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이 시대를 관통하는 현실의 언어를 꼽자면 아마도 ‘불안’이 아닐까 싶다. 모두가 불안하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늪으로 빠지고 있다는 불안이, 다행히 직장에 잘 다니고 있는 사람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이, 자식을 가진 부모는 도대체 자식들이 힘겹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도 변변한 일자리 하나 제대로 얻지 못하는 현실에서 오는 안타까움과 불안이 가득하다.
그렇다고 미래가 장밋빛도 아니다. 오히려 미래는 흙빛이고 어둠의 그림자만 짙다. 그런 상황에서 남이 어떻게 사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로지 나와 내 가족의 삶만 지켜내는 것에만 몰두한다. 각자도생이라지만 연대가 깨지고 공감이 사라지면 과연 우리의 사회는 어찌될 것인가.
내가 이웃을 챙기지 않으면서 이웃이 나를 챙겨주기를 바랄 수는 없다.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어야 한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온갖 궁리에 몰두한 이들 가운데 율법학자도 빼놓을 수 없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묻는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 29) 예수님은 그에게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약탈당한 일을 전해준다. 사제도, 레위인도 그를 외면했다. 이 두 사람은 유다민족의 이른바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사제는 교회의 지도자며 율법의 전문가고 최고권위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입으로는 온갖 율법을 논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떠들지만 정작 도와줘야 할 사람을 만났을 때 외면했다. 괜히 자기가 떠안게 될지도 모를 불편함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는 율법을 알고 있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실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강도를 당해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레위인은 뜬금없이 나온 인물이 아니다. 레위인은 그들을 불쌍히 여긴 모세의 축복으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말씀을 가르치고 제사를 담당하는 직분을 맡았다. 율법교사인 랍비들도 레위 부족 출신이 가장 많았다. 당시 지식인이나 유지쯤 되는 이들의 상당수가 바로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 역시 피했다. 괜히 엉뚱한 일에 연루되어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여겨서 그랬을지 모른다. 그 역시 입으로만 떠들고 권력으로만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것에만 익숙했을 뿐이다.
강도를 당한 사람을 구한 이는 바로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유다인들이 불구대천의 원수거나 불가촉천민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사마리아인들이 유다인들보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더 유복했을지 모른다. 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지도 않았고 어느 정도의 기득권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들에 대해 도덕적으로는 우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오히려 배타적이고 억압적이었다. 그런 사마리아인이 강도 당한 사람을 구했다.
그 핵심이 복음서에 그대로 나온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0, 33) ‘가엾은’ 마음! 맹자 식으로 말하자면 그건 바로 측은지심이다. 가엾다 여기는 것은 나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감정적 발현이다. 그게 바로 사랑의 바탕이다
지금도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 고통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는가?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들이 받는 냉대와 멸시는 당연한 몫이라며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 앎이 삶으로 체화되지 못한 지성이나, 술수와 이해관계를 사회적 질서와 안녕으로 포장하는 권력이 저지는 횡포를 목격한다. 사제와 레위인은 바로 그런 허위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나의 모습이다. 그들은 권위를 내세우면서 정작 자기 것 챙기기에만 급급하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표리부동과는 달리 겸손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기꺼이’ 도왔다. 복음서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 글의 문맥과 상황을 짚어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은 아마도 유다인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람들인데도 그런 출신이나 배경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도왔다. 그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랬다. 그게 공감과 동정이고 소통이다.
사마리아인이라고 바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을 하던’ 그 사마리아인이 한가한 여행자가 아니라 상업적 출장 중이었을지 모른다. 조바심을 누르고 기름과 포도주로 그의 상처를 씻어주게 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어딘가 멀리 가던 중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나귀에 싣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아끼지 않고 아무 조건도 없이 강도 당한 이에게 내줬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응급처치 이후의 보살핌을 위해 그를 나귀에 태우고 여관으로 데려가 보살폈다. 나귀를 내줬으니 그는 걸어갔을 것이다. 이미 충분히 선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떠나면서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의 돈을 주었다. 그가 보상을 바라고 그랬을까?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불쌍한 그 사람을 챙기기 위해 돈까지 주며 돌아오겠다고,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더 지불하겠다고 약조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가르침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이는 바로 사마리아인이다. 모두가 외면하고 천시하던 바로 그 사람이 가장 도덕적이며 가장 복음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를 믿는다고 떠든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하게 실천한 사람이다. 말로는 예수를 떠들어대면서 정작 그 사랑은 실천하지 않는 편협한 우리의 모습이 이 비유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청년, 죽으라고 일해서 지금 누리는 풍요의 바탕을 마련했지만 이제는 철저하게 외면 받고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가난한 노인들이 바로 길에서 강도를 만난 그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외면하고 심지어 윽박지르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묻는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6~37)
지금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 추구에만 몰두한 우리에게 던지는 준열한 가르침이다. 아무리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미사 참례하며 영성체를 하고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어도 정작 우리 주변의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하고 사는 한 우리는 가짜고 엉터리다.
많은 이들이 불안에 휩싸여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아래의 고통을 외면하고 위의 열매만 바라보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나부터 참된 이웃이 되어야겠다. 가서 그들을 힘껏 껴안고 등을 토닥이는 것부터 실천해야겠다. 그들이 바로 교회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