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고통을 우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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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고통을 우회하지 않는다
  • 한상봉
  • 승인 2016.06.07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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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여덟 단계-6: 고통, 두번째 이야기
ⓒ한상봉

고통은 하느님의 뜻인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한, 그 고통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 많은 설교가들과 사제들이 그런 충고를 했다. “고통도 하느님 뜻이니 받아들이라”고. 사실 고통뿐 아니라 매 순간 우리가 만나는 사건과 희노애락이 모두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는 ‘성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룩한 심연’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 에크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주어진 상황에 짓눌려 있는 사람과 그러한 상황을 뛰어넘거나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양편에서 처형된 두 도둑의 태도에 이런 ‘내적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한 도둑은 원한을 품은 채 빈정대며 죽음을 맞이하지만, 다른 도둑은 예수를 신뢰하며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첫 번째 도둑은 회한과 분노로 고통이 더해졌으나, 두 번째 도둑은 고통 속에서도 영원과 만났다. 그에게 예수가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세월호 참사 등으로 빚어진 오늘날 우리가 겪는 ‘억울한’ 고통을 무조건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을 그저 우리한테 닥친 고통을 합리화하고 인내를 요구하는 명령으로 알아듣는다면 이것은 착각이다. 고통의 상황은 ‘... 그래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결론이 아니라 삶을 다시 정돈하라는 ‘도전’이다. 삶의 본질을 깨닫고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라는 전갈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랑과 정의를 증언하라고 재촉하실 뿐이다.

영국의 여의사 셰일라 캐시디는 1970년대 초반에 칠레에서 군사쿠데타에 이은 탄압으로 부상당한 혁명가들을 돌보았다는 이유로 군사정권에 의해 구속되었다. 그녀는 고문을 받으며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이윽고 “탄원하기보다는 봉헌하는 마음으로 빈손을 하느님께 뻗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감금상태에서 그녀는 오히려 자유를 느꼈다. 캐시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철창에 날개를 부딪치면서 힘을 소진할 수 있다. 또한 감옥에 갇혀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마침내 놀랍게도 그 안에서 노래 부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라는 책을 쓴 미국 예수회원 월터 취제크 신부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였다. 폴란드 동부지방에서 사목하던 취제크 신부는 신자들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러시아 강제수용소로 이송되는 폴란드 노동자들과 기꺼이 운명을 같이 했다. 그런데 사제 신분이 발각되면서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 루비안카 감옥에서 꼬박 20년을 살았다. 그후 시베리아에서 3년을 더 살고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던 취제크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날마다 계속되는 24시간 동안 주어지는 모든 것, 곧 때에 맞춰 마련해 주시는 사람들과 장소와 상황 속에 있다. 하느님의 뜻은 매 순간 소중하며,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바라신다.”

취제크 신부는 루비안카 독방에 갇혀 지내면서도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자기 삶의 고삐를 하느님께 맡겨 드렸다. 이는 감옥에서도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라는 소명이었다. 여기서 다시한번 생생하게 삶으로 고백되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고 모든 것을 존재케 하며 이끄신다. 이 사실을 갖가지 상황과 조건 안에서 식별하는 것,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뜻을 알아본다는 것은 모든 상황과 현실을 받아들이고 완전한 신뢰와 확신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 어느 것도 나를 그분한테서 떼어놓을 수 없다. 그분은 모든 것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취제크 신부는 “구원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매일 아침 하느님께 모든 일과 기쁨, 날마다 주어지는 고통을 봉헌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취제크 신부는 감옥에서도 시베리아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상황과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그 주변을 맴돌고 있음을 발견했다.

헨리 나웬, 상처입은 치유자

“우리에게는 한 길이 닫히면 또 다른 길이 열린다는 것을 알아보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엘스버그는 말한다. 겨울이 되면 온 세상이 죽은 것 같아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생명을 피워 올린다. 사람이 비록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해도 거기에는 분명 하느님의 섭리가 있음을 성인들은 믿었다.

샤를 드 푸코의 영성을 따르는 예수의 작은형제회 회원이었던 카를로 카레토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그는 알제리의 작은 수련소에서 가난과 고독과 기도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알프스에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산악인들을 구조하는 일을 꿈꾸었다. 그러나 친구가 예방주사를 잘못 놓는 바람에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못 쓰게 되어 꿈은 사라지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사막으로 왔는데, 처음엔 그분이 자신을 골탕 먹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은 은총으로 바뀌었다. 그는 산에서 눈길을 걷지 못하게 되었지만 사막을 걸으며 기상학자가 될 수 있었다.

헨리 나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단순한 교의나 도덕적 격언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예수의 삶은 기쁨과 고통이 뒤섞여 있는 여정이었다. 두 제자의 어머니가 예수께 자기 아들을 당신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 잔을 마신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쓴것과 단것, 슬픔과 영광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다. 헨리 나웬은 <이 잔을 들겠느냐>라는 책에서 이렇게 성작에 대해 묵상했다.

헨리 나웬은 미국에 온 뒤에 노트르담과 예일, 하버드대학에서 가르쳤다. 50권이 넘는 책을 썼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날렸다. 1996년 이승을 떠날 때는 영향력 있는 영성작가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내적 투신과 부서진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나눔으로써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영적 거장이 아니라 그의 책 제목처럼 ‘상처입은 치유자’였다.

그는 무절제한 사랑과 인정받으려는 욕구에 시달렸다. 결코 채울 수 없는 내적 공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우정을 나눌 줄 아는 재능이 있어 가는 곳마다 공동체의 씨앗을 뿌렸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늘 다른 곳으로 밀어내어 새로운 것을 계획하게 만들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라틴아메리카 선교사로, 곡마단 지도신부로 전전했다. 그러나 고독은 깊어갔다. 이때 헨리 나웬은 예수가 광야에서 경험한 것은 “더 많은 인기를 누리고 더 강력해지며 더 위대해지려는 욕구”였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헨리 나웬의 갈증 같은 욕구이기도 했다.

그에게 생의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은 1986년 토론토에 있는 라르슈 새벽공동체에서 초대받았을 때였다. 거기서 딱 10년 살고 가장 큰 깨달음과 휴식을 얻고 죽었다. 공동체에서 헨리를 기다린 것은 중증 장애인 아담이었다. 아담은 말을 할 수도 없고 혼자 움직이지도 못했다. 헨리는 아담을 목욕시키고, 옷을 입히고, 음식을 먹이면서 돌보았다. 사람들은 헨리 나웬의 재능을 죽이는 일이라고 의아해했지만, 헨리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담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그렇다고 만사가 형통한 것은 아니다. 1년 만에 극도의 신경쇠약에 걸린 헨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서” 처절한 암흑 체험을 하고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라도 하느님은 결코 나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걸 안다.” 점점 내면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실 공동체에서는 가정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과 친밀함, 동료애와 소속감, 편안함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 회한과 절망과 아픔도 있다. 즐거움은 흔히 슬픔 속에 숨어 있다. 여기서 헨리 나웬은 말한다.

“새벽공동체에 살면서 나는 슬픔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눈을 갖게 되었다. 슬픔은 여전히 그곳에 있지만,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 앞에 서 있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무언가 변화되는 것을 본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기쁨과 평화는 고통과 죽음을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통과할 때만 얻을 수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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