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방 길을 가고 있다
상태바
나는 시방 길을 가고 있다
  • 박철
  • 승인 2019.07.15 22: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철 칼럼

길이 길을 낳고 길을 기르며 길끼리 서로 갈라서기도 한다
길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그 누구도 사랑을 나눌 수 없으며
행복도 손에 넣을 수 없다
이데아는 더더욱 꿈도 꾸지 마라 길의 막힘,
그것은 곧 질병과 고통을 의미한다
길이 나를 큰 소리로 불러내줄 때 내 실존주의가 힘을 얻는 것이다
길에도 이데올로기가 있고 전쟁과 평화가 있다
역사의 환기장치(換氣裝置)로써 길만한 통로가 없다
하나의 길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사악했는가
길은 누구에게나 어버이다
어머니가 그 길을 걸어와 나를 낳았으므로
나는 길의 자식이고 길은 내 아버지다
길이 나를 사육하고 길이 내 연인과 영혼을 나누게 했다
길이 아니었으면 나는 오지의 숲에 갇힌
한 그루의 키 작은 도토리나무에 불과했으리라
(박철, <길> 일부)

25년 전 40대에 막 진입하면서 내가 붙든 삶의 화두가 '길'이었다. 아니 '길'에 내가 붙들렸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나는 '길'을 주제로 각종 매체에 여러 편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길 위를 서성거리기도 하고, 또 걷기도 한다. 5년 전 작은 공동체를 일구면서 교회 이름도 '좁은 길'로 지었다. 왜 하필 이름을 '좁은 길'로 지어 이 고생을 자처하고 있는가? 나는 왜 편안한 길보다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했는가?

 

2018년 11월 모스크바 노보데비치Novodevichy 수도원 전경. 깊은 감명을 받았던 곳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도 이곳 호수주변을 산책했다고 한다.
2018년 11월 모스크바 노보데비치(Novodevichy) 수도원 전경.

 

유럽 배낭여행 중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게 되었다. 들어가면서 두 시간 뒤에 일행들과 박물관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나는 루브르 박물관이 그렇게 넓은 줄 몰랐다. 한 시간은 박물관 진귀한 물건들을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 보냈고, 한 시간은 밖으로 나가는 출입구를 찾지 못해 허둥대는데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영어가 서툴러 손짓 발짓으로 물어보아도 사람들의 대답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 어느 일본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출구까지 바래다주었다. 내가 그 여인에게 손바닥에 <出口, EXIT>라고 써서 보여주었더니 5분 만에 내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는 것이 아닌가. 고맙다는 말을 열 번도 더 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바른 길을 좇아가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삶의 길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조차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공과 행복, 삶의 의미와 진실을 목적 삼아 찾아 가는 길이 인생 행로라면 결코 쉽게 얻어질리 없다. 길은 떠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길을 만들기 이전에는 모든 공간이 길이었다. 인간은 길을 만들고 자신들이 만든 길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길이다. 하나의 사물도 하나의 길이다. 편안한 길, 넓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좁은 길, 험한 길을 애써 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평탄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전자는 갈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후자는 갈수록 마음이 옹졸해진다.

지혜로운 자의 길은 마음 안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길은 마음 밖에 있다. 어떤 인간은 동반자의 짐을 자신이 짊어져야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어떤 인간은 자신의 짐을 동반자가 짊어져야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길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어딘가 바보처럼 보이고 뭔가 손해 보며 사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런 까닭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밝은 길이 어둡게 보이고, 나아가는 길이 도리어 물러나는 길로 보이며, 평탄한 길이 울퉁불퉁 험하게만 보인다.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훌륭한 선비는 길에 대해 들었을 때 이를 열심히 실천할 것이다. 중간치 선비는 이를 반신반의할 것이고, 가장 수준이 낮은 선비는 길에 대해 듣자마자 크게 비웃을 것이다. 만약 이런 수준 낮은 선비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면 그건 길이 되기에 부족한 것이다.”

 

2018년 11월 모스크바 아르바트거리 빅톨최 벽화 앞에서. 사진=박철
2018년 11월 모스크바 아르바트거리 빅톨최 벽화 앞에서. 사진=박철

 

오랜 인류의 역사는 방황과 미로의 수많은 흔적을 기록하였으며, 희귀하게 좋은 길잡이가 나타난 일도 있으나, 보다 많은 오도의 안내자들이 인류의 역사와 그 당대의 시대정신을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였고, 오늘도 이런 일은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 당시에도 예수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웃지 못 할 사실이 엄연히 그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고 그 일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런 일이 어찌 예수 당대에만 있었던 일이겠는가? 구약 시대에도 신약 시대에도 거짓 예언자들 때문에 그 시대가 얼마나 오염되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실현에 피해가 컸던가? 이 점을 생각할 때 길을 안내한다고 강단과 교단에서 떠들어대는 그 무수한 소리들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수는 길을 묻는 토마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였다.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한 필립보에게는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알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9-12)라고 대답했다.

예수의 말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는 지금 이 말속에서 그 자신의 개인을 큰 보편자 속에 투입시켜 나타낸다. 예수 개인은 이미 하느님과 같은 동질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는 길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예수도 그의 제자도 다 구도자로서 하느님을 향해 길을 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미 개인이면서 보편자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하느님과 같이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길을 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그들 자신에게만 멈춰 있어,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묻고 있었다.

예수는 이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다. 제자들은 지금 길을 묻고, 진리를 찾고, 생명을 갈구하고 있다. 예수가 알고 믿는 바에 따르면, 제자들 역시 그들이 길로 들어서고, 진리 속에 있고, 생명을 가지고 산다면 지금 예수 그 자신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길에 대해 질문할 것이다. 길을 묻는 자는 길을 잘 물어야 한다. 길이 잘못 안내되면 그의 평생이 헛수고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지도자로서 길의 안내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자신 없는 위선적 언어와 행동을 삼가야 한다. 종교의 지도자들은 특히 그들의 가르침이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통하는 것인지 확실시하여야 한다. 그들의 가르침이 만병을 치료하는 약인 양 떠들어대는 일을 삼가야 한다. 예수가 들어선 그 길, 예수가 서 있는 그 진리의 기틀, 예수가 숨 쉬고 있는 그 생명의 호흡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한, 우리는 이 사실을 가르칠 자질을 갖춘 것이 못된다.

계절은 여름 길목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자기 존재의 지점을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버릴 것은 버리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고, 돌이켜야 할 것은 돌이켜서, 더는 한눈팔지 말고 내가 가야할 길을 똑바로 가야 하겠다. 나는 시방 길을 가고 있는 구도자이다. 길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남에게 길을 안내해주기에 너무나 미흡한 사람이다. 나부터 착실하게 생명과 진리에 이르게 하는 그 길을 찾고자 노력할 뿐이다. 오늘도 갈급한 심정으로 길을 나선다.

박철
현재 좁은길교회 목사. 탈핵부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부산예수살기상임대표. 시인.
예전에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상임의장. 감리교농촌목회자협의회 회장으로 일했다. 
지은 책으로 <어느 자유인의 고백>(시집), <시골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 <목사는 꽃이 아니어도 좋다>, <낙제목사의 느릿느릿 세상보기> 등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