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자비의 학교, 가톨릭일꾼운동에 투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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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자비의 학교, 가톨릭일꾼운동에 투신하며
  • 신배경
  • 승인 2019.06.18 14: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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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배경 칼럼]

성령강림대축일을 앞두고 있는 봄의 끝자락을 영월에서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지인 분이 운영하시는 사과 농장에 사과꽃을 볼까하여 왔는데, 사과꽃을 따는 작업이 한창이네요. ‘적과’(摘果)는 과수 재배에서 너무 많이 달린 열매를 솎아내는 일을 의미합니다. 곁가지에 열린 2~5개의 열매 중에서 가장 튼실해 보이는 것만 남기는 작업입니다. 여러 개 열매 중에 하나만 남긴다는 것이 농사를 모르는 제 눈에는 난감한 일로만 보입니다.

일단 올망졸망 열려있는 열매가 너무 귀엽고 예뻐서,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사실이 제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나마 하나가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오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작업할 수 있지만, 달려있는 열매들이 엇비슷할 때는 갈등이 생깁니다. 나의 선택에 따라서 빨갛게 익어갈 사과가 결정된다는 것이 놀랍고,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요. 가지에 남긴 열매가 언젠가 누군가의 몸 안에 들어가 다른 세포와 만날 테니까요. 적과 과정 또한 생명을 향해 생명을 보듬는 일. 내가 선택한 열매가 누군가의 생명에 가서 닿는다고 생각하면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열매를 솎아내면서 동시에 가지에 피어있는 꽃들도 솎아 냅니다. 보기에는 여전히 예쁘지만 수정이 되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남아있는 꽃들을 나무에서 덜어내는 작업은 건강한 열매를 키우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꽃이 아름답던 시절은 지나고, 이제 열매를 키워내려고 에너지를 모을 시간이지요. 농사를 모르는 제게는 꽃을 꺾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지만, 먹음직한 사과를 만나려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생각하며 꺾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내 인생에 필요한 적과

제 삶에도 ‘적과’가 필요했나 봅니다. 작년 봄, 건강에 경고등이 켜지면서 계획했던 일들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몸과 마음이 아픈 시간을 겪어내야 했을 때, 그 때는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에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겨야 하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2018년 5월 이탈리아로 출국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던 4월에 예전에 다쳤던 다리를 또 다치게 되었습니다. 1년 사이에 3번째 부상이었지요. 제 모든 것을 걸었던 길이었던 만큼 무거운 마음으로 모든 계획을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출국 대신 고향에 돌아와 버티어낸 시간을 돌아보니, 제 안에 늦게까지 남아있던 시의적절하지 않은 꽃들과 불필요한 열매들을 떨어뜨려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인생의 적과를 겪은 것이지요. 그저 숨을 쉬며 버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던 시간들, 나의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내어 맡겼던 시간입니다. 건강마저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배우는 시간을 호흡하면서, 하느님의 손길이 제 영혼의 정원사가 되어 주었습니다.

 

가톨릭일꾼,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 흐름 안에서 ‘가톨릭일꾼’을 만났습니다. 첫 만남은 2016년 5월 15일. 가톨릭일꾼 창립미사가 있었던 날로, 성령강림대축일이자 가톨릭일꾼의 공동창립자인 ‘피터 모린’의 기일이었습니다.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기도하고, 공부하고, 행동하라.”는 문구에 이끌려 창립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가톨릭일꾼과의 만남을 돌이켜보면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 3,8)라는 복음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후 한동안 제가 거처를 광주로 옮기게 되면서 거리상 인터넷 사이트(www.catholicworker.kr)를 통해 글로만 만나왔던 가톨릭일꾼을 지금은 서울에 돌아와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가톨릭일꾼은 제게 “사랑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몸소 실천한 사랑의 삶을 통해 배우는 부분도 있지만, 함께하시는 분들을 통해 살아 숨 쉬는 일상의 사랑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정을 들을 때마다 삶의 굽이굽이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합니다. 각자 생김새가 다르듯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법도 참으로 다양하지만, 사랑을 향해 흐르도록 이끄시는 물결만은 같은 빛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보고, 듣고, 느끼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음은 “함께”하는 여정이 주는 선물로 느껴집니다.

가톨릭일꾼과 함께하는 시간 안에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인 “환대의 영성”을 배워나갑니다. 친절한 일상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의 형제, 자매에게 가 닿을 수 있는 환대를 배우고 싶습니다. 결국 가톨릭일꾼은 “행동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을 함께 만들어 가는 학교입니다. 이미 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이제 막 환대의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 환대가 당장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그들에게 배우려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함께하는 일은 결국 하느님 사랑의 물길이 서로 만나는 것이겠지요.

그리스도를 따르며 걷는 길 위에서

이제 영월에서의 짧은 일정을 뒤로 하고 다시 길 위에 나설 시간이 다가옵니다. 지금 영월 밤하늘에는 쏟아질듯 별들이 빼곡하게 수놓아져 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별빛입니다. 이 아름다운 별을 서울에서는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닌 별처럼, 자리가 바뀌어야 보이는 것이 있음을 봅니다. 이제 ‘가톨릭일꾼’이라는 사랑의 학교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다시 배우려 준비합니다. 느린 걸음이겠지만 내가 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나를 만나고, 이웃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여정이 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떠올려 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누구를 만나기 위해 어디로 향할 것인가?” 마음 주머니에 지니고 있는 기도 제목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걷는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고 서로 환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안에서 당신과의 만남 또한 기다리겠습니다. 이 길을 여러분과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Ω

* 신배경 자매가 첫 번째 가톨릭일꾼 상근 활동가(full-time animator)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신배경 클라우디아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애니메이터
<가톨릭일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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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 2019-06-24 07:08:12
신배경 선생님. 가톨릭일꾼을 떠올리면 이제 더 반가운 얼굴이 기억나겠군요^♡^
새 출발. 축하하고 그 환대의 길위의 길. 지지합니다.
기도로 함께 합니다^^ 김희경드림