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완 신부 "나는 청빈에 관한 한 하느님 앞에 심판을 받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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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완 신부 "나는 청빈에 관한 한 하느님 앞에 심판을 받지 않을 것 같습니다"
  • 가톨릭일꾼
  • 승인 2019.07.15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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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 선종 43주년

존경하는 참 사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님 (1915-1976.7.11) 선종 43주년!

70년대초 청년 신자 시절, 성모영보수녀회 과천 수도원 피정 중 아침 미사에서 뵌 그 깡마른 용안의 첫 모습을 기억합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거룩한 말씀의 삶’을 영성으로 하는 성모영보수녀회를 창립(1960년)하시고 스스로 수도승으로 사신 사제!

"선 신부는 사실 수도자가 되길 원해서 신학생 때 신학교를 자퇴한 적이 있었다. 일본 홋카이도(북해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해 평생 하느님을 섬기는 봉쇄수도자가 되길 원했었다. 그러나 부친의 꺾을 수 없는 반대에 부딪혀 신학교에 재입학하게 된다. 이렇듯 수도생활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수도회를 창설했을 때, 회헌과 회칙은 물론이고 회헌 노래 및 수도회 배지(마크)까지도 손수 만들었다. 배지는 성경을 펼쳐놓은 모양으로서 하느님 말씀을 상징한다. ‘ㅊ’은 천주님의 첫 자음으로 하느님을, ‘ㅅ’은 성모님을 뜻한다. 흰색 바탕은 믿음을 상징하며 가장자리 보라색 테두리는 희생 극기를 뜻한다. ‘ㅊ’의 윗부분 빨간색은 사랑을, 가운데 ‘ㅡ’ 하늘색은 관상을, 초록색 ‘ㅅ’은 희망을 상징한다. 단순한 모양의 수도회 배지 하나에 수도회 영성 전부를 담아냈으며, 자신의 이렇듯 심오한 영성을 몸소 살았다."(<故 선종완 신부 발자취, 가톨릭신문, 2015. 8.16)

1976년 7월 11일 오후 3시 30분 명동 성모병원 선종의 시간, 수녀님들에게 남기신 유언!

"자매 여러분, 항상 마음을 합심하여 어려움을 잘 참고 모든 고통 중에 인내하며 하느님 사랑 안에 서로 모였으니까 끝까지 겸손하며 가난해야 되고 하느님 사랑으로 남에게 봉사하며 서로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겸손되이 살아야 합니다."

청빈과 경청과 겸손의 참 사제!

"나는 청빈에 관한 한 하느님 앞에 심판을 받지 않을 것 같습니다"(<말씀으로 산 사제 - 선 종완 신부 유고집>, 69쪽.1992년)

"경청과 겸손의 사제였다. 선종완 신부는 사람을 만나면 늘 먼저 머리 숙여 인사하고 “네, 그렇군요” “네,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성모상 앞을 지날 때도, 신학생을 만나도, 심지어 마을 어린아이를 만날 때도 늘 먼저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가톨릭신문 2010.1.17.)

 

 

1958년 창세기를 비롯하여 1976년 7월 10일 선종 전날 원고 교정까지 구약성경을 원전에서 우리말로 옮기신 성경학자!

"나는 성서를 파고들 줄만 알았지, 어떻게 일반 교우들에게 설명해 주고, 어떻게 생활 안에서 실천할 수 있는지 가르치지 못해 후회 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성서에서 파낸 것을 모든 교우들에게 깊이 묻어 주고 싹 틔워, 교우들이 성서답게 생활하고 성서답게 마음먹고, 성서답게 행실하고, 성서에 실린 것을 원하고, 성서를 무기로 삼아 세상을 거슬러 싸울 수 있도록 신학생들에게 가르쳐 주어야겠습니다. 이것을 배운 새 신부들이 일선 본당에 나가서 먼저 살아가도록 해야만 되겠습니다.”(가톨릭신문, 2010년 1월 10일)

46년 전 가톨릭청년성서모임에서 처음 만나 아직도 간직하는 낱권 구약성경 창세기, 메추라기를 손수 길러 펴내신 구약성경들!

신부님의 고향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용소막 성당 “선종완 라우렌시오 사제 유물관”의 구약성경들 !

“창세기부터 10여 권의 번역물이 출간되기까지는 메추라기 울음소리가 그 모두를 뒷받침했다고 봅니다. 신부님! 그래서 그런지 그때 번역하신 창세기 첫 장을 열면 지금도 메추라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오기선 신부 추모담)

1968년부터 공동번역 성경을 함께 옮기신 문익환 목사님의 말씀 !

"신명기 번역 독회 때의 일이었다. 선 신부님은 만족한 표정으로 ‘이제 하느님께서는 한국말을 제대로 하시게 되었군’하시는 것이었다. 좋은 성서 번역 외에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 선 신부님의 입에서 말고 그 누구의 입에서 이런 기막힌 말이 나올 수 있으랴, 이 말에 담겨 있는 그의 허심탄회하고 담담한 심정에 나는 겸손히 머리를 숙일 따름이었다.”

제자 최석우 신부님(1922-2009)을 평생 한국가톨릭 교회사 연구의 길로 인도하신 예언자 사제!

"그 무렵 신학교 일로 부산에 내려갔을 때, 선종완 신부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선 신부는 그때 부산 영도의 임시 대신학교에서 성서를 강의하고 있었다. 선 신부는 대뜸 나에게 유학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사를 전공할 것과 이를 위해 루뱅대학이 교회사학으로 유명하니 그리로 가라는 구체적인 지시까지 하는 것이었다. ... 무엇보다도 교회사 전공은 정말 뜻밖이었다. ... 선 신부가 성서라면 몰라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생소한 교회사 연구를 왜 권하였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소명이란 이런 것이거니 하는 생각에서 그것을 소명으로 받아 들이고 일생동안 교회사 연구에 전념하였다"(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의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년, 692쪽)

 

선종완 신부가 예루살렘 유학시절 때 자필로 작성한 고고학 메모수첩.
선종완 신부가 예루살렘 유학시절 때 자필로 작성한 고고학 메모수첩.

1976년 7월 13일 김수환 추기경님의 장례미사 강론 !

“저는 선 신부님만큼 주님을 깊이 믿고 사랑하고 특별히 죽음을 포함한 고통까지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분을 드물게 보았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주님께 기도드리면서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하는 그 말씀을 하시듯이 주님의 은총 속에서 선 신부님은 운명하셨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데 당신의 전생애를 바치신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모습과 겹쳐지는 신부님 !

목에 힘을 주고 입으로만 주절대다 믿음살이의 야전병원을 지나치고 외면하는 저희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실천의 용기를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방진선 토마스 모어
남양주 수동성당 노(老)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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