 훨씬 더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성전예배와 흡사한 예식을 거행하고 있다.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정의롭지 못할 때 예배는 우상숭배가 되어 버리고 하느님 찬양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예언자들의 메시지였다. 이러한 불의는 개인적 혹은 내적 차원의 죄악문제가 아닐 것이다. 불의란 세상에 대한 개방성 여부, 가치관, 제도 그리고 제사, 개인이 둘러싸여 있는 구조까지도 의미한다. 이러한 불의가 예배를 비효과적인 것으 로 만들며 형식 자체에 머물게 하고 거짓 편안과 거짓 안전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예배는 거룩함과 정의로움의 인상을 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불의한 상태에 도전을 제기하지 못하며 오히려 불의 를 합리화하게 된다.

예배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고, 예배가 빛과 생명 을 줄 수 있도록 상징을 다시 제정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진짜 삶 이야기를 다시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성사인지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강조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 속에서 피와 살을 취하셨다는 점이다. 그분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받아 들이셨다. 그분은 구체적이고 독특하며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특정한 세상에서 살았던 인간이기를 택했다. 이러한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충격적인 체험이다. 그것은 모순의 표징이다(이사 8,14 : 1베드 2,8 : 1코린 1,23). 은연중에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그러한 사실로부터 밀어내고 싶어 한다. 그분의 존재가 우리의 역사와 세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하느님의 뜻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공공연하게 혹은 은근하게 우리는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된 척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그분이 단순히 사람이었다고 말하면 우리는 육화의 스캔들을 벗어난다. 그렇지만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를 별도의 ‘종교세계,’ 예배와 성사와 사제계급의 세계에 가두어 놓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거룩함과 성전, 그리고 예배라는 별도의 장을 갖고 있는 것 처럼. 이것 또한 육화의 실재를 부정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우리가 역사 속에 살았던 예수의 말과 행위를 본다면, 그분이 말했고 행동했던 것이 전통적 의미의 종교와 얼마나 관련이 없었던가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분은 권력에 대하여, 소유에 대하여, 성 (性)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공동체가 세워지고 무너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말했다. 세상 속에서 그분이 하느님에 대하여 밝혔던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였으며 종교적 예식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그분의 ‘종교적 예식’은 종교 및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계층에 의하여 그들의 세계를 전복하려고 위협했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행해졌다. 우리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사유로 목숨을 내놓는다면 우리는 전존재로서, 즉 개별적이며 동시에 정치, 사회, 경제 등 인간 삶의 모든 차원에서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증인으로 살았던 삶이다.

육화의 매우 중요한 측면은 예수가 새로운 질서, 즉 하느님나라의 선택받은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이라고 지정한 것이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 편에 섰고 그분의 사명과 생명이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선언 했다. ‘가난한 이들’은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혹은 사회적으로 주변인들, 무력한 이들을 말한다. 이들이 바로 ‘축복받은 이들’이었다. 그것은 예수가 그들의 요구를 기적적으로 만족시켜 주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이 마지막 축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가난한 이들과의 일치는 하느님의 아들이 자기를 비우고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필리 2,7-8).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어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였다. 그분은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 아나빔, 즉 하느님 밖에 의지할 곳이 없었던 사람들에 속했다(시편 73,26). 예수의 많은 말과 행위는 가난한 이들과 관련되었다. 가난한 이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속에서 새로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곧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 되며 하느님 왕국의 상속자가 될 것이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이다. 그것은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아니다. 가난한 이들 속에 드러나는 행위가 하느님의 행위이고 참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느님의 심판과 앙화를 피하려고 한다면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하느님 육화의 이러한 측면은 무척 받아들이기 힘들다.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의 차원에서 가난한 이들의 고통 받는 종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복음을 이해할 뿐 아니라 실제로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알아듣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현실상황에 참여하셨던 것처럼 우리 자신과 교회공동체가 현재의 세상에 참여하지 않고서 어떻게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 “부자들은 앙화로다”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참여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계약의 상속자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든 것이 성체성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성체성사를 세웠던 최후의 만찬은 그분의 삶과 사명, 그리고 그분의 추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의 총집약이라 하겠다. 또한 성체성사는 예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인류에게 주는 성령의 선물을 이야기하는 상징적 예언의 행위였다.

무엇보다도 성체성사는 잔치였다. 이것은 충격적인 사실이다. 어떻게 죽음을 앞둔 사람이, 백성으로부터 내몰리고 율법과 성전의 단죄를 받아 처형될 사람이, 어떻게 친구들과 이 사실을 축하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 최후의 만찬은 잔치였다. 포도주를 마시고 빵을 쪼개면서 예수는 새로운 왕국, 새로운 세계를 표현하였으며, 그 새로운 세계는 그분이 절대적으로 무력한 바로 그 순간에 탄생될 것이었다.

무력함은 억압과 죄악에 대항하여 진리와 정의로서 항거하는 예수의 마지막 증언이었다. 예수는 백성의 낡은 파스카, 즉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계약을 물려받아 그것을 그분의 삶과 역사, 그분의 몸과 피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로 변형시켰다. 이 새로운 관계는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인류와 맺을 관계이었다.

그 당시는 이 새로운 관계가 이해될 수 없었다. 그것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 씨가 어떻게 싹을 틀지 아직 모르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성찬례의 세계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계속될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 세계성을 발견하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는지 모른다. 지구촌 안에서 성찬례의 보다 심화된 세계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발견하는 때가 온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 당시에도 성찬례는 분명히 과거와의 결별이며 어떤 새로운 것으로의 시도였다. 구약의 파스카 예식을 그대로 행하면서도 예수는 매우 의미가 다르게 그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분은 구약의 상징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그것을 그 자신, 그의 생명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면서 그분은 자신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다. 빵과 포도주, 즉 그분의 몸과 피는 식사에 초대된 이들을 그분의 역사 속으로 용해시키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삶 속에서 그분의 역사를 그대로 실천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을 제자들에게 바친 것이었다. 바로 그 행위로서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되었다.

새로운 신앙 공동체, 그리스도의 인성과 역사에 바탕을 둔 공동체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일치한다는 것은 벽을 허무는 것이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후에 말했던 것처럼 새로운 인류공동체,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남자도 여자도, 노예도 자유인도 없는 새로운 공동체이었다. 이 새로운 공동체의 전적인 의미와 실현은 역사를 통하여 드러날 것이며 아마도 오늘날 교회의 과제는 새로운 방법으로 이 새로운 공동체의 전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수세기를 통하여 “그분을 기념하여 세상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삶을 알려주고 또한 내놓았다. 그리고 그분을 기억한다는 것은 식사라는 상황 속에서, 즉 음식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나누는 상황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 그 당시 소외된 이들과 함께 먹었던 식사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식사의 나눔은 또한 초대받은 사람들은 거부하고 대신 이곳저곳에서 모아온 사람들로 가득 찬 결혼잔치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것을 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가 하셨던 것처럼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일에 참여한다.

최후의 만찬은 부활 후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식사를 예언하기도 한다. 결혼잔치, 최후의 만찬 모두 육화적인 특색이 강하다. 피와 살이라는 구체성은 세상적이고 역사적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의 의미를 올바로 알아들으려면 지나치게 추상화하지 말아야 한다. 성체 성사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된 것이다. 사도요한이 강조했던 것처럼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지만 별도의 영생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현세에서 죽음보다 더욱 강한 삶을 주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의 축하는 아가페, 즉 한계가 없는 희생적 삶을 상징하는 사랑의 잔치였다.

아가페는 성체성사를 설명할 때 잘 쓰 여진다. 요한 복음에는 파스카 잔치에 대한 언급이 없다(요한 사도에게 그리스도의 파스카는 십자가상의 죽음이었다). 대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 ‘내가 당신들을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의 의미를 보여주는 예수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최후의 만찬과 요한의 세족례의 구절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랑의 계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희생의 사랑,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의 뜻에 따라 거룩해진다. 그러나 이 거룩함은 종교적인 예식의 차원에서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는 구성전과 봉헌제물,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얻는 자신의 몸 사이에 구분을 명확하게 하였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나타난 것처럼 옛 상징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삶의 빛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는 행동으로 거룩함의 의미를 변혁시켰으며 그것은 따로 분리된 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거룩함이란 인류가 하느님과 또한 서로서로가 화해하고 악과 고통, 죽음을 피하지 않고 변화시키는 새로운 가능성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함’이란 그리스도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영, 신자들의 공동체, 성인들의 통공을 의미한다. 그들의 ‘거룩함’ 은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의하여 주어진다. 미사의 희생제사는 그리스도가 하셨던 것처럼 고난 받는 종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 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동시에 신자들의 몸이며 성체성사 안에서 이 어받은 살과 피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출전: <영성과 사회적 관계>, 참사람되어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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