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이 실현되는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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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피캇이 실현되는 세상을 꿈꾼다
  • 장기풍
  • 승인 2016.06.08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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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노래, 마니피캇

그리스도교 신자인 나는 성서의 가장 아름

다운 만남의 장면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루카복음 1장 39-56절 장면을 선택하고 싶다. 지난 2천년동안 이 장면을 두고 많은 예술가들이 그림으로, 노래로 벅찬 감동을 표현했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노래’는 마니피캇(Magnificat)이란 이름으로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성공회의 저녁기도로 애송되고 있다. 

물론 마니피캇이 실제로 어린 소녀 마리아가 지어 노래한 것은 아닐 것이다. 루카복음 사가가 구약, 특히 사무엘서 상권 한나의 노래와 시편 113장과 이사야, 탈출기 등 여러 구절을 조합해 기록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이 노래는 엘리사벳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외친 “여인 중에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라는 인사에 대한 마리아의 완벽한 답변이다. 

본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마니피캇이 2천 년을 두고 애송되어 오는 것은 그 내용이 구세주 오심과 또한 그분의 재림을 고대하는 많은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희망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많은 교회학자들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주로 환희와 기쁨의 만남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를 받고 임신을 확인하고 기쁨에 넘친 “마리아가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가서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했다”(루카 1장 39.40)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당시 마리아의 심리상태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만 신약시대의 아포크리파(외경)인 <야고버의 원복음>에 따르면 마리아가 ‘기쁨에 넘쳐’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했다고 되어 있다.(9장19) 여기에는 마리아가 대사제의 축복을 받고 기쁨에 넘쳐 즉시 엘리사벳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고 되어 있어 마치 이웃집을 방문한 것처럼 표현했다. 

그러나 루카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산악지방의 한 고을로 서둘러 갔다고 되어 있어 먼 길을 떠난 것처럼 표현되었다. 학자들은 루카복음이 야고버의 원복음보다 일찍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로서도 외경을 참고로 할 뿐 정경을 더 존중할 필요가 있다.

불안한 마리아,  엘리사벳에게로 

The Visitation, Juan Correa De Vivar-1539 † 1552, The Museum Del Prado

그러나 똑같은 장면을 보고도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각각 다르듯이 나는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과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감동을 받는다. 물론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최종적으로는 기쁨과 환희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당시 14~16세에 불과한 어린 처녀 마리아가 루카복음의 기록처럼 서둘러 산악지방의 고을로 떠난 것이 순전히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대로 임신했다는 벅차오르는 기쁨 때문이었을까? 

프란치스코 교종의 표현대로 어린 처녀의 몸으로 홀로 산길을 간다는 것은 강도와 들짐승 등 많은 위험이 도사린 모험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마리아가 기쁨에 넘쳐 친척(사촌으로 알려짐) 엘리사벳을 찾아 떠났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린 처녀의 몸으로 임신했다는 불안감과 주위 시선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쩔 줄 몰라 당장 믿을 수 있는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위로를 받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1.36~37)고 말한 것을 기억하는 마리아는 평소 가까운 친척이자 믿을만한 상담역이었을 사촌 엘리사벳이 정말 임신했는지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만나자마자 그녀를 품에 감싸안으며“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1.44~45)라고 위로한다. 그제야 모든 불안에서 벗어난 마리아가 기쁨의 마니피캇을 노래했다고 보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위로의 힘

현재의 신구약이 성경으로 확정되기 전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널리 낭독되었던 <야고버의 원복음>에는 마리아는 날이 갈수록 몸이 커지자 겁이 나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숨었으며 요셉 역시 마리아가 임신하여 몸이 불어나자 “내가 무슨 면목으로 주 하느님을 대하겠는가. 이 젊은 여자에 관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성전에서 동정녀를 대려 왔는데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했으니 말이다. 누가 나를 속였는가. 누가 우리 집에서 이런 사악한 일을 저지르고 동정녀를 유혹하여 더럽혔다는 말인가.”(10.1~4)라고 실망했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요셉은 그날 밤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에 의한 것임을 듣고는 안심하게 된다. 또한 마리아의 임신을 확인한 율법학자 안나스는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보호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구실로 요셉과 마리아를 고발해 요셉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제사장과 율법학자들 앞에서 유무죄를 판단하는 독약까지 마셔야 했다고 외경은 기록한다. 

이것을 보아도 나는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를 듣고도 막상 임신이 되자 불안해하는 마리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하느님께 간택된 마리아지만 그 역시 나약한 어린 소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리아의 불안은 엘리사벳의 따뜻한 위로 한마디로 눈 녹듯 사라지며 마니피캇의 노래처럼 기쁨에 용약하게 된다. 엘리사벳은 불안에 방황하는 어린 마리아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그녀를 따뜻이 보듬고 위로해 준 것이다. 결국 엘리사벳의 진심에서 울어난 따뜻한 위로가 마리아의 모든 불안을 기쁨으로 변화시킨 놀라운 힘이 된 것이다. 이 장면이 내가 성서에서 가장 감동받는 장면으로 생각하는 이유이다. 즉 ‘위로의 힘’이다.

위로를 갈망하는 사람들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도 진심어린 위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우선 아직까지도 아홉 명의 실종자들의 시신도 찾지 못하고 진실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2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그렇다. 또한 경찰의 물대포를 머리에 맞고 쓰러져 2백일 동안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서 누워있는 백남기 농민의 가족들도 있다. 

정부의 부당한 공권력에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모든 것을 다 잃고도 오히려 범법자 취급받고 있는 밀양 송전탑 농민들과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도 그러하다. 그리고 며칠 전 열아홉 살 꽃다운 청춘을 펴보지도 못한 채 지하철 구의역 참사로 목숨을 잃은 비정규 노동자 김 군 어머니와 가족들 이밖에도 대기업의 횡포로 목숨까지 잃은 대한민국의 많은 노동자들의 가족들을 들 수 있겠다. 

이들에게는 갖가지 사연들이 많겠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공권력이나 대기업 횡포에 희생된 피해자들임에도 사회와 일부 언론으로부터 오히려 가해자로 취급받고 있다는 점이다. 세월호 유가족들만 해도 아직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고 시신조차 못 찾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제 제발 좀 그만해라”는 질타를 받고 있다. 백남기 씨는 농민으로서 단지 박근혜 정부의 쌀수매가 공약이행과 쌀 수입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했다 머리를 직사한 물대포에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었음에도 경찰관계자나 정부의 어느 누구도 사과는커녕 방문하는 사람도 없다.

구의역 참사로 죽은 김 군도 언론에서는 작업 중 통화하다 전철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해 죽었다며 허위보도를 했고 메트로 공사 측에서도 김 군이 알리지 않고 작업하다 사고난 것이라며 책임을 회피하다 여론에 떠밀려 마지못해 김 군 잘못이 아닌 시스템의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이들 당사자 가족들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밀양과 강정마을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대대로 농사짓고 고기잡이하며 살아 온 고향땅에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송전탑 만들고 해군기지를 지어 그들의 생계를 유린당한 피해자임에도 오히려 가해자처럼 손가락질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새까맣게 타는 심정으로 진상규명을 외치는데도 사람들은 ‘시체장사’라는 막말로 죽음을 팔아 돈 벌려고 하는 사람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상규명과 가해자들의 진정한 사과 그리고 따뜻한 위로이다. 정부는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12년 전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무장단체에 피납된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 씨가 살해되었을 때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국가가 가장 기본적인 임무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분노하며,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현 정부가 들어선 다음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사건, 옥시 가습기 사건 등 국민 안전과 직결된 사건이 연이어 터졌음에도 그에 대한 대책마련은 커녕 한마디 사과나 위로도 없이 외면하고 있는 것은 정부에 대한 신뢰에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게 한다. 

영혼이 빠진 좀비들처럼

요즘 한국뉴스를 대하기가 겁이 난다. 장래 희망이 과학자가 되는 것인데 방법을 모르니 가르쳐 달라고 하는 낙도 소년에게 각 도시에 있는 창조경제 연구소에 가서 문의하라는 대통령의 답변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환경오염 대책은 경유차를 타지 않아야 하고 미세먼지 대책은 각 가정에서 고등어구이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에는 입이 딱 벌어진다. 마치 개그 프로를 보는 것 같다.

나는 위정자들이 좀 더 인간다움을 회복해 줄 것을 바란다. 2년 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종은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라는 말씀과 함께 정치란 바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깨우쳐 주셨다. 따라서 그분은 평소 사회가 약자의 고통을 함께하며 상처받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정의의 실천이라고 말씀하신다. 

교종은 최근 사제들을 영성묵상에서 ”자비의 행위는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출발하여 외적인 행위로 변화되는 조건 없는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행위는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서 불쌍함을 느끼고 무엇인가 필요한 사람 앞에서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극명한 불의 앞에서 속이 뒤집어지는 의분을 토하면서 그런 상황을 회복시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즉시 실천에 옮기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라며 불의에 맞선 구체적인 행동을 역설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재의 우리사회는 정의는 물론 본연의 정치역할에서도 한참 멀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4월 총선결과를 바로 국민들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체감하고 정치권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대한민국이 외형적인 성장 뒤에 감추어진 불편한 진실들 즉 세계최고의 자살율, 행복지수 최하위권, 선진국 가운데 가장 부정부패가 심한 국가, 사회정의 실종, 문란한 성도덕, 물신숭배, 극심한 빈부격차, 지역갈등, 세대갈등, 계층간 위화감, 24시간 방영되는 막장드라마, 거짓을 보도하는 선정적인 언론, 헬조선으로 표현되는 젊은이들의 좌절감 등등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있는 것을 국내에 사는 국민들보다 해외에서 가끔 조국을 방문하는 이들이 더 실감하고 있다. 

나는 최근 2년 동안 3개월에 걸쳐 조국을 배낭여행하면서 한국의 속살을 체험했다. 나의 경험을 한 마디로 냉정하게 표현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마치 ‘영혼이 빠진 좀비’들처럼 시류에 휩쓸려 우왕좌왕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10명을 채우지 못해 멸망한 것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나라는 사회 구석구석에 ‘깨어있는‘ 이들을 적잖게 볼 수 있어 그나마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현상은 우리의 미래인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을 앗아버렸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사회는 동력이 멈추어진 사회이다. 마치 빙산에 부딪쳐 서서히 침몰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선상에서 댄스파티를 즐기던 타이타닉호 승객들처럼 대한민국에서는 국민들이 위기도 느끼지 못한 채 여전히 마시고 취하고 흥청망청 춤추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모든 국민들이 깨어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다급하다. 속히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아니 무엇이 문제인지 찾아내야 한다. 더 이상 진보니 보수니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며 다툴 시간이 없는 것이다.

모두 힘을 모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도덕과 예의가 바로 선 맑은 대한민국을 재창조해야 한다. 모든 국민들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만들어가야 한다. 남북의 동포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통일을 향해 나가는 희망의 나라를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 비유하자면 마니피캇의 노래가 이 나라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일부만 다시 옮겨본다.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하느님, 대한민국을 구하소서 !


장기풍 스테파노
뉴욕 교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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