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착함이 지혜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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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착함이 지혜인 사람
  • 한상봉
  • 승인 2019.07.1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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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평전-무위당의 아름다운 삶", 김삼웅 지음, 두레, 2019

작가 김성동은 <우리시대의 마지막 도덕정치가>라는 글에서 장일순을 “유가(儒家)인가 하면 불가(佛家)요 불가인가 하면 노장(老莊)이며 노장인가 하면 또 야소(耶蘇, 예수)의 참얼을 온몸으로 받아 실천하여온 독가(督家)요, 무엇보다 진인(眞人)”이었던 분으로 소개한다. 그만큼 장일순이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 종교를 아우르는 영성을 지닌 분이라는 뜻이겠다. 처음으로 <장일순 평전>을 세상에 내어놓은 김삼웅 선생의 글을 읽다보면, 그 수고에 고맙고 장일순의 얼굴을 이렇게 결국 마주보게 되는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긴다. 그리고 떠오르는 책 한 권이 있다. 토마시 할리크의 <상처입은 신앙>(분도, 2018)이다. 할리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람들을 삶의 궁극적 신비로 이끄는 다양한 길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어떤 ‘절대 신비’는 우리가 인간과 연관지어 놓은 모든 개념과 이름을 무한히 능가한다. 그렇다. 나는 모든 인간의 아버지, 한 분 하느님을 믿는다. 그는 한 인간도 아니며 ‘종교기관’이나 그들이 대표자들이 ‘독점’하는 존재도 아니다. 그분은 여기저기서 휘돌고 있는 강물이 최종적으로 만나는 강어귀다.”

장일순은 그 강어귀를 언뜻 볼 수 있었던 모양이다. 장일순에게 어떤 종교적, 정치적 경계와 배제와 차별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학(西學)인 듯 동학(東學)이고, 서학인 듯 동학이다. 장일순은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전통적인 가톨릭신자였고,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더불어 헌신했던 분이지만, 장일순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분은 ‘해월 최시형’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명사상 역시 동학에 빚을 많이 지고 있다.

서학과 동학 사이에서 장일순이 고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종교 역시 수단이요, 닿으려는 항구는 진리의 바다뿐임을 진작에, 애써 찾지 않아도 몸으로 받아 안으신 분이 장일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보면 장일순은 가족사만 보더라도 천복(天福)을 타고난 모양이다. 이 복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복음서 말씀의 그 ‘복’이다. 장일순은 해피(happy)한 삶을 살 수 없었으나 은총(blessed) 가운데 살았으니 ‘지복자(至福者)’다.

 

공경하는 마음

<장일순 평전>은 할아버지 장경호 옹의 이야기를 전한다. 포목상으로 살림을 일으키고 원주 시내 곳곳에 농지를 사들여 지주가 되었다. 장일순이 첫째가는 스승으로 여긴 장경호는 서울을 오가며 문물을 익히고 독립운동가와 교제하였다. 그분은 열다섯 나이로 일찍 죽은 손자의 상여가 나가는데, 그 앞에 큰절을 올렸다. 부모 먼저 이승을 떠나는 자식을 불효막심하다고 말하는데, 도리어 할아버지가 큰절을 하는 걸 보고 다른 손자가 연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네 형이 내 손자였지만 저승에 먼저 갔으니 거기서는 내 어른이다.” 나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관없이 모든 생명을 공경하는 마음이 이렇게 지극했다.

아버지 장복흥은 소작인들에게 낱낱이 소출을 따져 도지를 받지 않고, 소작인들이 가져오는 대로 받았으며, 그저 지적도를 보고 우리 땅이 어디어디 있는지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 소작인들이 다투어 숨겨주어서 온 가족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관대함 때문이었다.

하루는 남루한 거지가 동냥을 얻으러 찾아왔다. 동생 장화순이 더럽다고 돈을 던져주자,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장화순은 다시 두 손으로 공손히 돈을 드렸다고 한다. 어머니 김복희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장일순 장화순 형제가 학교에 갔다 와서 배가 고프다 하면 남은 ‘찬밥’을 주었다. 그렇지만 소작인이든 누구든 손님에게는 꼭 새로 지은 더운 밥을 지어 드렸다. 그들이 지은 복이 어디로 갈까? 그러니 장일순이 착할 수밖에 없다.

모두 착하기 때문이다

나는 장일순이 ‘착함’에 대한 개념을 다시 쓰신 분이라고 믿는다. 무한경쟁의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들에게 착함이란 ‘어리석음’과 동의어다. 착한 사람은 세상 살기 어려운 사람이다. 순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순진한 사람을 하느님은 기뻐하신다는 뜻이다.

장일순이 무수히 읽고 성찰했음직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는, 세리와 율법학자들과 사제들마저 ‘더러움이 옮겨붙을까봐’ 그냥 지나쳐 간 강도 만난 사람을 당시 유대사회에서 배척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극진히 제 피붙이처럼 돌봐준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빛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타인을 남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다. 이를 두고 장일순은 “아(我)란 너와 내가 따로 없는 그런 나”라고 말한다.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자연이 모두 한 생명이라는 깨달음이다.

이걸 해월 선생은 ‘삼경(三敬)’이라 했다. 해월 선생은 동학혁명이 실패한 뒤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지역을 넘나들며 숨어 다녔는데, 1898년 3월 17일, 원주시 오저면 고산리 송골의 원진녀 집에서 밀정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장일순은 동료들과 더불어 1990년 4월 12일 그 체포현장에 해월 선생 추모비를 세웠는데, 그 경위를 소개하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기독교만의 예수님이 아니라 모든 이의 예수님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든 중생의 부처님이지 불신도만의 부처님이 아닌 것처럼, 우리 해월 최시형 선생님도 모든 이의 선생님”이라 했다. 이어 해월 선생의 삼경을 설명하면서 “해월 선생은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이치를 볼 때에 인간과 천지만물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한울님으로 섬기고 공경하시고 가셨기에 모두의 이웃”이라고 했다.

장일순이 처음 사회대중당 후보로 정치를 해보자고 나섰던 것도, 대성학교를 설립한 것도, 강원도지역 재해대책사업에 나선 것도, 협동조합운동을 하게 된 것도, 민주화운동에 동참한 것도,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것도 그분이 착하기 때문이었다. 착한 사람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고, 사랑이 많은 사람은 천하만물을 공경하고, 타인의 고통에 눈감지 못하고, 천지부모인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그들이 모두 하늘/하느님이고, 그들이 모두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일순은 눈물이 많았다. 슬픔이 늘 가슴팍을 파고 들었다.

장일순이 흘린 눈물

술자리에서 늘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불렀다는 장일순은 모든 억울한 죽음에 가슴 아파했다. 이현주 목사와 이철수 판화가와 동석한 자리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다가 죽산 조봉암 선생 이야기가 나왔다. 이내 장일순의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맺히고, 이내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셋이 모여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허나, 장일순이 흘린 눈물이 이 때 뿐이랴. 1991년 장일순이 위암진단을 받았을 때, 누군가는 이를 두고 ‘사리암’이라 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의 문제를 놓고 얘기를 하거나 놓고 가면 그것을 가슴속에서 녹이고 푸는 과정에서 암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1970-80년대의 폭압적인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서 핍박받고 유배당한 민주인사들만이 장일순의 그늘 아래 모여들었던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시시한’ 사람들 역시 장일순의 이웃이며 공경의 대상이었다. <장일순 평전>에서 김지하는 장일순의 이웃이 누구였는지 잘 보여준다.

“나는 한 때 선생님의 봉산동 저택 한 구석방에서 몇 달을 머문 적이 있다. 그 무렵 선생님을 따라 매일 아침 봉산천 다리를 건너서 시내 중심가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곤 하는 것이 거의 일과처럼 되었는데 문제는 그 행보 과정에 있었다. 봉산동 자택에서 중심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 정도로 족한 거리인데 보통 두 시간씩 걸리기가 다반사였다. 왜 그랬을까. 바로 그 ‘밑으로 기어라’ 때문이었다. 아주머니, 아저씨, 길가의 좌판장수, 기계부속품 가게 주인, 리어카 채소장수, 식당 주인, 아니면 농부들, 만나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과 끊임없이 벌이 얘기, 아이들 소식, 농사 얘기, 살림살이며 시절 얘기를 나누는데 보통 두 시간 이상이 걸렸으니 말이다. 나는 그 진풍경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아하! 이것이 밑으로 기어라’로구나 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인가?

공경하는 삶을 살자면, 당연히 ‘밑으로 기어야’ 했다. 장일순 어록 중에서 <삶의 도량에서>는 이런 겸손한 마음이 듬뿍 묻어난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꼭 원주천 방축 길을 걸어서 오지요. 혼자 걸어오면서 이 못난 나를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주는구나 하는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또 내가 이러이러한 허튼소리를 많이 했구나. 오만도 아니고 망언에 지나지 않는 얘기를 했구나 하고 반성도 합니다. 걷다가 문득 발밑의 풀들을 보게 되지요. 돌틈에 끼어서 짓밟혀 있으면서도 풀이 턱 버티고 있는 걸 보게 되잖아요. 사람들에 밟혀서 구멍이 나고 흙이 묻어 있건만 그 풀들이 대지에 뿌리내리고 밤낮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해와 달을 맞이한단 말이에요. 그 하나의 모습마저도 내가 못 미치거든요. 그 길가의 모든 잡초들이 내 스승이요 벗이 되는 순간이죠. 나 자신이 건전하게 대지 위에 뿌리박고 있지도 못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구나 하는 생각에 참으로 부끄러워집니다. 걸어오면서 내 마음을 씻는다고 할까. ...”

장일순의 이런 공경심이 엿보이는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 제재소를 경영하던 최아무개라는 이에게 장일순이 “너나 나나 거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뜨악해 하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거지가 뭔가?” “거리에 깡통을 놓고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구걸하여 먹고사는 사람들이지요.” “그렇지. 그런데 자네는 제재소라는 깡통을 놓고 앉아 있는 거지라네. 거지는 행인이 있어야 먹고 살고, 자네는 물건을 사가는 손님이 있어 먹고 사네. 서로 겉모양만 다를 뿐 속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선생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인가?” 얼른 답을 못하자, “거지는 행인이, 자네에게는 손님이, 고객이 하느님이라네. 그런 줄 알고 손님을 하느님처럼 잘 모시라고. 누가 자네에게 밥을 주고 입을 옷을 주는지 잘 보라고.” 하였단다. 식당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 집에 밥 잡수시러 오시는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 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을 해야 혀. 장사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가 없어.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 이 말이야.”

 

상처받지 않은 채 사랑할 도리가 없다

토마시 할리크는 “나에게는 상처 입은 손과 꿰뚫린 심장에 의해 열린 바로 그 문 말고 그분께 가는 다른 길이 없다. 심장까지 파고드는 그 상처를 보지 않고서는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 라틴어 ‘믿다’(credere)라는 말은 ‘심장을 내어 주다’(cor dare)에서 왔다. 그렇다면 나의 심장과 나의 신앙은 오직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는 하느님께만 속한다고 고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토마스가 제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예수가 부활했음을 믿겠다고 한데서 나온 말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토마스에게 다시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당신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살펴보시오. 그리고 당신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시오” 예수는 자신의 상처를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예수는 자기처럼 상처받은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의 상처를 만질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발견한다고 믿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험한 이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은 채 사랑할 도리가 없다.

33살의 장일순은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 이후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에서 8년형을 받고 서대문구치소와 춘천구치소에 3년 동안 갇혀 있었다. 예수가 반역죄로 로마제국의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으며, 해월 최시형은 동학혁명 이후 수배당해 쫓기다 잡혀 처형당했다. 그 상처는 고스란히 장일순에게로 옮겨왔다. 개벽을 꿈꾸는 이에게 감옥은 세상의 응답이다. 하지만 장일순에게 교도소는 수행의 공간이었다. 1987년 11월 치악산에서 열린 한살림 연수회에서 장일순이 이때의 경험 한 자락을 들려준다.

“철창 밖 나뭇가지에 새가 앉아 있으면 남은 밥을 내놓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새들이 와서 이걸 먹어요. 또 감방에 구멍이 뚫려 드나드는 쥐가 있잖아요. 그런 기색이 있으면 쥐를 위해 밥을 남겨 놓는다구. 그러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그 새와 쥐가 친구가 돼버려. 갈 생각을 않는단 말이야. 항상 밥을 놔두니까. 그러니까 입으로 ‘쮜쮜쮜쮜’ 하면 쥐가 가까이 오고 또 이렇게 바투 오라고 하면 손에도 타고 몸에도 와서 놀기도 하고 이런다고. 쥐가 그렇게까지 가까이 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쥐에 대해서 무심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 따뜻하게 해줄 수 있으니까. 말하자면 ‘바로 내가 너다’ 하는 거나 다름없거든. 그런데 ‘저 배라먹을 짐승’ 이렇게 되면 쥐가 가까이 안 온다 이거야. 그러니까 생명의 만남이란 추운 티가 없어야 돼. 장벽이 없어야 돼.”

그 착함이 지혜였구나

장일순을 두고 현자(賢者)라 하든 성자(聖者)라 하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닌 듯싶다. 김삼웅 선생의 <장일순 평전>을 읽으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장일순 선생님 참 착하신 분이다’ 하는 것이다. 그 착함이 사람과 우주에 옮겨 붙어 이 사람을 이런 그릇으로 만들었구나, 싶다. 그 착함 때문에 그 많은 이들이 그분을 찾아 원주 봉산동 집으로 모여 들었구나, 싶다. 그 착함이 지혜였구나, 싶다. 착해서 품어주고, 착해서 투쟁하고, 착해서 푸른 강처럼 맑아지고[靑江], 마음을 비우시고[无爲堂], 좁쌀 한 알[一粟子]처럼 낮은데 머무셨구나, 싶다. <장일순 평전>을 읽으며, 가장 가슴에 남는 구절을 하나 꼽으라면 이 장면이다. 그 말할 수 없는 먹먹함이 그분이겠구나, 싶다.

“하루는 장일순이 원주천 둑방길을 걷다가 가난한 후배 화가를 만났다. 그림은 잘 그리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탓에 작품이 팔리지 않아 담배도 못 사 필 정도로 생활이 곤궁한 고향 후배였다. 장일순은 골초 후배에게 담배 사 피우라고 돈을 주고 싶었지만 가난한 자신도 가진 돈이 없었다. 주머니에 있는 담뱃갑을 꺼내서 통째로 손에 쥐어주고 걸음을 옮겼다. 후배 화가가 멀어져가는 장일순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 가던 장일순이 땅바닥을 한참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 것이 아닌가. 잠시후 길가에 버려진 담배꽁초 하나를 집어 들더니 불을 붙이곤 한 모금 길게 내뿜으며 원주천을 바라보았다. 순간 화가는 눈물이 핑 돌았다.”(374쪽)

* 이글은 <녹색평론> 2019년 7-8월호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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