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로 충분하지 않다...아버지가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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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로 충분하지 않다...아버지가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
  • 헨리 나웬
  • 승인 2019.07.09 18: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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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의 돌아온 탕자] 아버지가 되어가기-1
렘브란트(1606-1670)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처음으로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 그림을 보았을 때,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만든 영적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제 결론에 다다르니, 내가 얼마나 긴 여정을 이끌어 왔는지 새삼 발견한다.

시작부터 나는 작은 아들뿐만 아니라, 큰 아들도 나의 영적 여정에 있어 중요한 측면을 드러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아버지는 “나와 다른 존재”로 남아 있었다. 나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나에게 집과 평화와 기쁨을 주는 존재였다. 아버지는 돌아갈 자리이고, 나의 여정의 목표이며 마지막 쉼의 자리였다. 다만 점차적으로 그리고 자주 너무나 고통스럽게 나는 나의 영적 여정이 아버지가 이방인으로 남아 있는 한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받은 최고의 신학적 영적 양성에도 불구하고 어떻든 위협하고 두려움을 일으키는 존재로서 아버지 하느님이 그냥 남아 있으므로, 나를 그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에 관해 내가 배운 모든 것은 나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그것을 사용하는 권위로서의 하느님을 완전히 놓아버리게 할 수 없었다. 어떻든,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권력을 두려워하는 나 자신 때문에 제한되었고, 비록 친밀함에 대한 갈망이 아무리 크다 해도 신중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게 보였다.

나는 이런 경험을 수많은 타인들과 나누었다. 나는 하느님의 복수와 징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이, 종교, 생활방식과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정서적 생활을 마비시키는 것을 보아 왔다. 하느님에 대한 이 마비시키는 공포가 거대한 인간 비극들 중의 하나이다.

렘브란트의 그림과 그 자신의 비극적 삶은 나에게 영적 삶의 마지막 단계를 발견하기 위한 상황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온전히 놓아버리고 그 결과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한, 나는 방관자로 남아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머물 수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를 가장 취약한 모습으로 렘브란트가 보여주었기에, 나는 나의 마지막 소명이 참으로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고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의 거룩한 연민을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내가 작은 아들이고 큰 아들이지만, 나는 그들처럼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어느 아버지나 어머니도 아들 혹은 딸이었던 때가 없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될 수 없었다. 이처럼 모든 아들과 모든 딸은 그들의 어린 시절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아버지 어머니가 되기로 의식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어렵고도 외로운 걸음이다 – 특히 아버지 역할을 잘 살기에 너무나 힘든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 그러나 아버지가 되는 것은 영적 여정의 성취에 기본적인 걸음이요 단계이다.

비록 렘브란트가 아버지를 그림의 물리적 중앙에 놓지 않았지만, 작가가 그리는 사건의 중앙은 아버지가 분명하다. 아버지로부터 모든 빛이 나오고, 그에게 모든 시선이 모아진다. 비유에 충실한 렘브란트는 우리의 중요한 관심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아버지에게 가야 한다고 의도한다.

나의 관심의 중심에 아버지를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나 자신도 놀란다. 두 아들과 나를 동일시하는 일은 너무나 쉽다. 그 둘의 외적 내적 방황은 이해할 만하고 너무나 심오하게 인간적인 모습이어서 그들과의 동일화는 연결점이 지적되는 대로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오랫동안 나는 나 자신을 작은 아들과 완전히 일치시켜왔으므로 내가 큰 아들과 더 닮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 친구가 “당신은 이야기의 큰 아들이 아니십니까?”라고 말하자마자, 그 이외의 것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겉보기에, 우리 모두는 온갖 형태의 인간적 부서짐에 크거나 작게 참여한다. 탐욕이나 분노도, 욕망이나 원망도, 천박함이나 질투 등도 우리 모두에게서 완전히 없어지는 때가 없다. 우리의 인간적 부서짐은 많은 방식으로 표현되어 나온다. 그러나 그 씨앗이 우리 마음속에 없는 공격, 범죄, 전쟁인 적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에 관해서는 어떤가? 중심에 있는 존재는 아버지이고 내가 닮아야 하는 사람은 아버지인데 왜 우리는 아들들에게 그렇게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가? 실제 질문은, 아버지처럼 되는 것에 관심이 있는지 묻는 것인데, 왜 아들들과 같은 처지라는 것에 대해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가? 어떻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좋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아들들은 나하고 닮았다.” 아마도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가 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느껴질까: “아버지가 나하고 같다고?” 나는 아버지와 같아지고 싶은가? 나는 용서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처럼 되고 싶은가? 집에서 환영을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집에 돌아오는 사람을 환영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가? 연민을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또한 연민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교회와 사회 안에는 ‘의존적인 아이’로 남아 있으라는 은밀한 압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과거에 교회는 순명을 강조해서 영적인 아버지 역할을 주장하는 것을 힘들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우리의 소비주의 사회는 우리를 유아기적 자기-만족에 탐닉하도록 부추기지 않았던가? 우리로 하여금 미성숙한 의존으로부터 해방되라고 그리고 책임 있는 성인들로서 부담을 받아들이라고 누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도전했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아버지 역할이라는 두려운 과제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지 않는가? 렘브란트도 확실히 그랬다. 오직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은 후,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야 그 영적인 ‘아버지됨’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것을 그릴 수 있었다.

아마도 예수님이 말했던 가장 철저하고도 본질적인 선언은 이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예수님이 묘사한 하느님의 연민은 단순히 하느님이 나에게 얼마나 기꺼움을 느끼고 있는가를 보여주거나, 나의 죄를 용서하고 새로운 생명과 행복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러한 연민의 하느님처럼 되고,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 똑같은 연민을 보여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이야기(비유)의 유일한 의미가 사람들은 죄짓고 하느님은 용서한다는 것뿐이라면, 나는 쉽사리 나의 죄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그분의 용서를 보여주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해석에는 진정한 실제적 도전이 없다. 나는 나의 약함으로 물러서고 점차적으로 하느님이 나의 약점에 눈을 감아주고, 내가 무엇을 했든지 집으로 돌아오도록 그냥 놔둘 것이라고 계속 희망하게 된다. 이런 감상적 낭만주의는 복음의 메시지가 아니다.

내가 실현하도록 초대된 것은 내가 작은 아들이든 큰 아들이든, 연민이 충만한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이 되라는 것이다. 나는 상속자이다. 바오로 사도가 이 사실을 누구보다 명료하게 말한다: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6-17).

참으로, 자녀이며 상속자인 나는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 그분이 나에게 주었던 똑같은 연민을 다른 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운명이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버지가 되라는 도전이다.

아버지가 되라는 초대는 이야기의 그 어떤 “부드러운” 해석도 미리 배제한다. 나는 내가 얼마나 돌아가길 갈망하고 안전한 품에 안기기를 원하는지 알고 있지만, 아들이 되고 상속자가 되는 이 모든 의미를 진정으로 받아들이길 원하는가? 아버지의 집에 산다는 것은 아버지의 삶을 나의 삶으로 만들고 그분의 모상대로 변화하는 것을 요구한다.

최근에,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아빠를 닮았는지 무척 놀랐다.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내가 27살 때 보았던 남자를 보았다. 나는 그를 비판도 하고 감탄도 했고, 두려워하기도 했고, 사랑하기도 했다. 나의 많은 에너지는 이 사람의 얼굴 속에서 나의 자아를 찾는데 쓰여졌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이런 많은 질문들은 이 남자의 아들이 됨으로써 나타났다. 거울 속에 이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갑자기 보면서, 나는 일생 내내 알고 있던 아버지와 나 사이의 모든 차이들이 그 유사성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깨우침에 압도되었다. 충격과 함께 나는 나의 아버지가 나한테서 겪은 것처럼, 내가 참으로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으로부터 인정받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칭찬받고, 오해받는 상속자요 계승자였음을 깨달았다.

[출처] <돌아온 작은 아들>, 헨리 나웬, 참 사람되어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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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원 2019-07-14 10:31:34
돌아온 탕자 시리즈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글 실어주신 편집장 님께 감사드립니다. 시리즈가
몇회까지인지, 언제 마지막회가 실리는 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