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문명, 속도를 내는 것은 전쟁을 벌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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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문명, 속도를 내는 것은 전쟁을 벌이는 것
  • 신승철
  • 승인 2016.06.07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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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철의 Ecosophia
ⓒ한상봉

꽉 막힌 자동차도로에서

저희 집에는 미국에 가신 누님이 남겨 둔 자동차 하나가 있습니다. 가끔 그 자가용을 타면 편리하지만, 주차 문제며, 기름 값이며, 걱정거리도 함께 생기죠. 이따금 강의나 출장이 있을 때 자동차를 운행하는 편이지만, 자동차문명이 만든 속도사회에서 벗어날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엄청나게 밀려 있는 출근길에 가다서다를 반복할 때면, 속도문명의 후유증과 역설을 느끼곤 합니다. 여럿이 함께 천천히 가야지 혼자만 빨리 가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출근길은 지옥길이 되고, 스트레스며 짜증이 엄청나게 되는 것이지요.

얼마 전 마음씨 좋은 제 친구 자동차의 옆자리에 탔던 적이 있습니다. 워낙 순박하고 착한 친구라 얘기를 하면서 천천히 갈 요량이었는데, 웬걸! 이 친구가 생각지도 못한 난폭운전과 요행을 바라면서 끼어들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때 만감이 교차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라는 기계장치 속에서 실종된 인간성의 와해와 인격의 분열을 느꼈지요.

사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무심결에 이루어지는 동작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좌회전 할 때 좌측 깜빡이를 넣는 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해서 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각각이 사람들이 다 타고 있는데, 기계장치들이 움직인다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도 기계처럼 사람들이 변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동차문명이 남긴 것들

자동차문명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남겼을까요? 먼저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에 있는 과정으로서의 풍경은 완전히 사라져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입니다. 목적을 위해서 과정이 어떻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실상 자동차문명에는 뿌리 깊습니다. 이것은 속도사회, 성공사회를 만들어서, 성공을 위한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주변사람들이나 이웃을 지나쳐야 할 풍경으로 간주하거나 하거나 아예 관계 자체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공하려고 아득바득거리며 달리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면 혼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또한 자동차문명이 만들어지기까지 전국이 고속도로로 통합되고 도로 건설을 빙자해서 개발주의와 토건주의와 득세한 것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역의 고유한 식생, 문화, 환경은 오로지 수도권 중심의 삶에 편재되어 지역은 내부-식민지와 같은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전국이 통합되면 지역이 발전할 것 같지만, 사실은 수도권이나 서울로 자신의 자원과 부, 화폐가 매끄럽게 빠져나갈 통로였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울에서 지역으로 쓰레기며 산업 폐기물들을 실어 나르는데 고속도로가 이용될 뿐이지요.

또한 자동차문명은 부실과 부패의 속도전 사회, 위험사회를 만들었습니다. 빨리빨리 움직이다보면 자연 부실해지고 윤리적인 면에 대해서 둔감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현대사에 있는 비극들은 모두 다 속도전이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사태로 이르는 사고에는, 앞만 보고 달려갔던 속도전의 성장주의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장주의 사회와 속도사회는 개인에게는 성공주의와 승리주의를 의미하였지요.

경쟁의 아수라장에 던져진 개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네가 성공하면 된다.’는 식의 속도를 부추기는 메시지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고, 느림과 여백이라는 생명의 시간을 재발견하고, 함께-더불어-같이 움직이는 것이 대안적 삶과 접촉하는 지름길입니다.

속도문명의 최종 결론은?

프랑스 철학자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자동차에 몸을 싣는 것은 탄도미사일에 몸을 싣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운송수단은 전쟁기계와 같다는 것이지요. 속도사회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 속에서만 안정감을 찾는 ‘사이존재’를 만들어냅니다. 사이존재는 속도 속에서만 안정감을 갖는 불안정한 존재들입니다. 자동차라는 전쟁기계는 자연, 생명, 민중의 삶에 대해서 전쟁선포를 하면서 속도를 내다 정지하면 죽음뿐이라는 명령의 메시지를 발신합니다.

독일 파시스트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사회주의자와 민중들의 거리점거와 시위를 두려워해서 했던 정치적 행동이 바로 30만 명의 중산층에게 폭스바겐을 싼 가격으로 불하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닙니다. 민중이 검거해야 할 거리를 자동차가 씽씽 달리도록 한 것입니다. 자동차는 사실상 민중과 거리의 정치에 대한 전쟁선포였던 셈이지요.

속도사회의 최종 결론은 무엇일까요? 독일의 녹색당 활동가였던 루돌프 바로는 한 토론회에서 “당신들이 타고 온 자동차에도 핵문명이 있다.”라고 발언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핵문명과 자동차의 관계는 과연 무엇일까요? 냉전 시기의 핵 경쟁은 “모두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평화를 지키자.”라는 형이상학적인 납빛 평화만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사실상 핵무기는 상대방의 속도를 제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 비릴리오의 진단입니다. 속도문명은 결국 핵문명을 통해서 절멸의 이미지를 드러냅니다. 핵이라는 것이 원자에 빛의 가속도를 부여해서 대규모 살상과 절멸을 초래하는 결론에 이른다는 점에서도 속도의 본성이 드러납니다. 속도는 효율성을 높이고 성과를 많이 내며 편리하다는 이미지와 달리, 대량살상으로 결론이 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용길

자전거와 보행자 중심의 사회를 위하여

독일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는 도심에서 자동차운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사실 금지는 아니고 엄청나게 높은 주차료로 인해 감히 자동차를 도심으로 가져올 수 없게 만들어 놓았지요. 또한 도심에 산업시설과 관공소, 기업 등을 유치해서 자전거와 보행으로 직장에 출근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프라이부르크는 매우 안전하고, 쾌적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사실 자전거가 레저나 스포츠 수단이 아니라, 교통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도심 내에서의 자전거도로, 근접거리에 있는 직장, 강력한 토지정책 등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명박 전 정부의 4대강 사업에서 돌출된 자전거도로처럼, 도심이 아닌 도시 외곽에서 레저나 스포츠용으로 자전거를 이용하게 만든 것은 정말로 자동차문명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이 아닌 겉치레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개발독재 시절 수많은 고속도로와 국도를 만들면서, 사실상 슬그머니 누락한 부분이 바로 보행권입니다. 도로에 아스팔트를 깔면서 보행로를 만들지 않아도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지요. 시골에서 할머니들이 교통사고를 많이 당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다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한국처럼 보행권이 배제되고 무시된 곳도 없다고 할 정도로, 한국은 자동차의 천국입니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대기업의 입장에서는 도로가 많이 건설되고 자동차 중심의 삶으로 재편되는 것이 참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대신 보행자의 권리는 완전히 배제되고 실종됩니다.

보행의 장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타면 지나치는 풍경에 불과했던 것도, 머무르고 천천히 관계를 맺는 곳이 됩니다. 특히 도시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현실에서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머문다는 것은 골목상권이나 공동체경제, 서민경제, 자영업 등에 굉장한 이점을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속도는 굉장히 느립니다. 천천히 촉수를 문지르는 달팽이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어떤 실험영화에서 달팽이의 움직임을 소재로 다룬 적이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리게 움직이는 달팽이의 영상 이미지를 접하면서 졸게 만들었습니다. 빠른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자신이 느림에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너무 느려서 참고 볼 수 없었던 것이지요. 생명평화의 세상은 속도와 효율성에 의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느림과 여백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재창조하고 재발견하기 위해서 천천히 생각하며 음미하며 물으며 걸어가야 합니다.

저는 아침마다 도로에서 자전거를 탄 한 아저씨가 만든 소동에 주목합니다. 그 아저씨는 자동차 사이에서 자전거 속도를 유지하면서 유유자적 움직입니다. 뒤에서는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난리가 납니다. 저는 이 자전거가 속도문명을 고장 낸 분자혁명의 사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자전거의 소동을 보면 생명평화의 세상이 빨리 효율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굼뜨게 느리게 찾아올 영구혁명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빠름과 효율성이 아니라 느림과 여백에 희망을 거는 삶을 만들어보자는 조심스러운 제안을 드리며 이 글을 마칩니다.   


신승철 바오로
동물보호 무크지 <숨>에서 동물권에 대한 공부 시작.
문래동 예술촌에 연구공간 ‘철학공방 별난’ 운영.
저서에 <식탁 위의 철학>, <루저의 심리학>, <녹색은 적색의 미래다>
<마트가 우리에게서 빼앗은 것들>, <철학, 생태에 눈뜨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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