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권력욕과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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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권력욕과 섬김
  • 헨리 나웬
  • 승인 2016.06.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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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이타적인 길-6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통곡의 벽 앞 광장에서 행렬을 짓고 있는 이스라엘 여군들....ⓒ한상봉

광야에서 예수님이 당면했던 세 번째 그리고 가장 매혹적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유혹이었다. 악마는 예수님에게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광채를 보여주고 말했다,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 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 4,8-9).

우리 문화만큼 사람들이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권력을 추구하도록 격려되는 또 다른 문화는 아마 세상에 없을 것이다. 꼭대기로 올라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권력을 추구하는 것과 섬김을 실행하려는 것이 그 실제적 목표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고 스스로 믿는다.

이러한 오류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 전체에 너무나 깊숙이 각인되어 있어서 우리는 영향력 있는 위치를 추구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선을 위하여 그렇게 한다 고 확신한다. 우리는 무력함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는가에 대하여 믿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개척자들과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이 나라에서,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자유기업의 경쟁세계에 들어갈 때까지 야망이 추켜세워지는 이 나라에서, 우리는 권력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권력을 원하는 것조차 하지 않는 것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리라고 상상할 수가 없다. 우리 사회에는 권력이란 좋은 것이며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더 권력을 갈구할 수 있을 뿐이라는 확신이 온통 만연되어 있다.

권력은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돈, 인맥, 명성, 지적 능력, 기술 등. 이런 것들은 모두 어느 정도 안전과 통제권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고 삶이란 우리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 이라는 망상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러므로 개인차원이나 물론 국가나 국제차원에서도, 권력은 게임이라는 또다른 이름을 의미한다는 것이 무척 이해할만 하다.

권력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극복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거의 없다. 권력은 항상 더 큰 권력을 갈망하는데 왜냐하면 권력 자체가 허상, 망상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우리가 원하는 안전감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의 취약함과 한계를 드러내 보인다는 경험을 하면서도, 우리는 계속하여 더 많은 권력이 점차적으로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으려고 한다. 그 결과 권력을 추구하는 욕구가 증가하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이 악순환은 취약함에 대한 의식이 점차 증가하는 또다른 악순환과 나란히 간다.

확대되는 군비경쟁이 이러한 현상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무기를 더 가질수록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더 줄어든다. 이렇게 우리들의 나라는 유연성이 없는 근육이 경직된 나라가 되었다. 마치도 보디빌딩 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그렇게 행동한다. 보디빌딩 하는 사람이 결국 나중에는 더 이상 움직 일 수 없도록 근육을 키우는 지경까지 가는 모습과 같다.

그렇게 너무 많은 권력에 둘러싸이게 되면, 다른 모든 사람처럼 권력을 추구하는 유혹에 둘러싸이는 결과를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우리 직분의 신비는 권력이 아니라 무력한 채로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무력함을 통하여 우리는 동료인간들과 연대를 이룰 수 있으며, 취약한 이들과 공동체를 결성하고 치유, 인도,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직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초대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깨닫고 있는 곳에서 말하라고 초대된 것이다. 사람들이 통제력을 갖고 있는 곳이 아니라 두려워 떨고 불안전한 곳에, 사람들이 자기 확신이 강하고 완고한 곳이 아니라 감히 의심하 고 어려운 문제들을 던지는 곳에 가서 말하라고 초대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불멸의 망상 속에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서지고, 죽어가며, 연약한 인간성을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곳에 가라고 초대받고 있다.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인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벌거벗고, 취약하며 연약한 채로 보내진다. 그리고 이런 모습으로 우리는 고통과 불안 속에 있는 동료 인간존재들에게 닿을 수 있으며 하느님 사랑의 힘을 그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하느님 성령의 힘으로 그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 예수님은 다음의 말씀으로 권력에 대한 유혹에 응답하셨다, “너희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섬기고 오로지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

이 말들은 우리에게 오로지 갈라지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집중만이 무력한 직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하느님과 타인들 사이에 갈라 놓는다면, 하느님을 벗어난 섬김은 자아추구가 되고 자기 추구의 섬김은 이어 조작으로 이어지고, 조작은 권력 게임으로 변질되고, 권력게임은 곧이어 폭력으로 변질되고, 폭력은 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아무리 그런 행동이 직분의 범주에 속한다 해도 그렇다. 진정한 도전이란 이웃에 대한 섬김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전적이고 갈라지지 않은 섬김의 표현이요 기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의 모든 섬김이 하느님 안에서 그 원천과 목표를 발견할 때에만 우리는 권력에 대한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이웃에 대한 섬김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실행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하인됨의 위대한 신비다.

이 신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할 때 표현되고 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여기에서 우리는 하인됨과 우정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면서 우리는 더 이상 사회적 인정이 필요없는 진정한 우리 자아를 발견하며 권력을 지향하지 않는 직분을 수행할 만큼 자유롭게 된다.

세상에 맞추고 굉장하게 되며 권력을 추구하는 유혹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유혹들이고 일생 내내 우리와 함께 머문다. 유혹들은 강력하다. 왜냐하면 유혹은 위로 올라가는 길에서 다른 이들과 합류하고 싶은 우리의 욕구에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유혹들을 가짜 자아의 망상에 집착하도록 유도하는 시도라고 인식할 수 있을 때, 유혹은 오히려 오로지 하느님 안에 홀로 숨겨져 있는 우리의 참다운 자아를 깨달으라는 초대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같아도, 칭찬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도, 우리에게 힘이 조금밖에 없거나 아주 없을 때에도 우리가 동료 인간존재들을 계속 섬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 알듯이,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 사랑 안에 숨겨져 있는 그분의 아들딸로서 알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다. 우리는 항상 어떤 방식으로든지 낡은 자아를 다시 찾겠다고,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겠다고 하며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입술에 떠올려 유혹자에게 말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종자들이 되어간다, “떠나가라, 사탄아 … 너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겨야 한다.”

(출전: 참사람되어, 201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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